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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삽화 정용연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두부, 양반들의 연포회


조선 후기에는 두붓국인 연포탕을 즐기기 위한 연포회가 양반들 사이에 유행했다. 닭국에 두부를 익혀 먹는 유생들의 연포회(軟泡會)가 사찰에서 행해진 기록은 별식으로서 두부의 존재를 말해준다. 연포탕은 두부장국이다. 맑은 장국에 두부와 무, 쇠고기, 북어, 다시마 등을 넣고 끓인 두붓국이 연포탕이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하자면 예전 초상집에 문상을 가면 요즘처럼 육개장을 내오는 대신에 두부장국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연포탕이다. 보통 두부장국인 연포탕에는 쇠고기를 곁들여 끓이는데 옛날 바닷가 해안 마을에서는 쇠고기가 없으니까 쉽게 잡을 수 있는 낙지를 넣고 끓여서 낙지 연포탕이라고 했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면서 두부 값은 싸지고 낙지 값은 비싸졌으니 두부는 사라지고 낙지만 남아 낙지를 끓인 낙지탕이 연포탕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연포탕은 한자로 ‘연포(軟泡)로 끓인 국(湯)’이라는 뜻인데 연포가 바로 두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계암일록(溪巖日錄) 』은 김령(金坽, 1577~1641)이 그의 나이 27세부터인 1603년부터 그가 사망한 해인 1641년까지 38년간 쓴 일기이다. 내용은 ‘봉제사 접빈객’ 등 일상사가 대부분이며 광해군 치하 대북 정권의 전횡과 훈척세력에 의해 추대된 인조반정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도 보인다. 또 지방관의 가렴으로 인한 민생의 심각성, 향시의 폐단 등에 대한 기록 등, 초야에 은거하면서도 중앙과 지방의 전반적인 일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작가 소개

삽화 : 정용연
정용연
작가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이 있고 현재는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출간 준비중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09-28 ~ 1619-10-04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흰죽부터 개장국까지, 끼니도 되고 보신도 하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12 ~ 1626-11-06

1625년 1월 12일, 신유. 권별의 안색은 완전히 희게 되었고, 소변이 붉던 것도 맑아졌다. 조금씩 밥맛을 알게 되어 녹두죽과 백원미(흰쌀 죽)를 4~5차례 마셨다. 밤에도 3~4차례 마셨다. 주부의 기생이 각종 진미를 연이어 보내주셨다. 야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은 지난밤과 다름이 없었다. 달보가 병문안을 왔다.
1625년 1월 14일, 계해. 증세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은 민물고기로, 혹은 새우젓갈로 반찬을 하여 연이어서 미음을 먹었는데, 다 뜨거운 물로 타서 넘겼다.
1625년 1월 26일, 을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꼈다. 청어 1마리를 구워서 먹었는데 해롭지 않았다. 밤에는 기장쌀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숟가락 넘겼다.
1625년 2월 4일, 계미.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식후에 비를 잠시 뿌렸다. 유량의 집은 방이 비좁고 창문이 없는 데다가 또한 날씨마저도 점차 따뜻해져 권별은 기운이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오늘 사랑으로 옮겨 들어갔더니 기운이 갑자기 깨어나고 밝아졌다. 이봉이 민물고기 여러 마리를 들여보냈다. 회를 쳐서 먹었는데, 또한 체하지 않았다.
1625년 2월 9일, 무자.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오후에 빛이 났다. 서비가 7일부터 앓아누웠는데, 증세가 수상하니 염려스러웠다. 안채 변소를 수리하였다. 주부 댁에서 민어 반 마리, 생강 6각을 보냈다.

“새해 첫날 노인이 된 친구들끼리 모이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1-01 ~ 1745-01-03

1745년 1월 1일, 을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차리고 사당에 나아가 차례를 지냈다. 첫날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둘째 날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며, 잠깐 바람이 불기는 했다. 계부를 모시고 추동에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새해 셋째 날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연이어 들렀다. 을축년은 권상일에게 67세가 되는 해이다. 이미 권상일도 환갑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도 두루 거친 그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도 느껴졌다.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였다.
1월 3일 밤에 여러 노인들과 함께 이순(而順)의 집에서 입춘(立春)의 밤을 보냈다. 후경(厚卿)도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 권상일은 오히려 젊은 축이었다. 계삼(季三) 아저씨는 73세, 문언(文彦)은 71세, 계부는 69세, 권상일은 67세, 이순은 63세였다. 그의 동네에 사는 노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노인이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김령, 계암일록
1603-09-08 ~ 1619-10-27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 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온 집안이 병으로 신음하여 개를 잡아 보양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4 ~

1912년 11월 14일, 김대락의 집안은 병마와 싸우느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사촌 제수씨는 이전부터 지병이 있어 상당 기간을 앓고 있었고, 며느리는 최근 감기가 들어 며칠째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들 형식이는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었고, 손자 창로는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바짝 여위였다. 그나마 창로는 누워서 앓는 병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한창 나이에 먹어야 제대로 자랄 터인데 음식을 마다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과 싸우고 있지만, 집에는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김대락은 크게 마음을 먹고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기로 하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을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을 나누어 먹던 녀석이었다. 짐승의 목숨을 버려 사람의 식욕을 돋우려 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는 평소 잘 짖지도 않고 사람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잡아먹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장자가 말한 닭과 산 나무의 교훈은 제법 그럴 듯한 가르침이었다. 개를 잡아 국을 끓이니, 오랜만에 식구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마다하던 창로도 오늘만큼은 제법 요기를 한 모양이었다.
한 끼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가혹한 현실이 돌아왔다. 상점 주인이 와서 외상값을 독촉하였다. 몇 번이나 기일을 미루어 놓았는데, 매번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동짓날이었는데, 팥죽 끓일 재료도 없어 그냥 지나쳤다. 명색이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절기도 그냥 지나치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지라고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에게 인사도 못하였으니, 팥죽 재료가 있다한들 입맛이나 다실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탄식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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