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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7월) - “누정, 선비의 아지트”

깊은 숲 속, 작은 누정 위에 앉아 찬찬히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공기 크게 마시고 싶은 7월입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경치 좋은 곳에 단이 높고, 마루가 넓은 누정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누가, 언제, 이곳에 이렇게 운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을까 궁금해지곤 하는데요, 대부분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누정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상과 학문을 닦는 공간이자, 좋은 벗을 만나 술과 시를 나누는 공간이며 깊은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습니다. “담談” 5호 ‘이달의 일기’에서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일기 속 ‘누정’과 그 곳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백석정(白石亭) “이보게! 울지 말게, 나 괜찮다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에 조선 시대 한 선비는 친구가 가장 좋아했던 곳을 찾아갑니다. 선비는 친구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그곳에서 목 놓아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세상을 떠난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1582년 4월, 예천에 살던 권문해는 오랜 친구 강명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년 전. 1년 만에 망자로 벗을 대하려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권문해는 곧바로 명원의 집이 있는 문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문경에 도착한 권문해는 명원의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권문해는 친구 명원이 가장 사랑했던 곳, 생전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곳, 명원이 만든 정자 백석정으로 갑니다. 백석정은 강명원이 일찍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던 곳입니다. 친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권문해는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그렇게 한 참을 울고 난 권문해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 백석정

    권문해가 친구를 그리워하며 통곡했던 백석정

  • 백석정

    3D로 복원한 백석정

그리고 한 달 뒤, 권문해는 다시 백석정을 찾습니다. 백석정에 마련된 명원의 빈차(嬪次)에서 권문해는 친구가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를 위한 만시(輓詩)를 읊습니다.

‘어릴 적부터 글 쓰고 짓는 것을 좋아해 일찍이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과거에 급제하고, 곳곳의 마을을 다스리며 백성의 편안을 살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곧 세상을 등지고 백석정에 숨어 외로이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다. 세상살이에 눈 감고 귀를 닫으며 물결을 따르는 갈매기만이 그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홀로 백석정에서 강을 내려다보자니 더욱 그립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 (1582년 5월 13일 일기) 중 -

권문해는 그렇게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432년이 흐른 2014년 7월, 조선 시대 두 선비의 깊은 우정을 간직한 백석정을 찾았습니다. 백석정은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강명원은 벼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세 강이 만나는 곳에 누정을 지었습니다. 서로 다른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만나고 어울리듯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소통하고 만나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강명원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바로 권문해가 아니었을까…. 강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가자 소박하고 깔끔한 백석정이 보였습니다. 낮은 담장은 누정을 살짝 가리며 둘러쌓았고, 왼쪽 담장 사이에 좁은 문 하나가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문 너머에는 백석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반듯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대신해 강명원의 시 한 편이 인사를 건넵니다.

斂跡紅塵外 세상 밖에 자취를 걷어서
開亭碧峀傍 푸른 산 옆에 정자를 세웠노라
逍遙有樂地 소요하기에 좋은 땅이 있으며
漁釣送頹光 고기 낚으며 저무는 해를 보내네
白石千年白 흰 돌은 천 년토록 희고
長江萬古長 긴 강은 만고에 길도다
粉粉名利者 어지러이 명리를 찾는 자들
應笑此淸狂 응당 청광은 웃으리

이 시는 400여 년 전 이곳에서 슬피 울었던 친구 권문해에게 ‘나 괜찮다네….’라고 답하는 듯합니다.

  • 백석정

  • 백석정

백석정(白石亭)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 산 72번지
백석정을 만든 사람은 강제(姜霽, 1526-1582)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명원(明遠), 호는 백석(白石)이다. 1549년(명종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다시 1561년(명종16) 식년시 을과에 1위로 급제하였다.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영해(盈海), 영덕(盈德) 현감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후 일찍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였다. 백석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참고스토리

초간정(草間亭) “ 웅장한 자연을 섬세하게 품고…. ”

1582년 2월 8일, 공주 목사 권문해는 죄수의 탈옥으로 파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 예천에 돌아온 그는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서둘러 정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마을의 역병에도 정자 짓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권문해의 아지트 ‘초간정’이 완성되었습니다.

  • 초간정

    웅장한 자연을 단아하고 섬세하게 품고 있는 초간정

  • 초간정

초간정(草澗亭)을 짓고 난 후, 권문해는 하루가 멀다고 초간정을 찾아 시간을 보냅니다. 홀로 소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교우들과 술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곳을 찾았습니다. 5월이 되어 날씨가 맑은 날이 연일 계속되자 초간정에 머무르는 시간도 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온종일 초간정에 앉아 있다가 더위를 먹고 보름 넘게 심한 몸살을 앓고 물조차 마시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초간정에 가지 못해 애를 태웁니다.

1582년 6월 4일 맑음
기운이 연일 편치를 않아 초간정(草澗亭)에 왕래하지 못한 지 오늘 벌써 10여 일째이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 (1582년 6월 4일 일기) 중 -

초간정에 가고 싶은 권문해의 마음과는 달리 이후로도 병이 쉽게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권문해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1582년 6월 9일 의원을 불러 침으로 피고름을 터트리고, 굼벵이와 지렁이 즙을 죽에 타서 마시며 건강 회복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차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외출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여전히 초간정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침을 맞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닷새째인 6월 14일, 몸이 거의 회복되자 권문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초간정으로 달려갔습니다.
몸이 아플 때도 가고 싶었던 그곳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1582년 6월 21일, 권문해 선생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1553년 아내 숙인 곽씨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30년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 아내를 잃은 권문해는 상복을 입은 채 홀로 초간정에 오르곤 했습니다.

1582년 7월 15일 구름이 끼어 흐림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지냈다. 나는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이라 참여하지 않고 정원(靜元)이 혼자 지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초간정에 올랐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 (1582년 7월 15일 일기) 중 -

초간정은 권문해에게 어떤 의미일까….
2014년 봄, 432년 전 권문해가 정성을 다해 지은 초간정을 찾았습니다. 초간정으로 가는 길은 포근하고 맑았습니다. 부드럽게 이어진 산길을 따라 활짝 핀 벚꽃이 긴 터널이 되어 맞아 주었습니다. 그 벚꽃 터널을 지나 마주한 초간정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자연에 몸을 의탁하여 세상의 시름을 잊기도 하고, 세상에 맞설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하나의 이상 세계로 인식하고 자연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는 수양과 성찰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연을 가득 품은 누정을 짓고 그곳을 아끼고 가꾸듯, 자신을 닦고 가꾸었습니다.
왜 그토록 권문해가 초간정을 아끼고 가꾸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섬세하고 단아하게 품고 있는 초간정을 보며, 권문해도 분명 자상하고 섬세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을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 초간정

  • 초간정

초간정(草澗亭)
위치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초간정은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 공주 목사에서 파직된 이후 고향 예천에 돌아와 세운 정자이다.
권문해 본관 예천. 자 호원(灝元). 호 초간(草磵).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되었다. 권문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을 저술하였다.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612년에 고쳐 지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려 1642년에 후손 권봉의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지난 1985년 경북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스토리1 참고스토리2 참고스토리3

송암정(松岩亭) “ 송림 사이로 비추는 달빛에 취하다 ”

1622년 3월 9일, 오천에 살던 김령은 큰아들 요형을 데리고 처가가 있는 봉화로 길을 나섭니다. 봉화로 가는 길, 길가의 봄 경치가 아름다웠습니다. 산에 펼쳐진 꽃은 꽃망울을 터트리려 하고, 혹 피어난 것도 있었고, 푸르고도 고운 풀 향기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봉화에 도착할 때쯤 처남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처남들과 간단하게 회포를 풀고 잠이 들었습니다.
봉화에 김령이 왔다는 소식에 인근 사는 친구들이 하나 둘 만남을 청하며 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3월 11일 권상원과 권상충 형제가 제일 먼저 김령을 청암정(靑巖亭)으로 초대했습니다. 청암정은 권씨 형제의 증조부인 권벌이 지은 누정으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지어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자로, 반갑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만 초대하는 장소였습니다. 김령은 청암정을 에워싸고 있는 연못을 지나 누정에 올라 권씨 형제의 술을 받았습니다.

  • 송암정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세워진 청암정

  • 송암정

저녁때가 되자 권씨 형제의 사촌들과 김령의 처남들이 모두 모여 송암정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령은 아들 요형을 데리고 송암정으로 갔습니다. 둘째 처남이 맛 좋은 술을 내어오자 밤이 깊도록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다음날에는 풍산에 갔던 친구 효중까지 합류하고, 권씨 형제의 인근 지인들까지 모두 송암정으로 모여들었습니다. 11일에 시작된 송암정의 술자리는 사흘째가 되는 14일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두 크게 취하여 봉두난발을 하고, 혹은 구역질을 하다가 또 얼마 있다가 술상을 들여 술잔을 돌렸습니다. 14일 밤이 되자 김령은 더는 버티기 어려워 처가에 가서 쉬려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김령은 친구와 처남들의 눈총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누정을 나섰는데, 누정을 감싸고 있는 송림 사이로 환하게 비추는 봄날의 달빛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맙니다. 달빛에 취한 김령은 송암정 돌계단에 걸터앉아 달빛을 안주 삼아 또다시 술잔을 기울입니다.

1622년 3월 14일 맑음
또 술상을 들여왔다.
효중 및 주인 형제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나도 권함에 못 이겨 큰 술잔에 억지로 마셨더니 견딜 수 없었다. 밤이 되어서 내가 일어나 나오려니 봄날의 달빛이 아주 좋았다. 또 문밖의 계단 위에서 술을 마셨는데...
- 김령의 <계암일기> (1622년 3월 14일 일기) 중 -

  • 송암정

    송림 사이에 자리한 송암정

  • 송암정

1622년 봄날, 김령이 송암정 돌계단에 앉아 느꼈던 달빛은 어땠을까?

2014년 7월의 여름날, 송암정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김령이 살았던 오천에서 자동차로 출발하여 약 1시간쯤 봉화로 달렸습니다. 도착한 곳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로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 잘 알려진 ‘닭실마을’입니다. 마을입구에서 20분쯤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송암정’이 가까워졌다는 듯 넓은 들에 소나무 묘목이 가득했습니다. 소나무 묘목들 사이로 송암정의 기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 십 명의 젊은 선비들이 모여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 불을 밝혔던 송암정. 그러나 세월은 송암정을 기억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아주 오래 버려져 있었던 듯 초라한 모습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왔습니다. 잡초에 가려진 송암정 돌계단에 잠시 앉아 김령이 반했던 송림 사이의 달빛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송암정은 기억하고 있겠지요, 382년 전 이곳에 앉았던 김령과 그날의 달빛을….

  • 송암정

  • 송암정

송암정(松岩亭)
위치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554
송암정은 권동미(權東美, 1525-1585)가 지은 정자이다. 권동미는 조선 중기 문신?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호는 석정(石亭)이다. 어려서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자라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시 진사 3등 32위로 합격한 후부터 용궁현감(龍宮縣監)을 비롯하여 여러 곳의 현감을 지냈으며, 특히 초계군수(草溪郡守) 재임 때는 은혜로운 정치로 이름을 알렸다. 타고난 성품이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행실은 굳세고 정의로웠던 인물이었다.
송암정은 1540년 권동미가 학문적 수양과 심신을 달래기 위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다. 권동미는 송암정을 지으면 ‘송암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신탄강 위에 나의 정자를 세우니
소박한 가운데도 즐거움은 넉넉해라.
오졸한 이 몸이 세상 버림받았으니
나의 생활은 지금부터 나무하고 물고기 잡기에나 붙여보리...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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