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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멋을 찾는 멋쟁이

지난 5월 셋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었습니다. 이날을 맞아 지자체나 기관들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공통된 행사가 전통 성년례인 관례와 계례였습니다. 이 의례에서는 절차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머리 모양을 바꾸는데, 이를 통해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뀐 옷과 머리 모양은 ‘자신만의 멋’을 만들어 가야 할 어른의 세계로 아이를 인도합니다. ‘멋’은 맵시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뜻하는 말이니, ‘그의 멋’에서는 외양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이나 바람 같은 내면까지도 드러납니다.

조선 시대에 관례를 올리는 모습은 이번 달 스토리 웹툰 〈성인의 탄생〉과 비야의 사건일지 〈낙화생이 사람 잡네〉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산비는 남장(男裝)을 하고 참석한 이웃 소년의 관례에서 살해당할 뻔한 소년을 구하는 한편, 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의 묵은 원한도 해결합니다. 『역중일기(曆中日記)』 속 최용채의 관례를 묘사한 스토리 웹툰에서는 일기 속 대견한 인물과 달리 벌써부터 ‘자신만의 멋’을 시도하느라 소동을 벌인 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관례를 올린 남성에게서 가장 큰 변화는 상투를 트는 머리 모양일 터, 여기에 들이는 남성들의 노력과 그 결과인 멋은 이민주 선생님의 〈조선의 멋쟁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통이 생길 만큼 머리를 끌어올리고 망건을 조여 맨 다음에 머리 모양보다도 작은 폭이지만 높은 갓을 쓰고 빳빳하게 풀 먹여 다림질한 흰 도포를 입은 조선 시대 남성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런 모습이 조선 시대 남성들의 지향이었을까요? 이런 모습을 하고 이들은 무엇을 하고자 했을까요? 이달의 편액에서 소개된 우탁(禹倬) 선생님의 모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백의를 입고 도끼를 앞세워 왕에게 간언을 했던’ 모습은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남성성의 상징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이들이 사회와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욕망의 표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탁 선생님의 ‘도끼와 흰 도포 자락에 담긴 신하의 마음’을 조선의 남성들이 본받고자 했던 것은 성리학(性理學)의 영향도 있습니다. 한편, 성리학의 수신(修身)과 극기(克己)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의 욕망(慾望)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이는 여성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여성의 생각, 차림, 동선 등 모든 것이 통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통제에 순응하는 삶만 살지는 않았습니다. 김소희 선생님의 〈조선 후기 여성 복식에 표현된 욕망의 의미〉에서 여성들의 멋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의 하후상박(下厚上薄) 옷차림은 속옷과 겉옷으로 여성의 몸을 꽁꽁 싸맸어도 여성들의 몸을 더 잘 드러나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차림이 남성들의 요구에 반응하여 인정받고 싶어하는 여성의 욕망을 보여주는 듯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요구에 반항하여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사회적 통제에 대한 반항으로 택할 수 있는 옷차림으로는 ‘남장(男裝)’도 있습니다. 현대에 해석되고 창작되는 전통 시대의 여성들은 남장으로 ‘사회적 활동’이란 욕망을 실현합니다. 소설 속의 산비는 남장을 하고 이웃 소년의 관례에 참석합니다. 뮤지컬 〈난설〉 속의 허초희(許楚姬)도 남장을 한 채 학습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창극 〈정년이〉에서도 남장을 한 정년이가 무대에서 자신의 바람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녀들도 남장을 했을지 의문이지만, 남장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남장이 어울리도록, 허리띠나 갓끈을 고쳐 매고, 패물로 치장을 했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그녀들만의 멋이라면, 멋이었을까요? 남장을 하든 치마저고리를 입든, 어쩌면 달 속의 항아였을지도, 하늘의 신선이었을지도 모를 그녀들이 지상에서 힘겨운 세월을 보내고 떠난 중에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차림으로 멋을 내고 부르고 싶었던 노래[시]를 불렀던 그 순간 아니었을지? 이수진 작가님이 뮤지컬 〈난설〉을 소개해 주신 〈조선 힙스터 허초희의 짧고 혹독했던 이승 체험〉을 읽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끼와 흰 도포 자락에 담긴 신하의 마음, 직방재(直方齋)〉란 글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서재(西齋) 직방재(直方齋)를 이달의 편액으로 소개합니다. 역동서원은 앞서 언급했던 우탁선생을 모신 서원인데, 위 글을 통해 우탁 선생의 삶과, 우탁선생을 모시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퇴계 선생님을 비롯한 선인들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역적”, “왕이 된 남자”, “장영실”, “징비록”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과 자리를 함께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흑립(출처: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14일 잠시 흐림. 용만관에서 떠나 소관관(所串館)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川)까지 50리를 가서 양책관(良策館)에서 잤다.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15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잠을 깨니 빗발이 부슬부슬하는데, 지다 남은 꽃과 여윈 꽃술이 암벽 사이에 윤기(潤氣)를 머금고 있어, 지난겨울의 풍경에 비하여 배나 아름다웠다. 잠시 천연정(天淵亭)에 올라가 풍악을 듣다가 떠났다.
차련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에는 관 앞에 반송(소나무)이 있어 울창하고도 우툴두툴하며 높다랗게 우뚝하여 일산과 같았으므로, 명나라 가는 사신들의 시의 소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동림성(東林城)을 지나다 보니 길에 아름드리 솔이 많은데 검푸른 빛이 하늘에 닿았으며 어둑하게 칙칙하고 그늘이 져, 지나가기가 마치 굴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장(別狀) 정관(鄭觀)은 연경에 들어갈 때의 만상(灣上 : 의주)의 군관(軍官)이었는데 먼저 진(鎭)에 도달하였다가 길에서 맞아 절하고 이어 성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대가 그다지 높지는 않은데 건물의 제작이 자못 든든하고 크며 편액을 ‘동림수대(東林帥臺)’라 하였다.
대체로 그 성가퀴는 산을 따라 빙 둘렀지만 그래도 요충(要衝)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성을 고쳐 쌓아 그 남쪽 부분을 넓히면 보장(保障)할 수 있는 요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나, 애석하게도 건의하여 힘을 들이려는 사람은 없다.

대의 북쪽에 별장(別將)의 일 보는 곳이 있는데 건물이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며, 또한 창고에 곡식이 만 곡(斛 한 섬)이 넘게 있는데, 선천부(宣川府)에서 관장한다. 성안의 민가는 열두어 호에 지나지 않으나 이익 내는 것이 박하기 때문에 하나도 모여드는 자가 없다. 앞으로 방수(防戍)하여 막아 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변란이 생겼을 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될까 걱정스럽다.
정관이 음식 한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이옥은 북한산 유람 중이었다. 절들을 돌아보니 승려〔緇髡〕 12(十二則)
승려의 옷은 베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푸른 면포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또는 검은 베로 만든 직철(直綴, 윗옷과 아래옷을 하나로 합쳐 꿰맨 장삼) 두루마기였는데, 소매는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단통모(短桶帽), 포량첨건(布梁簷巾), 폐양립(蔽陽笠, 패랭이) 등이 있고, 대나무 껍질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립(籉笠)이 있는데, 거기엔 입첨(笠簷)이 있어 사립(絲笠, 명주실로 싸개를 하여 만든 갓)과 비슷하며, 위는 항아리 같은데 그 꼭대기는 병(缾)의 입 모양처럼 되어 있다.
승려들의 띠는 대체로 명주실로 땋은 것이다. 혹 명주실로 땋은 것 중에 붉은 끈을 맨 자는, 옥이나 금으로 만들어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모자에 붙이기도 하였다. 또 아의(鴉衣)를 입고 털로 짠 벙거지를 쓰고, 벙거지 꼭대기에는 홍이(紅毦, ‘이’는 새의 날개에 여러 빛깔로 물들여 군복·말안장·투구·전립 등을 꾸미는 것, 속칭 상모)를 나부끼며,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승려의 염주는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 것이 많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율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사는 모양이 보자기 비슷하지만, 타원형이며 비늘을 이어놓듯 만드는데, 옷의 좌우에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수놓은 글자를 붙였다.
월광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자주색, 녹색, 푸른색의 끈 세 개를 늘어뜨렸다.
승려의 말에, “이 옷을 꿰매는 데에는 법도가 있고, 길이는 정해진 치수가 있고, 만들 때는 기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잘못되게 할 수도 없고 감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이 비호해 주는 바요,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가사에서 붉은 면포로 만든 가사를 한 번 보았다.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행장〔行李〕2칙(二則)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철쭉나무 지팡이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얼룩반점이 있는 대나무)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시를 지어 쓰는 무늬 있는 색종이 묶음)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비옷)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나섰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불을 일으키는 도구)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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