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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 죄수의 딜레마 -

삽화 정용연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도기찰(都譏察) 김한평(金漢平)과 사후(伺侯) 김동학(金東鶴)과 더불어 지대면(知代面)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관가(官家)에 들어오던 중, 행차가 장수사(長水寺) 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적 10여명이 불쑥 나타나 김한평과 김동학을 난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태건과 구운학 두 사람은 몸을 피해 달아나 사건을 고할 수 있었으나, 아마도 그사이에 변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안음현감은 매우 놀라 위의 변고(變故)를 고한 김태건과 구운학 등을 우선 잡아 가둔 후에 사실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함께 죽은 데다, 죽은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군관인 도기찰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으며, 더욱이 도적 10여 명이 출몰하였다 하니 큰 사건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적은 수상하기가 이를 데 없다. 첫째로는 두 사람은 면의 기찰이고 김한평은 곧 한 읍의 도기찰로서 그들의 수장(首長)이 되는데 어찌 감히 그 죽음을 서서 보고 다만 몸을 피할 계책을 하겠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장소를 보니 큰 절에 가깝고 도적이 몸을 숨길 숲이 없는데 대낮에 도적의 변고가 있었다는 설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두 사람의 피살은 오히려 김태건과 구운학의 범죄가 아닌가 의심이 가게 되었다. 이에 행흉(行凶) 절차(節次)를 이실직고(以實直告)하라 하고 문초하자 두 사람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다른 말을 하게 된다. 김태건(金太巾)에 의하면 사후 김동학이 갑자기 광증을 내어 도기찰 김한평과 싸우다가 죽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면서 구운학이 비록 도적을 만난 것은 아니나 도적에 의하여 살해된 것처럼 이야기해야 함께 살인을 했다는 의심을 면할 수 있다고 하는 까닭에 구운학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서 이렇게 무고(誣告)를 하였다고 실토한다.

반면, 구운학(具云學)은 도기찰 김한평과 사후 김동학의 싸움을 말릴 방도를 찾느라 수망촌에 갔으나 남자가 하나도 없어서 뜻을 못 이루었고 장수사에 가서 승군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도기찰이 목에 칼을 맞고 죽어 있었으며 사후는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김태건(金太巾)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적을 만난 것은 아니나 반드시 도기찰이 도적을 만나죽은 것처럼 관가에 고한 연후에야 너와 내가 타살에 함께 했다는 의심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음을 고하며 도기찰 김한평의 죽음은 곧 분명히 자신이 군인을 얻으러 수망촌에 간 사이이니 김태건의 소행이며 동학의 죽음 또한 김태건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이 처음에 말을 짜고 왔을 때와는 달리 의심이 가는 정황을 갖고 문초하자 도적이 습격하였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즉시 인정하며, 상대방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입장으로 돌변한다.


1751년 6월 19일, 변사체로 발견된 도기찰 김한평과 사후 김동학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김한평은 칼에 맞아 죽고 김동학은 맞아서 죽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검시 결과 김한평(金漢平)과 김동학(金東鶴) 두 사람 모두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비녀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흰밥 한 덩어리를 입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독살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안음현감이 고현면 기찰 김태건과 북리면 기찰 구운학을 다시 추궁하였다. 김태건은 자신이 구운학과 더불어 도기찰을 해칠 것은 모의한 것을 인정하였으나, 도기찰의 목 부분에 난 칼자국 상처는 진실로 구운학의 소행이며, 구운학이 수망령으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을 데려와 힘을 합해 싸움을 말리고자 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구운학은 완강히 부정한다. 자신의 말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김해창은 사후 김동학에게 1냥(兩) 5전(錢)의 뇌물을 준 후에 도망하여 피했는데, 고현면 기찰인 김태건이 사후가 소지한 돈을 빼앗고자 먼저 도기찰을 죽인 후에 사후의 돈을 빼앗고 사후를 죽인 상황을 자신이 목도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뇌물을 줬던 김해창을 잡아 문초하니 도기찰에게 체포되어 북리면 도장(都將)에게 인계되었으나 자신의 원통한 사연으로 인하여 석방되어 피하게 되었는데, 이성(異姓) 칠촌(七寸) 숙부인 박상봉(朴尙奉)이 김태건과 구운학 두 기찰의 공갈에 위협을 받아 도기찰의 사후에게 뇌물 1냥 5전을 주었다고 증언한다. 김해창의 칠촌 숙부인 박상봉(朴尙奉) 역시 김해창이 관가의 감시에 들어가 도기찰에게 체포되었다가 갑자기 석방되자 그대로 도망하여 피한 뒤에 김태건과 구운학이 자신을 위협하고 결박하여 관가에 고발하고자 하기에 뇌물 1냥 5전을 도기찰의 사후에게 주었다고 증언한다.

이어서 용추암(龍湫菴) 방두승(房頭僧) 임명(任明) 31세와 장수사(長水寺) 화상승(和尙僧) 요징(妙澄) 53세을 불러 문초하니 구운학의 공초에 나와 있는 내용이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구운학의 말에 의하면 김태건과 함께 용추암(龍湫菴) 및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군사를 발해달라고 말하니 장수사 중의 말에 “어떤 한 미친 듯도 하고 모자라는 듯도 한 사람이 조금 전에 절문을 지나갔다.”고 하고 제가 또한 한 차례 구타당하여 머리를 싸맨 중을 보았는데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지나간 한 미친 녀석에게 이렇게 구타를 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구운학은 감옥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떻게 하여 죽게 된 것일까? 죄인의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끝에 죽게 된 것은 아닐까?


1751년 10월 12일, 안음현감은 김한평과 김동학의 시신 초검의 결과를 정리하여 시장(屍帳)을 첨부하여 복검관(覆檢官)은 인근에 있는 함양(咸陽) 부사(府使)를 청한다고 하는 첩정을 올렸다. 이후 복검관 함양부사 김주익(金柱翼)은 안음현감의 공문(公文)에 의거하여 복검의 결과가 초검과 같음을 알리면서 김태건과 구운학의 변고는 금전을 약탈하는 일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고 달리 원수(怨讐)로 인할 것이 없으니 분명히 인정(人情)과 사리(事理)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들의 전후 진술 중에 또한 앞장서 모의하고 먼저 범행한 일을 서로 미루기를 반복하니 엄히 조사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뒤따라 초검관 안음현감 심전(沈錤)의 첩정이 올라왔는데, 죄인 구운학이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끝까지 죄가 없음을 주장하던 구운학은 병으로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김태건으로 극형인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김태건의 죄인지라 고복관을 세워 앞서 취조할 때 작성한 옥안(獄案)을 참고하여 다시 취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혹여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고복관(考覆官) 거창 부사 전오석(全五錫)과 단성 현감 남도일(南圖逸)은 죄인 김태건의 흉악한 범죄 절차를 전날 동추(同推)할 때 이미 낱낱이 밝혀냈고 지금 고복(考覆)하였는데 그 진술이 전과 다름이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재호 경상감사는 김태건을 친히 문초한 후에 죄안(罪案)을 종결하고 초사를 취하여 아뢰오니 위의 김태건 죄상을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법조문에 비추어 죄목을 결정하기를 청하며 장계를 올렸다.





작가 소개

정용연
정용연
작가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이 있고 현재는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출간 준비중
“기질이 억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안음현에서 살인사건이 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8 ~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도기찰(都譏察) 김한평(金漢平)과 사후(伺侯) 김동학(金東鶴)과 더불어 지대면(知代面)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관가(官家)에 들어오던 중, 행차가 장수사(長水寺) 뒤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도적 10여명이 불쑥 나타나 도기찰과 사후를 난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태건과 구운학 두 사람은 몸을 피해 달아나 사건을 고할 수 있었으나, 아마도 그 사이에 도기찰 등은 분명히 운명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안음현감은 매우 놀라 위의 변고(變故)를 고한 김태건과 구운학 등을 우선 잡아가둔 후에 사실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함께 죽은 데다, 죽은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군관인 도기찰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으며, 더욱이 도적 10여 명이 출몰하였다 하니 큰 사건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은비녀와 흰밥을 이용해 시험하니 독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검시결과 김한평(金漢平)과 김동학(金東鶴) 두 사람 모두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비녀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흰밥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독살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주무원록에서 밝힌 격식에 따라 시장에 검시 내용을 기록하다”

『신주무원록』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처음에 덮었던 포대 2장을 제거하니 다음으로 베적삼 하나, 다음으로 무명 바지 하나 등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발을 서쪽으로 하고 전면(前面) 이 되도록 눕히고는 오작(件作) 양인(良人) 하순걸(河順乞)로 하여금 차례차례 벗기고 돌려 눕혀 법물(法物)로 몸을 씻기게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시하였다.
나이는 35, 36세가량 남자. 신장이 5척이고 머리털 길이가 2척이고 두 눈이 반쯤 열렸고 입이 반쯤 열렸고 혀가 이[齒]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온몸에 색깔이 엷은 황색이다. 두 손은 조금 쥐었고 두 다리는 곧게 뻗었고 음경[莖物]과 음낭[腎囊]은 아래로 늘어졌다.
전면[仰面]의 상처는, 머리 부분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는데 길이가 1촌 1푼이고 넓이가 3푼이고 깊이가 2푼이고 혈액이 흐르고 부드럽다. 이마(顖門) 두 곳에 피부 찰과상이 있는데 색깔이 자줏빛이고 모양이 작은 팥알 조각 같고 매우 단단하다. 눈썹[眉叢] 왼쪽에 피부 찰과상은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눈꺼풀[眼胞]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2푼 5리이고 넓이가 7리이고,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왼쪽 눈동자[眼睛]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3푼이고 넓이가 2푼이고 색깔이 자줏빛 이고 매우 단단하다. 위아래 입술[脣]은 조금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왼쪽 아랫입술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길이가 6푼이고 넓이가 1푼이고 색깔이 조금 검붉고 매우 단단하다. 아랫입술 아래는 많이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결분 뼈[缺盆骨]에 피부 찰과상 한 곳이 있는데 직경이 4푼이고 색깔이 엷은 검은색이고 매우 단단하다.

“살인사건이 나면 관할 수령과 인근 수령이 직접 시신의 검안을 실시한다”

『검요』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10 ~

1751년 7월 10일, 성주목(星州牧)에서 죽은 유기장(柳器匠) 조수업(趙守業)의 시신(屍身)을 관할 수령 성주목사(星州牧便) 신준(申晙)이 초검(初檢)을 실시하였으며, 인근 수령인 고령현감(高靈縣單) 정창유(鄭昌兪)가 전례대로 복검(勸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전임 경상감사(前慶尙監司) 민백상(閔百祥)이 이임(離任)하여 올라가는 길에 보고하였으며, 또 신임감사 조재호가 부임한 초에 등본(謄本)으로 하여 보고하고 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1 ~ 1616-07-14

1616년 7월 11일, 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말도둑 사건’ 처리 문제로 다시 관아에 들어가 현감을 만났다. 그리고 잡히는 과정에서 막복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었던 춘금이가 밤사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현감은 춘금의 어미와 친족들을 모두 불러 이 사실을 전달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숙은 일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하고 현감을 설득하려하였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이 날은 그냥 돌아와 아버지인 택룡에게 걱정만 늘어놓았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은 수심에 찬 채로 다시 현감을 만나러 갔다. 현감은 더 강경하게 나왔다. 활을 쏜 막복을 살인자라고 감옥에 가두고, 이웃의 영천 군수에게 춘금의 검시까지 요청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말도둑 사건은 관심이 없고,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 법적 절차대로 해결하려 했다. 택룡의 큰 아들이 수 차례 설득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현감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 날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택룡과 그의 큰 아들은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출처 : 세계유교문화재단)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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