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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10월) - “선비와 책”

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센터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10월호에서는 가을을 맞아 ‘선비의 책, 그리고 독서’를 주제로 책과 얽힌 선비들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조선 시대 책은 학문적 욕구와 삶에 대한 이치를 찾던 선비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책이 귀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은 책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어렵게 구해 온 책에 비단을 바르고 소중히 간직하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구하지 못한 선비는 여기저기 책 동냥을 하고, 또 어떤 선비는 너무 오래 앉아 책을 읽어 요통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넘쳐나면서 천대받는 책의 위상을 선비의 책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1623년 3월 5일 경상북도 종사관(從事官)으로 근무하던 김자중(金子中)의 아들 곡(?)은 예안현 김령의 집을 찾는다. 아버지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러나 한식제와 또 다른 제사가 겹쳐 김령이 출타 중이었기에 김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김곡은 인근에 숙소를 마련하고 김령의 귀가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김령은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이었지만 멀리서 찾아와 종일 자신을 기다린 손님에게 미안해진 김령은 김곡을 집으로 불렀다. 김곡은 김령에게 정중히 예를 다해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편지는《진서(晉書)》와《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령은 130여권의《진서》는 본래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치통감》은 가지고 있었으나 구하기 어려운 귀한 책인 데다가 비단을 바른지가 오래되어 선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결국, 김령은 멀리 영양에서부터 책을 빌리러 온 김곡에게 미안했지만, 책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몇 잔의 술을 권하며 미안함을 대신했다. 김곡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책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 진서(晉書) : 진서는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엮은 진(晉)왕조의 정사(正史)로, 644년 편찬되었으며 130권이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 자치통감은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B.C. 403년부터 5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사마광과 자치통감 사마광과 <자치통감>

관련스토리 김령 <계암일록>, 1623-03-05 서책을 빌리기 위해 아버지의 편지를 안고 찾아오다.

“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

1616년 8월 24일 경상북도 예안의 김택룡의 서재에 비단을 곱게 입혀 장황(裝潢)을 마친 책이 도착했다. 지난 5월 김택룡은 당나라 시대에 인쇄된 《통감((通鑑))》, 《송감(宋鑑)》, 《성리대전》등 40여 책을 도산면에 사는 이운에게 보내어 장황을 맡겼다. 책에 비단을 바르고 책을 다시 단단하게 묶어내는 선장(線裝)을 하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김택룡은 귀한 보물이라도 되찾은 것처럼 행복한 마음에 장황을 맡은 이운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책을 꾸미고 단장하는 그의 기술을 높이 샀다. 김택룡이 비단보다도 더 중히 여겼던 책은 당시 조선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중국의 역사서와 철학서로 1609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한덕원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귀한 책인 만큼 아끼고 아껴가며 읽었지만 책은 어느새 낡고 해져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는데, 드디어 귀한 보물이 원래 모습을 찾아 다시 서가에 꽂히게 된 것이다.

  • 통감(通鑑) : 기에서 『통감』은『소미가숙통감절요(小微家塾通鑑節要)』를 가리키는 것으로『소미가숙통감절요』는 중국 송(宋)나라 때 학자 강지(江摯)라는 사람이 사마광(司馬光)이 지은『자치통감(自治通鑑)을 간추려 엮은 역사서(歷史書)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총 294권으로 그 분량이 너무 많아 쉽게 열람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강지가 그 대강의 요점을 추려서 정리한 책이다. 송(宋)의 휘종(徽宗)이 강지에게 소미(少微) 선생이라고 호를 내려 주었으므로 이렇게 지칭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통감』이라는 이름으로 초학(初學) 교재로 널리 쓰였다.
  • 송감(宋鑑) : 편년체로 된 중국 송나라의 역사책이다.
  • 성리대전(性理大全) : 중국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 14년(1415)에 호광(胡廣) 등이 황제의 명에 따라 70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주돈이·장횡거·주희 등 여러 학자의 성리설(性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모아 수록하였다.

책거리(冊巨里), 이응록(李膺祿), 19세기, 종이에 채색, 경산시립박물관 소장 사마광과 <자치통감>

관련스토리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2-19 ~ 1612-02-22 중국 가시는 길에 중국책 좀 사다주십시오! - 중국가는 사신에게 부탁한 책이 수년을...

“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

대구 달성에 사는 젊은 선비 서찬규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삶의 이치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더욱이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젊은 선비 서찬규에게 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러나 서책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또한, 늘 청빈하고 청렴한 삶을 추구했던 서찬규의 삶에서 서책을 살 만한 넉넉함도 없었다. 그럼에도 서찬규는 서책 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서책은 빌려서 여름 장마와 더위에도, 겨울추위와 바람에도 며칠 밤을 베껴 쓰며 공부하였다. 1845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에는 《주자이동조변》을 등사하고, 1847에는 사보(詞譜)를 베껴쓰고, 1851년에는 《성학십도》와 《격몽요결》을 등사하고, 이듬해에는 《노주잡지》를 베껴 쓴다. 이십 대의 젊은 선비는 중요한 책은 그냥 읽지 않고 꼭 베껴 쓰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러한 독서법은 그의 스승 매산 홍직필을 만나 더 공고해졌다.

근사록과 격몽요결 <근사록>과 <격몽요결>

1850년 그의 나이 26살에 스승을 찾아 서울 노량진에 사는 매산 홍직필을 찾는다. 홍직필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은 학자로 당시 나라의 예론(禮論)을 자문했던 최고의 석학이었다. 서찬규는 홍직필을 스승으로 모시며 성현의 가르침을 궁구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어록(語錄)》으로 남기고, 스승이 권하는 책은 빠짐없이 빌려서 베껴 쓰고 읽고, 또 읽었다. 하루는 스승 매산이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을 읽어라. 《근사록》은 송(宋)나라 때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우리나라의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 조헌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이 말에 서찬규는 바로 격몽요결을 빌려 베껴 쓰기 시작한다. 젊은 선비는 그렇게 선인의 가르침을 몸으로 익혔다.

성학십도 책판과 인출본 <성학십도> 책판과 인출본

  • 근사록(近思錄) : 송나라의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의 공편(共編). 주무숙(周茂叔)·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 등의 저서와 어록(語錄)에서 뽑아 도학(道學)의 요지를 밝힌 책이다.
  • 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책이다.
  • 노주잡지(老洲雜識)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오희상(吳熙常)의 문집으로 「잡지(雜識)」는 여러가지 학문적인 관심과 역사적 인물 등에 대한 논평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 성학십도(聖學十圖) : 이황이 경연에서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학과 심법의 대강을 설명하기위해 여러 도설의 도식과 자신의 의견을 적은 강의자료이다.

관련스토리 서찬규 <임재일기>, 1845-03-26 ~ 1859-01-01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

충청북도 옥천에 살던 김교준은 몇 년째 작고 낮은 책상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책만 보았다. 그는 책을 볼 수 있음에 행복해하며 독서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스물셋이 되던 해에 그에게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허리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그까짓 통증 따위로 독서를 멈출 수 없었기에 김교준은 몸을 뒤로 기댈 수 있는 의자 안석을 마련한다. 그러나 요통은 더욱 악화되고 척추를 세우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김교준은 요통보다 더는 책을 볼 수 없음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형 황직현(黃直顯)이 찾아와 지리산 박달나무에 상처를 내어 거기서 나오는 물 곡우(穀雨)가 요통과 정강이뼈가 아프고 저린 골습에 효험이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요통이 나아 책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가서 곡우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 길을 떠나기가 쉽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 무렵 세심정(洗心亭) 족손(族孫) 김만식(金萬植)이 옥천에서 적막하게 지내는 김교준을 찾아왔다. 김만식은 김교준 보다 한 살 많지만,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몇 달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었다. 사실, 김만식도 요통과 정강이뼈가 아프고 저린 골습으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둘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김교준은 지리산 곡우의 효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함께 길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이 같이 좋은 기회에 같이 가서 마시고 골습도 치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게다가 지리산은 온 세상의 소인(騷人, 시인)과 묵객(墨客, 글씨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등지지 않던 곳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게나.” 라고 하였다.

1906년 3월 30일 김교준과 김만식은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초상(肖像), 19세기 비단에 채색, 일암관 소장 초상(肖像), 19세기 비단에 채색, 일암관 소장

관련스토리 김교준 <두류산기행록>, 1906-03-30 박달나무 물 마시러 봄비 온 뒤 지리산에 가자. -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1623년 3월 5일 경상북도 종사관(從事官)으로 근무하던 김자중(金子中)의 아들 곡(?)은 예안현 김령의 집을 찾는다. 아버지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러나 한식제와 또 다른 제사가 겹쳐 김령이 출타 중이었기에 김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1616년 8월 24일 경상북도 예안의 김택룡의 서재에 비단을 곱게 입혀 장황(裝潢)을 마친 책이 도착했다. 지난 5월 김택룡은 당나라 시대에 인쇄된 《통감(通鑑)》, 《송감(宋鑑)》, 《성리대전(性理大全)》등 40여 책을 도산면에 사는 이운에게 보내어 장황을 맡겼다.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대구 달성에 사는 젊은 선비 서찬규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삶의 이치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더욱이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충청북도 옥천에 살던 김교준은 몇 년째 작고 낮은 책상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책만 보았다. 그는 책을 볼 수 있음에 행복해하며 독서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스물셋이 되던 해에 그에게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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