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이달의 일기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삽화 정용연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노비만 보내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번 이날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1617년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노비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1617년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 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김택룡은 지난 2월 26일에 왔을 때 생각해 둔 곳이 있었으므로, 이자정에게 함께 오르기를 부탁하였다. 함께 살펴보니 자못 형세가 있었는데, 태좌진향(兌坐震向 : 서쪽을 등지고 동쪽으로 향함) 언덕을 찾아 보여 주었더니 이자정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김택룡은 곧 쇠를 놓아 표지를 하고 이어서 산수의 방향을 두루 살펴보았다.

우측 백호(白虎)는 높고 가파르고 돌이 있는 듯했지만, 모두 사창(四倉)의 위치에 있어 이자정이 해는 없다고 하였다. 또 동산 북쪽으로 내려오는 혈 자리가 평평하여 역시 안장할 수 있었으므로 이자정이 매우 칭찬하였다. 김택룡은 그곳에도 역시 쇠를 놓고 하산하였다. 오후에 이자정, 권전룡, 아들 김숙이 가동의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김적의 묏자리를 잡았다. 저녁이 되자 김택룡은 산에 올라간 여러 사람이 함께 한곡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적이를 묻을 산을 이제 선택하였구나. 가동의 사현이 좋은 땅으로 근처에 없는 드물고 귀한 산이라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 밤이 되자 김택룡은 사랑채에서 숙과 함께 잤다.



산의 기운이 모여 있고, 산수의 방향이 훌륭한 명당 -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 출전 :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조성당일기는 김택룡이 쓴 일기로서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1612년(김택룡 66세), 제2권은 1616년(김택룡 70세), 그리고 제3권은 1617년(김택룡 71세)에 썼다.
  • 저자 :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조선중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아버지는 양진(楊震)이며 안동(安東)사람이다. 조목(趙穆)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5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이 되었다. 임진란에는 군무에 진력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전쟁 후에는 경독관(耕督官)이 되어 전후의 농경을 장려하여 백성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이후 관직 생활을 계속하다가 광해군 때 낙향하여 향촌교화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선 시대 풍수 - 묏자리 선택


망자가 묻힐 산소를 정하는 것은 조선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무덤 자리를 어디에 결정하느냐에 따라 집안과 후손들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관(地官)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지관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라 묏자리나 집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지사(地師) 또는 풍수라고도 하였다. 김택룡의 집과 죽은 아들 김적의 집에서는 김적의 묏자리를 고르느라 각각 지관(地官)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신중하게 살펴본다. 여기저기 점찍어둔 자리들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 잘 성사되지 않자, 최종적으로 김택룡이 집안의 선조 무덤이 있는 가동으로 가서 몇 군데를 살핀 후 괜찮은 곳을 점찍어 쇠를 놓아 표시했었다.


태좌진향(兌坐震向) - 서쪽을 등지고 동쪽으로 향함


위 장면은 김택룡이 자신이 점찍어둔 곳을 지관(地官) 이자정에게 보여주면서 그의 의견을 듣고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정이 무덤 위치에 대해 매우 칭찬하였기 때문에 김택룡은 흡족해하면서 묏자리를 정하였다. 그러나 죽은 아들의 무덤 자리를 정하는 것은 다음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들이 살았던 지역에도 혹시 합당한 지역이 있을까 하여 지관 이자정을 비롯한 여러 명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살펴볼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한 사람 무덤 자리 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경 쓰고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작가의 한 컷




佩鐵(패철) – 무덤 자리를 정할 때 風水家(풍수가)나 地官(지관)이 썼던 나침반





작가 소개

삽화 : 정용연
정용연
작가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이 있고 현재는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출간 준비중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1616년 9월 25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돌아와 소지동(蘇池洞)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말하길, 오늘 박가가 감사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송사가 걸렸던 산에서 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씨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금지시키고 중지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택룡이 이미 박가가 산송 다툼이 일어난 바로 그 곳에 묘를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다시 묘자리를 잡았으니, 두 집안 모두 장례를 허용하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수 등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정소(呈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고자 해서였다. 생질 정득만 김택룡을 찾아 왔다.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01 ~ 1617-03-03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 강아지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말로만 강아지에게 해 주면서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 번 이날 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강아지와 말이 바로 들어가 이자정에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강아지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미상, 임천서당중건일기,
1806-05-03 ~ 1806-05-04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1739년 8월 5일, 권상일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지역 서원의 인사 문제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지역 인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을 찾아가 일일이 뵙는 것도 노령의 권상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상일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어서 권상일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가 아뢰고, 또한 배자(牌旨)를 내어 소송의 상대편이었던 황야(黃埜)라는 자를 잡아오자마자 일제히 나아가 심문하여 보름날 전에 무덤을 파서 옮기겠다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황야는 곧 관청에 하옥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문중 사람들의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황야라는 자가 문중의 묘소에 몰래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에서 투장한 묘를 당장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중에서 직접 황야를 잡아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황야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종이 무덤을 파간 다음에 땅을 고르고 원 상태로 되돌린 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야가 또 다시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