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노상추는 고민 끝에 문과 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무과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조부인 노계정(盧啓楨)도 무과로 관직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따로 마음에 걸릴만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짧지도 않았다. 이미 2년 전부터 무과시험을 볼까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노상추의 생각을 지지해 주었다. 오랜 고민 끝에 노상추는 완전히 마음을 정하고, 활터로 나아가 처음부터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노상추가 살고 있던 선산에는 고남(古南)에 활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노상추는 고남의 활터에 가서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했다. 틈틈이 『징비록(懲毖錄)』도 챙겨 읽으며 임진왜란 때 있었던 군사적 사건 등을 익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날이 가물어서 집안 농사가 걱정되는 마음을 뒤로하고 노상추는 5월 내내 활을 쏘았고, 5월 말에는 드디어 각궁(角弓)도 새로 샀다. 하지만 받아본 활에는 탈이 많아서 당장 각궁을 가지고 활쏘기를 연습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아직 각궁을 쏘기에는 실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노상추는 다시 새 목궁(木弓)을 샀다.
선산에는 신당포(新堂浦)에도 활터가 있었다. 6월 중순부터는 이곳에 가서 활을 쏘기 시작했는데, 신참은 예로부터 신참례(新參禮)를 해야 한다는 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고기 한 접시와 술 몇 병을 준비해 가서 활터의 여러 사람을 대접해야 했다. 신당포 활터 사람들은 짓궂게 신참을 뜯어먹으며 희희낙락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노상추를 챙겨주었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70-05-17 ~ 1770-07-08
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노계정
아침 일찍, 신포(新浦) 활터의 동자가 친구들의 편지를 전하러 노상추의 집에 왔다. 이에 활터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노상추는 도성에 갈 것을 결심하였는데 친구들의 편지에는 과거시험이 엿새 후인 10월 9일에 있다고 하며, 시일이 매우 급하므로 자신들 먼저 출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노상추도 이것저것 잴 겨를이 없었다. 빨리 출발한다고 해도 과연 과거시험 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상추는 학봉(鶴奉)과 함께 서울에 동행하기로 약속하고 이튿날 남자종 손돌(孫乭)을 데리고 일찌감치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100여 리를 넘게 가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고 노상추와 동행하는 활터의 친구 중에서는 다리가 아파 더는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부지런히 나아간 덕에 과거시험 하루 전인 10월 8일에 한강을 건너 도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픈 다리를 쉬게 해 줄 새도 없이 10월 9일에는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무과 시험을 치렀다. 이후 11일에는 훈련원의 활터에서 초시를 보았는데, 정유목(鄭惟穆) 이외에는 노상추와 동행한 모든 사람이 다 떨어졌다. 회시는 22일로 정해졌다가 다시 27일로 미뤄졌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노자가 떨어져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번 과거시험은 급하게 열리는 바람에 지방의 많은 거자(擧子)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노상추는 가까스로 시일에는 맞춰 왔으나, 결과는 낙방이었고 실망감에 일찌감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함께 올라온 여러 친구들이 좀 더 서울에 머물기를 권했다. 결국, 함께 길을 떠나온 학봉만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고 노상추는 정명준(鄭明俊), 박상택(朴相宅)과 함께 여사(旅舍)에서 며칠을 더 머무르기로 하였다.
지난 2월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임금의 행차를 멀리서나마 구경하고 싶어 한참을 길목에서 기다렸으나 아쉽게도 임금의 용안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국조(國朝) 선대 분묘의 지석(誌石)을 얻어 묘우(廟宇)을 건립하고 능(陵)으로 봉하는 의례가 거행될 예정이었기에 다시 임금의 행렬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노상추는 의례가 거행되는 날인 22일, 친구들과 함께 새벽같이 도성 남쪽으로 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는 위엄 있는 의식을 구경하였다. 자리가 워낙 좋았기에 용안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80세의 나이 든 임금은 서리가 내리는 추운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풍차(風遮)나 휘항(揮項)으로 귀를 가리지 않은 채였다. 그러면서도 추운 기색이 하나 없으니, 노상추는 임금의 정정함에 내심 감탄하였다. 곧이어 행렬이 움직여 서빙고로 향했고, 서빙고 나루에서 위패를 실은 대가는 누선(樓船)에 올라 강을 건넜다. 그 뒤 과천현까지 갔다가 돌아와 환궁하니, 일정이 모두 끝난 때는 어느덧 밤이었다.
용안을 볼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27일에 열리는 회시는 임금이 친람(親覽)하였기에 노상추는 시험을 볼 것도 아니면서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앞으로 새벽부터 나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시험을 마치자 임금을 태운 연이 궁궐 문밖으로 나왔다. 지난번보다 가까이에서 용안을 본 노상추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다음날 고향으로 돌아갔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71-10-03 ~ 1771-10-28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정유목, 정명준, 박상택, 영조
무과 시험을 보러 서울에 올라온 노상추는 서둘러 숙소를 정하였다. 이번 숙소는 모화관(慕華館) 근처의 동지(同知) 이재흥(李載興)의 집이었다. 함께 올라온 김덕여(金德汝)는 성균관 근처 반촌으로 가고, 정화경(鄭和卿)은 동대문 인근으로 숙소를 정하였다. 뿔뿔이 흩어져 짐을 일단 풀어놓은 뒤, 노상추 일행은 정화경의 숙소에 다시 모였다. 정화경의 숙소 주인이 지금 과거시험을 대비하여 선배[先進]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배우고 있는데, 그 강론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노상추 일행은 사흘간 『경국대전』의 법 조항에 대해 배웠다.
며칠 뒤, 무과 시험이 열렸다. 먼저 활쏘기 시험을 치러야 했다. 가장 처음으로 쏜 것은 목전(木箭)이었는데, 노상추는 동행들보다 꽤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다음으로는 육량전(六兩箭)을 쏘았다. 첫 번째 화살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다음 화살은 그럭저럭 잘 쏜 것 같았다. 조총 성적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강서 시험만 잘 보면 어느 정도 결과를 기대해볼 만했다.
강서 시험도 바로 이어 시작되었다. 사실 강서 시험은 영 불안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강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선배들이 노상추에게 식년시에는 『오자(吳子)』에서 출제된다는 이야기를 해서 『오자』를 죽어라 팠는데, 서울에 올라와서야 『오자』가 출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밤을 새워서 『삼략(三略)』을 두 번 읽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벼락치기이므로 제대로 내용을 익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과연 강서 시험에서는 『삼략』의 구절 중 ‘간사한 신하가 위에 있으면 모든 군사가 다투게 되고[軍讖曰 侫臣在上 一軍皆訟]’의 대문(大文)이 출제되었다. 노상추는 ‘거짓으로 용렬한 사람을 칭찬하며[誣述庸庸]’라는 네 글자를 제대로 뜻풀이하지 못해 결국 불통(不通)을 맞고 말았다. 노상추의 동행들도 죽을 쑨 듯했다. 결국, 아무도 합격하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를 겸비하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77-09-07 ~ 1777-09-19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이재흥, 정화경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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