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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돌아왔다


비둘기를 기르는 재미


어느 날, 개령(開寧)의 남자종 유복(有卜)이 흰 비둘기를 가져와 노상추에게 바쳤다. 깨끗한 빛깔에 동글동글한 눈이 예뻐서 노상추는 비둘기를 쓰다듬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비둘기는 다음날 훌쩍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노상추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둘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봤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비둘기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거의 포기해 가던 때쯤, 여드레 만에 비둘기가 돌아왔다.

비둘기가 집을 잘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대체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둘기에게 물어도 비둘기는 그저 구구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노상추는 오랜만에 돌아온 비둘기에게 모이와 물을 챙겨주며 귀여워하였다. 비둘기는 이후에도 집 안팎을 들락날락했지만, 반드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훌쩍 날아갔던 비둘기는 이번엔 다른 비둘기 두 마리를 대동하고 돌아왔다. 비둘기들은 사이좋게 붙어 앉아 노상추가 챙겨 놓은 모이를 함께 나눠 먹었다. 노상추는 비둘기들의 습성이 신기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 비둘기의 영특함을 자랑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도개(桃開) 박인보(朴仁甫) 아저씨가 노상추의 비둘기들을 구경하러 찾아왔다.

비둘기들의 귀여운 모습을 구경하던 박인보 아저씨는 손을 불쑥 내밀어 자주색 무늬가 있는 비둘기(紫虛頭, 자허두) 한 마리를 낚아채어 자기 소매에 넣었다. 불쌍한 비둘기는 아저씨의 소매 속에서 퍼덕거렸고, 소매는 날개가 달린 듯 불쑥불쑥 움직였다. 노상추가 만류할 새도 없이 아저씨는 비둘기 잘 받아간다며 가버렸다. 아저씨는 그 길로 초곡(草谷)의 조(趙) 찰방에게 들러 비둘기를 주었는데, 비둘기는 역시 노상추의 집이 좋았는지 엿새 만에 노상추에게 돌아왔다. 빼앗긴 비둘기가 내심 아까웠던 노상추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기특한 비둘기를 쓰다듬었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68-02-26 ~ 1768-04-04
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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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물고기잡이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01 ~

1597년 4월 1일, 낮에 후전리에 사는 별감 김린, 교생 허충, 김애일 등이 오희문을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동쪽 큰 언덕에 올라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 주인인 시중이 국수를 만들어 찾아왔다. 언덕 위 공터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국수를 먹는데, 큰 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깊은 못을 만들어 놓아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의 북쪽은 낭떠러지 절벽이 둘러쳐 있었는데, 이것이 한바퀴 빙 둘러서 반대편에 이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생긴 것이 마치 누각의 머리같이 생겼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낭떠러지라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물결도 잔잔하여 티 하나 없이 맑은데다가, 햇볕도 내려 비치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물도 맑았다. 무리지어 노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다가, 옆에 따라온 아이에게 그물을 쳐서 몰게 하였는데, 몰기가 무섭게 물고기들이 번득거리고 엎어지는 것이 볼만하였다. 간단히 그물질을 하였는데도 60여 마리나 잡아 올리고, 또 낚시대를 가지고 오게 하여 낚으니 이번에도 40여 마리가 잡혔다.

잡은 생선 중 큰 놈을 골라 뼈를 발라내어 말려 놓고, 남은 잔 생선으로 탕을 만들어 밥과 함께 먹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는 것이 몹시 유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아까 잡아 말려놓은 큰 생선이 반이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서편에 사는 강아지놈이 사람들이 부산한 틈을 타서 반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아지가 몹시도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뛰어난 경치와 흥겨운 물고기 잡이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동고동락한 개 이야기”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919년 8월 22일. 장석영은 어제 항소심에서 극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이곳 대구에서 성주까지는 하룻길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집으로 가기로 하고 하루를 묵었다. 밤에 창을 열고 지난 몇 개월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떤 짐승이 창 앞에 마주하여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쫓아도 일어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거기에 있길래 다시 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석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개는 일본인의 개인데 집을 떠나 얼마간 있다가, 댁의 아드님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짓고 음식을 마련하여 밥그릇을 받들어 감옥으로 가기 전에 이 문을 나서면 곧바로 아드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일찍이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감옥 문 앞에 이르러 아드님이 문밖에 서서 밥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 이 개도 그 곁을 지키면서 머물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밥그릇이 나와서 아드님이 돌아오면 개도 따라서 돌아왔다가 이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떠났습니다. 하루가 일상이 되어 출옥하는 날에도 여기 와서 지키며 몰아내도 가지 않는 것은, 필시 아드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장석영 역시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혹 사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일본인이 개를 팔 리도 없지만, 판다고 하여도 값을 많이 부를 것이라 만류하였다.

결국 장석영은 개를 사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아들에게 떠날 때 강아지를 쓰다듬고 따뜻하게 작별의 정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준 감정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강아지를 사서 함께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또한 강아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아들의 효성을 전해 듣게 된 장석영은 한 번 더 감동을 자아내는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골린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하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닭의 발톱에 얼굴을 다쳐 숙모의 상여도 따라가지 못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2-10-16 ~ 1922-10-19

1922년 10월 16일, 남붕은 숙모의 장례가 내일 있어서, 종일 조문객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남붕의 집에서 기르는 닭을 도둑고양이가 물어가는 일이 있었다. 남붕은 놀라 흩어진 남은 닭들을 잡아다가 닭 둥지 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닭을 살펴보려고 둥지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며 남붕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닭의 발톱이 남붕의 눈 아랫부분을 할퀸 것이다.

남붕은 상처가 바람을 맞으면 부스럼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약을 바르고 나가는 일을 삼갔다. 다음날 새벽에 영구를 마을 밖으로 전송하였는데 하필이면 바람이 거세 얼굴에 바람을 맞을까봐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숙모와 조카의 심정과 처지에 있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저물 때에, 윤초(允初) 아재의 모친 장사가 내일 있기 때문에 곡을 하러 가야 했는데, 상처 때문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다녀왔다.

10월 19일에는 숙모의 빈소에 가서 재우(再虞)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굴이 상처로 부어서 상여를 따라가지는 못 하였다.

“소를 가둔 죄로 파직당한 나무송(羅茂松)의 이야기”

김령, 계암일록, 1631-08-30 ~

1631년 8월 30일, 날씨는 종일 맑다가 흐리기를 반복하고, 늦가을 동풍이 몹시 쌀쌀하였다. 저녁 무렵 김령은 전에 예안 현감이었던 담양에 사는 나무송(羅茂松)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그가 파직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 봄 2월 무렵 김시익의 여자 종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소를 훔친 일이 있었다. 본래 흰 점을 가진 소였는데, 소를 훔친 자는 이후 일이 들킬까 염려하여 소의 흰 점을 검게 물들였다. 김시익의 또 다른 종 논복이란 놈도 소를 훔친 자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소가 새로 생긴 것을 관아에 고하고 입안(立案)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듣고 난 후 당시 예안 현감이었던 나무송은 곧 소를 데려다가 물로 씻어보도록 명령하였다. 과연 소 주인의 말대로 검은 부분이 물에 씻기자 곧 흰빛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를 옥에 가둔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형을 가하여 심문하였다. 또 장물인 소도 관아에 가두었다가 곧바로 소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현감의 처사에 매우 감사해하고 소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무송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사헌부 관원이 나무송이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죄로 삼은 것이다. 억울한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준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 분명한데,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나무송의 허물이라고 윽박지르니 나무송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로 나무송이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소 한 마리를 잠시 가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무송은 아직도 그때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듯하였다. 현명한 송사로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고도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니, 김령은 진심으로 나무송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소를 가둔 것을 문제 삼아 현감을 파직시킬 기발한 생각은 대체 누가 했는지, 그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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