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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3月) _ 입학, 공부의 시작

[인물] 16세기 영남의 엄친아! 도산서원 최연소 합격생, 김령

계암(溪巖) 김령은 1577년 서울에서 태어나 1590년 고향인 예안의 오천으로 돌아온 뒤 줄곧 오천에서 생활하였다. 계암 김령은 오천으로 내려온 후 1년만인 1591년 그의 나이 15세의 어린나이에 도산서원의 원생이 되는데, 이는 1574년 도산서원이 설립된 이후 최연소 합격생이다. 그 이후로도 도산서원 입학생 가운데 김령 보다 어린 나이에 합격한 원생은 나오지 않았다.

김령은 도산서원에서 공부한 이후, 퇴계의 학통을 잇는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한다. 또한 영남에서 중요한 모임이 개최될 때마다 모임의 주요 직책의 담당자로 추천되는 등 청년시절부터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당대 조정에서는 그를 ‘영남의 첫 번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과거급제의 길은 험난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고 지방에서 진행되는 향시에는 이미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의 나이 36세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게 된다.

  •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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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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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스토리 조선시대 서원의 유생관리 조선의 교육 ? 서원 운영

[인물] 대구의 선비 임재 서찬규, 가난한 선비의 공부법 ‘책 베껴쓰기’

임재 서찬규는 1825년 대구지방의 명문가 달성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세우고 과거를 준비하였다.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당시 공부를 위한 서책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또한 늘 청빈하고 청렴한 삶을 추구했던 서찬규의 삶에서 서책을 구입할 만한 넉넉함도 없었다. 그럼에도 서찬규는 서책 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서책은 빌려서 여름 장마와 더위에도, 겨울추위와 바람에도 며칠 밤을 베껴 쓰며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하는 공부에 한계를 느낀 서찬규는 1850년 그의 나이 26살에 스승을 찾아 서울 노량진에 사는 매산 홍직필을 찾는다. 홍직필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은 학자로 당시 나라의 예론(禮論)을 자문했던 최고의 석학이었다. 서찬규는 홍직필을 스승으로 모시며 성현의 가르침의 궁구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어록(語錄)』으로 남기고, 스승이 권하는 책은 빠짐없이 빌려서 베껴 쓰고 읽고, 또 읽었다. 하루는 스승 매산이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을 읽어라. 『근사록』은 송(宋)나라때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우리나라의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이 말에 서찬규는 바로 격몽요결을 빌려 베껴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달간 등사하여 책을 읽었다. 스승인 매산은 이러한 서찬규를 늘 독려하였고, 훗날 서찬규는 홍직필의 학통을 이어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 성학십도 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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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은 소중하니까!’ 책에 비단 바르는 양반, 김택룡

조성당 김택룡은 명망 높은 양반가문 의성김씨 집안에서 1547년 태어났다. 김택룡은 일찍이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수학하였고, 1576년 그의 나이 2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08년 영월군수를 마지막으로 역임하고, 그 이후로는 고향 예안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러 학자들과 교유한다. 김택룡이 고향에 내려 온 이후 그의 집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손님이 찾아와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럼에도 틈이 날 때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소장하며 열심히 공부 하였다.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책은 연행을 떠나는 사신에게 부탁하였는데, 1609년 관찰사 한덕원(韓德遠)이 사은사(謝恩使)로 연경에 간다는 소식에 40여권의 서책을 부탁 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1612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을 받은 김택룡은 크게 기뻐하며 편지와 현규(玄圭)를 보내어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김택룡은 3년이나 기다려 어렵게 구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아끼고 아껴가며 읽었지만 4년만에 책은 너덜너덜 해졌다. 그러자 1616년 김택룡은 한덕원이 구해 온 『통감』, 『송감』,『성리대전』등 중국의 역사서와 유학서 등 40여권의 책에 정성껏 비단을 바르기 시작했다. 책을 보존하고 장식하는 장황(裝潢)은 4개월이나 이어졌다. 40여권의 책은 장황을 마치고, 드디어 그의 서가에 다시 귀한 보물처럼 꽂혀졌다.

  • 장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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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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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봉강서원 규율 7조와 교육철학 ‘공부는 나를 위한 것’

1842년 10월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가 권희학(權喜學)의 영정과 영조가 하사한 어서(御書)를 보관하는 봉강영당에 원생을 가르칠 수 있는 강당과 재실을 만들어 강학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강필효는 봉강서원을 만들면서 7가지의 규율을 만드는데, 선비로서의 자세, 하루 동안 해야 할 공부의 양과 방법, 독서해야 할 책과 독서 순서, 여가를 즐기는 방법까지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율과 함께 봉강서원 교육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이다. 공부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본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수양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에게 그럴 듯하게 또는 자랑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시험과 입시에 과열된 경쟁속에서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와 방향성을 상실한 학교교육과는 사뭇 비교되는 것이다.

원형 스토리 봉강서원

[사건] 성균관 유생들의 수준저하

1520년 윤 8월 1일 두 달에 한 번씩 실시되는 성균관 유생들의 시험결과가 나왔다. 사헌부의 지평으로 근무하던 황사우는 유생들의 성적에 적지 않게 놀랐다. 대부분이 ‘조통(粗通)’의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시험결과에 따라 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데, 통은 1등으로 정통하다는 의미이고, 약통은 통 다음 성적으로 대체로 통한다는 의미이며, 조통은 조잡하게 통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마지막으로 불통은 전혀 통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최하위 등수이다.

중종대에 들어 유생들의 성적이 크게 저하되고 있어 사헌부와 성균관 학자들이 크게 걱정하던 때였다. 중종 17년 4월에 시행된 시나 글을 짓는 제술(製述)에서는 응시한 성균관 생원 3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아예 제술을 하지 못했고, 했어도 제대로 된 것은 한편도 없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중종 31년 1월에는 유생 700여명의 시험지 중 제대로 된 것은 30편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합격자는 2명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 달에는 더 심해 2천 명 중 2명만이 합격하였다. 그 결과 관료로 등용할만한 인재가 나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인재가 부족하다는 탄식이 끊이질 않았다.

원형 스토리 봉강서원

[사건] 녹동정사, 불효자는 출입금지

1852년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을 제향하기 위해 만든 녹동정사에 등록된 회원들은 서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했다. 규율을 어긴 사람에게는 그 행실이 부정한 정도에 따라 처벌도 세 가지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상벌(上罰)로 바로 퇴출, 중벌(中罰)로 회원자격 박탈, 하벌(下罰)로 면전에서 꾸짖는 것이다.

상벌의 처벌 대상은 본처를 소박하게 대하는 사람, 형제 사이에 화목을 못하는 사람, 장로를 능멸하고 업신여기는 사람, 친족에게 화목하지 못하는 사람, 이웃에게 우호있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 고을 원을 대하여 시비를 논의하는 사람, 동료들을 모함하는 사람, 흉악한 말을 조작하는 사람, 쟁송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언행이 패려하고 악한 사람, 조약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 관청의 세금을 내지 않기를 도모하는 사람이다.

중벌의 처벌 대상은 인수인계의 기한을 넘기는 사람, 언어가 공손하지 않은 사람, 양쪽에 틈을 갈라놓는 사람, 외롭고 약한 사람을 속이고 침해하는 사람, 혼인을 이간질하는 사람,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것을 경영하는 사람, 아무런 이유없이 참석하지 않는 사람,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 일을 맡는 것을 피하기를 도모하는 사람이다.

하벌은 하는 말이 긴요하지 않은 사람, 좌중에서 떠들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 아무 일 없이 자리를 비우는 사람, 남 보다 먼저 파하고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녹동정사에서 이러한 처벌 대상에서조차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불효자’이다. 불효자는 삼강오륜의 근간을 모르는 이로써 국법으로 다스리기에 독자적으로 벌을 할 수 없지만, 녹동정사에서는 바로 퇴출이며 다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다.

  • 녹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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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원칙 서원 하인 금기사항 서원의 접대 규율

16세기 영남의 엄친아!
도산서원 최연소 합격생, 김령

계암 김령은 오천으로 내려온 후 1년만인 1591년 그의 나이 15세의 어린나이에 도산서원의 원생이 되는데, 이는 1574년 도산서원이 설립된 이후 최연소 합격생이다. 그 이후로도 도산서원… (더 보기)

대구의 선비 임재 서찬규, 가난한 선비의 공부법 ‘책 베껴쓰기

보고 싶은 서책은 빌려서 여름 장마와 더위에도, 겨울추위와 바람에도 며칠 밤을 베껴 쓰며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하는 공부에 한계를 느낀 서찬규는…(더 보기)

‘내 책은 소중하니까!’ 책에 비단 바르는 양반, 김택룡

3년이나 기다려 어렵게 구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아끼고 아껴가며 읽었지만 4년만에 책은 너덜너덜 해졌다.(더 보기)

성균관 유생들의 실력이 ‘조잡해지다(粗通)’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시험결과에 따라 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데, 통은 1등으로 정통하다는 의미이고, 약통은 통 다음 성적으로 대체로 통한다는 의미이며… (더 보기)

녹동정사, 불효자는 절대 출입금지

녹동정사에 등록된 회원들은 서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했다. 규율을 어긴 사람에게는 그 행실이 부정한 정도에 따라 처벌도 세 가지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상벌(上罰)로 바로 퇴출, 중벌(中罰)로 회원자격 박탈, 하벌(下罰)로 면전에서 꾸짖는 것이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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