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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4) 연행의 초절(初節), 동팔참(東八站)을 가다

신춘호

2015년은 연암 박지원(~1805)과 초정 박제가(~1805)의 서세(逝世) 210주기를 맞는 해입니다. 대체로 고려 말에서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對중국 사행역사는 600여년의 연원을 가진다고 합니다. 수 백회에 이르는 사행횟수 못지않게 사행에 참여한 인원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만, 시의성도 있으니 박지원, 박제가의 연행 동선과 스토리테마파크의 사행 테마스토리를 연계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호는 중국 연행노정의 초절구간인 ‘동팔참’구간의 주요 공간(사행경유지), 특히 압록강에서 요양까지의 경유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왕복 6천리 길, 연행노정(燕行路程)

연행노정은 크게 지난 1~3회에서 살펴본 국내지역 의주대로,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게 될 중국지역 연행노정으로 구분합니다. 중국지역 노정은 압록강을 건너 동북지역 요동‧요서평야를 경유하는 육로노정을 따랐지만, 명‧청 교체기에는 해로노정을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행노정은 외교사절의 운영에 관한 문헌인 『通文館志』와 사행기록인 『燕行錄』, 『路程記』, 『燕行路程記』, 기타 문헌群을 통해 그 경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신행렬 재연 장면 MBC드라마‘商道’ - 사신행렬 재연 장면(방송화면)

연행의 전체노정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1천 50리이고, 의주에서 북경까지 약 2천 61리, 도합 3천 1백 11리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되돌아오는 여정까지 합하면 6천리가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사행단의 왕복 소요기간은 북경까지 40여일, 북경에서의 체류기간 40일~60일, 귀국길 30여일을 더하면, 4~6개월 이상이 걸리는 일정이었습니다. 연경에서 외교현안의 처리 결과에 따라 전체 일정이 1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연행이 당대 관료, 지식인들에게 해외견문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지만 여러 측면에서 편안한 여행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국땅에서 경험하는 생경한 문화도 그렇거니와 길 위에서 장기간 풍찬노숙하며 겪는 이질적 풍토는 때론 생사의 기로에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삼사를 비롯하여 처음 중국 땅을 밟는 사행단은 행역삼고(行役三苦), 즉 ‘새벽엔 안개, 낮엔 먼지, 저녁엔 바람’이라는 세 가지 괴로움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충에도 불구하고 좁고 답답한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지적 탐구심에 불탔던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조선의 선비들에겐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장유(壯遊)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중국지역 연행의 시작, 동팔참(東八站)

조선사신이 연경으로 향하는 길(노정)은 조선 정부나 사신들이 임의대로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외교 통로라는 것이 국가 간의 규례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국의 정세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연행노정은 반드시 중국에서 정한 노정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명(明)의 수도인 남경을 오간 해로사행이 있었고, 명의 북경천도이후 육로노정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연행노정은 명대와 명·청 교체기, 그리고 청대를 거치면서 몇 차례 변동이 있었습니다.

중국연행노정도(신춘호. 2015) 중국연행노정도(신춘호. 2015)

연행노정이 정착된 시기는 1679년(숙종 5)무렵입니다. 청 조정이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우가장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조선 사신들은 심양에서 고가자(孤家子)-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에 이르는 길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압록강-요양-심양-광녕-산해관-북경에 이르는 청나라 때의 기본 노정이 확정된 것입니다.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 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遼陽)→십리보(十里堡)→성경(盛京)→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 주류하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 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薊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일반적으로 사행단의 최종목적지는 연경(북경)입니다만, 연행사절이 북경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황제를 만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열하(熱河, 승덕)까지 다녀온 경우입니다. 바로 연암 박지원 일행이 다녀왔던 1780년(정조 4)의 건륭제 70세 축하사절과 박제가 일행이 다녀 온 1790년(정조 14)의 건륭제 80세 축하사절인데요, 박지원과 박제가가 경험한 두 번의 열하노정은 조선 사행 역사에서 독특한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연행과정과 기록은 18세기이후의 조선지식인들에게 있어 세계인식의 경험과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기회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쌍검대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동팔참부분, 영남대도서관소장)

옛사람들이 중국지역 연행노정을 크게 세 마디(三節)로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연행의 초절은 압록강에서 심양까지입니다. 초절구간을 구체적인 지명을 따라 구분하면,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 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遼陽)→십리보(十里堡)→성경(盛京)에 이르는 구간입니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도강하면 본격적인 중국지역 연행노정 구간에 진입하게 되는데, 그 노정은 주로 원대의 동북지역 역참(驛站)제도였던 동팔참(東八站)이 기본을 이루었습니다.
동팔참(東八站)이란 ‘요양 동쪽의 여덟 참’ 이란 의미로, 사행기록마다 동팔참의 위치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712년 김창업의 『연행일기』에는 봉성에서 요동까지, 1798년 서유문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은 책문에서 심양까지라 했고, 1832년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는 책문에서 영수사(迎水寺)까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각 기록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리 개념에 대해 사행마다 다소 인식차이가 있었지만, 당대 조선지식인들의 동북지역에 대한 지리개념은 크게 동팔참의 틀 속에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팔참은 연행노정의 경로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팔참을 비롯하여 산해관-북경-열하에 이르는 전 노정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600년 연행 역사와 문화, 사연들을 한정된 지면과 짧은 필설로는 다 풀어낼 수 있는 재간이 없으므로 연행록에 언급되고 있는 주요노정과 공간을 기록사진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다.

의주에서 7일~10일가량은 머문 사행단은 방물이 준비 되는대로 도강 날짜를 잡고 조정에 장계(도강 및 일정보고)를 부친 후, 드디어 머나먼 중국 사행길 장도에 오르게 됩니다. 의주 구룡연 나루일대에서는 의주기생들의 배따라기 연창과 송객들의 환송이 이어지고, 고국을 떠나는 이들은 아쉽고 두려운, 혹은 기대감과 호쾌한 기상으로 도강선에 올랐을 겁니다.
연암 박지원은 장도에 오르면서 마부(견마잡이)인 창대와 하인(시종) 장복을 대동하였습니다. 말안장 주머니에 벼루, 거울, 붓 2자루, 먹1개, 공책 4권, 연행노정 이정표 두루마리 등 단촐 하게 여행 물품을 챙겼습니다. 붓과 벼루, 공책을 꼼꼼히 챙긴 것을 보면 연암의 앞으로의 행적이 상상되기도 합니다. 1780년 6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넌 연암 박지원 일행은 모두 270여명에 말이 194마리였다고 합니다.

압록강 통관검사 장면(다큐 OUN스페셜中에서) 압록강 통관검사 장면(다큐 OUN스페셜中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모두 3단계 세관검사를 해야 했습니다. 사행의 규찰업무를 맡은 서장관과 의주부윤의 감독아래 진행된 압록강변 휴대 짐 검사에서 1차에서 걸리면 태형, 2차에서 걸리면 유배, 3차에서 걸리는 자는 효시를 하였습니다. 국법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부 연행기록에는 규정에 비해 다소 느슨한 통관검사가 이루어지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관검사는 오늘날 공항 이미그레이션과 같은 절차라고 하겠습니다. 통관검사가 끝나면, 이내 배에 올라 강을 건너게 됩니다.
의주 관아에서 준비한 배를 탄 사행은 압록강 도강 후 중강-야판(지금의 마시촌, 상첨자촌 일대)-삼강(애하의 지류)을 건너 구련성 인근 들판에서 첫 번째 노숙을 하였습니다. 압록강이 잘 보이는 호산에 올라 의주 압록강과 구련성 들판을 둘러보면 옛 사신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장면이 얼핏 스쳐지나가기도 합니다. 연암이 강을 건널 때는 장마로 인해 강물이 불어 강 건너 도착지점을 벗어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중강을 건너면 갈대숲을 헤치고 5리를 가야 삼강이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의 마시촌, 상첨촌 일대의 들판이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곳은 중강개시(中江開市)가 열리던 곳으로 고지도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시(馬市)는 말(馬)을 사고팔던 곳이고, 구련성소학교 교문 앞에 중강세국(中江稅局) 표석이 있어 이 공간의 역사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압록강 나루터의 흔적은 2005년 무렵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움이 있어 제법 운치(?)가 있었는데, 이후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연도에 제방을 쌓아 나루터도 사라졌습니다.

압록강 통관검사 장면(다큐 OUN스페셜中에서) 의주 압록강 도강(만주국시기) 
압록강 통관검사 장면(다큐 OUN스페셜中에서) 압록강변 나루터(2005년)
압록강 통관검사 장면(다큐 OUN스페셜中에서) 삼강 건너는 답사팀(2013년)

<청과의 국경, 압록강에서 책문에 이르는 비무장지대가 존재하다>
(전략) 압록강은 옛날에는 마자수(馬訾水)라고 불렀다. 강은 세 갈래가 져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압록강과 중강(中江)과 소서강(小西江)이 그것이다. 강의 얼음이 굳어지지 않아서 그 위에다 바자를 깔고서 건너갔다. 강 서쪽에는 누런 띠풀과 허연 갈대가 들판에 가득 차 있는데 꿈틀꿈틀 작은 길이 미미하게 그 가운데에 통해져 있다. 길에는 한 그루 늙은 나무가 있는데 말을 모는 사람들은 으레 이곳에 이르면 종이 한 장을 나뭇가지 끝에 걸어 놓고 절을 한 뒤에 지나간다. 잠깐 사이에 종이가 쌓여 하나의 흰 보장(步障)이 되어 버린다. 어두워져서 구련성(九連城)에 다다랐다. 이곳은 명나라 때의 진강보(鎭江堡)로 유격장군(遊擊將軍)을 두었던 곳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9개의 성이 연달아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다.” 하고 혹은 애양성(靉陽城)에서 금(金)과 고려가 대치하고 있을 때 금의 장군 알로(斡魯)가 이곳에다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압록강에서부터 책문(柵門)까지는 그 사이의 땅을 비워 놓고 피아(彼我)의 백성들이 농사와 건축을 못하는 것이, 전탈지(䩅脫地, 완충지대) 같았기 때문에 사신 행차는 반드시 이곳에 이르러서는 노숙(露宿)을 해야 한다. 휘장과 장막을 치고 땅을 파서 온돌 모양 같이 만들어 불을 때는데, 이런 장막을 치는 곳이 도합 10여 군데나 된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몸을 가릴 곳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 나무를 태우며 둘러앉아 있는데 연기와 불이 들판을 뒤덮어 도성에 있는 것 같다. 의주 장교들이 창을 가지고 장막을 돌고, 밤에는 또 호각을 불며 일제히 함성을 내어서 범을 쫓는다. 눈이 내릴 기색이 자욱한데, 우는 말이 서로 호응하여 비로소 변경을 나선 시름을 알게 된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11-24>

중국 땅에 들어서자마자 구련성 인근 들판에서 천막을 치고 옹기종기 모닥불 피워 추운 몸 녹이던 사행단의 모습을 연행록에서는 ‘하나의 촌락을 이루는 듯 했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의주 군관들이 미리 설치한 장막에 삼사(三使)가 들고 나면, 말몰이꾼과 같은 아랫사람들은 밤샘 호각소리며 함성으로 호환(虎患, 호랑이가 출몰하는 지대였던 모양)을 물리치며 첫 밤을 보내야 했는데요, 이들의 노숙 장면이 상상을 하다보면 여행자 또한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압록강 중강-삼강-구련성 일대 전경(2005년) 압록강 중강-삼강-구련성 일대 전경(2005년)

청은 압록강에서 책문(변문)까지 약 120여 리를 그들의 조상이 흥기한 발상지로 여겨 사람이 살지 않는 봉금지대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경의 관문인 책문에 이르기까지 1~3일가량은 구련성 야판과 탕산성 총수산 일대에서 노숙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룡산(송골산 추정, 2012년) 오룡산(송골산 추정, 2012년)

탕산성촌 노숙 전에 사행은 온천이 있는 온정평, 금석산, 송골산 인근에서 점심을 먹거나 쉬어가곤 했습니다. 금석산 맞은편에 있는 송골산은 연행록마다 빠지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지금의 오룡산으로 생각됩니다. 금석산과 송골산을 혼돈하고 있는 기록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산세가 관악산을 닮았다느니, 병풍처럼 휘둘러져있다는 등 묘사하는 내용이나 지리공간의 위치가 오룡산의 형세와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송골산 원경 송골산 원경
탕산성촌 탕산성촌
탕산성 湯河 일대 탕산성 湯河 일대
탕산성에서 변문가는 옛길 탕산성에서 변문가는 옛길

오늘날 명확한 노숙지점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고지도인 ‘여지도’에 사행노숙 지점이 묘사되어 있어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약200~5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밥을 지어먹고 쉬거나 말들이 쉴 수 있는 곳은 강과 하천 주변이었을 겁니다. 사행단의 두 번째 노숙처는 탕산성 마을 뒤 湯河변이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곳은 황해도 평산의 ‘총수산’과 닮은 기암괴석이 서 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곳의 경치가 좋고 고국의 산천과 비슷하여 ‘총수산’으로 이름 붙였던 모양입니다. 사행은 그 개울 앞에서 밥을 지어먹고 노숙하며 고국에 대한 향수에 젖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곳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하천과 옛길이 남아있습니다.

구련성-탕참 사행노숙처(여지도, 규장각) 구련성-탕참 사행노숙처(여지도, 규장각)

책문(柵門)은 변문, 고려문, 가자문이라 부르는 관문으로 조·청간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식되던 곳입니다.

책문(동국여도-관서도, 규장각) 책문(동국여도-관서도, 규장각)

청은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요동북쪽 철령-압록강입구에 이르는 구간에 인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설치했는데 이를 ‘유조변(柳條邊)’이라고 합니다. 울타리를 세우고 문을 내었으므로 ‘책문(柵門)이라고 합니다. 사행이 요양으로 가기위해서는 책문을 관할하는 봉황성장의 허락을 얻고서야 진입할 수 있었으므로 책문에서 통관절차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행의 인원, 방물, 말의 수 등 책문에 들어가면서 작성하는 ‘입책단자(入柵單子)’를 넣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탕산성(총수산A, , 노숙처B)과 변문가는 옛길(추정/붉은 점선) 탕산성(총수산A, , 노숙처B)과 변문가는 옛길(추정/붉은 점선)

변문진 GPS좌표 기록 변문진 GPS좌표 기록

책문에 들어가면 의주상인들은 중국 상인들과의 인사와 교역으로 바빴고, 사행노정의 주요 아문에 제공하는 물품들을 나누어 주느라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변문 故居 영상기록 변문 故居 영상기록

책문은 조선과 청의 실질적인 국경이었으며, 청과 조선의 국경무역을 담당하는 이들의 늘 북적거리던 곳입니다. 사행은 책문에서 북경까지 물품을 운송하거나 사행단이 타고 갈 수레와 마차 등을 세내거나 대절해야 했습니다. 이들 차고(車庫) 업자들은 심양, 요양, 낭자산, 연산관, 통원보 일대에 살면서 사행운송과 무역에 종사해왔던 관계로 큰 조직을 형성하여 운영되었고, 의주의 상인들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밀치고 차고 밟고, 전쟁터에 있는 듯! 사람 253명, 말 196필의 사신일행 책문을 통과하다>
책문(柵門) 밖 32리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책문 안 기하(旗下) 악성(鄂姓)을 가진 민가에서 묵었다. 의주목을 통해서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방책을 들어갈 인마의 명단편에 글을 올렸다. (중략) 책문(柵門)은 상룡산 아래에 있다. 나무를 가지고 방책(防柵)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어깨를 넘지 않고 책목 사이는 엉성하여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이 방책을 세운 것은 북쪽으로는 탑라(嗒剌) 땅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해문(海門)에 이르는 2000여 리에 70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중의 하나다. 문에는 항상 자물쇠가 걸려 있고 봉성(鳳城, 궁궐을 둘러싼 성벽)의 수비장(守備將)이 그것을 주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신 행차가 방책에 도착하면 먼저 성장(城將) 등의 관원에게 통고해야 비로소 문에 와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방책 밖에서 점심을 하고 곧 도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마를 점검하여 성장소(城將所)에 입책보단(入柵報單)을 냈다. 사람은 도합 253명이고, 말은 도합 196필이다. 또 인마가 낙오하여 의주로 돌아간 것이 110여 쯤 된다. 시끄럽게 밀치고 차고 밟는 것이 전진(戰陣) 속에 있는 것 같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11-26>

  • 마차(수레)(2012년)

    마차(수레)(2012년)
  • 짐 실은 마차(2005년)

    짐 실은 마차(2005년)

사행이 책문을 지나면서부터 조선사행에 대해 청측의 공식적인 사행접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북경까지 향하는 노정에 소요되는 음식, 찬품 등이 관할지역 아문으로부터 지급되는데 이를 하정(下程)이라고 합니다. 사행의 숙박은 대체적으로 중국 측에서 정해준 관례대로 지정된 찰원(察院:公館)에서 묵습니다. 그러나 찰원을 배정받더라도 시설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아 근처의 민가, 사찰, 관제묘 등을 숙박지로 빌려 거처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사행단의 이동속도나 사정에 따라서 숙소와 휴식 장소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신들의 행렬이 숙박하거나 휴식하는 지역은 대부분 비슷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는 사행이 하루 동안 이동해야하는 거리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이동경로를 따라야하는 등 이전 사행들의 전통과 관례에 비춰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을 다니는 까닭입니다.

연행록에는 연도에는 많은 명산을 직접 유람하거나 보고들은 경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행이 압록강을 도강한 후에 만난 명산 중에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산이 봉황산입니다. 많은 사행들이 연도에서 만난 명산에 대해 평을 하고 있는데, 봉황의 전설이 내려오는 동북의 진산인 봉황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행들은 봉황산에서 우리역사 공간인 ‘안시성’을 떠올리는 고토인식의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연암박지원도 금석산, 의무려산 등 명산에 대해 논평하기도 했지만, 봉황산에 대해서는 우리의 명산인 삼각산, 도봉산을 들어 평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산천이 더 수려하고 아름답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지만 말입니다.

“봉황산의 형세가 빼어나고 기이함이 도봉산이나 삼각산보다는 좋아 보이지만, 하늘에 엉겨있는 빛과 기운은 한양의 여러 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열하일기, ‘도강록’ 中에서>

봉황산 원경 봉황산 원경
봉황산성 남문터 봉황산성 남문터
봉성시가지 봉성시가지
봉성시 봉황성수위아문 터 봉성시 봉황성수위아문 터

봉황성을 지난 사행은 마고령-송참(설례참)-장령고개를 넘어 팔도하를 지납니다. 이어지는 평지길로 통원보-초하구-연산관을 거쳐 동팔참 사행여정에서 가장 험로이자 큰 고개인 회령령과 청석령 두 고개를 넘어 요양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어귀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사행이 쉬어가기도 했다는 송참(松站)은 현재 지명으로 설례참(薛禮站)입니다. 조선인이 송참이라 이름붙인 설례참의 찰원에서 사행숙박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이 마을은 옛길 양 옆으로 몇 가구만이 남아있어 옛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장령고개 방향 왼쪽에 200여년 된 고거가 있어 ‘민가’의 풍속을 살펴 볼 만합니다. 설례참은 ‘설유참’이라고도 한데, 高·唐전쟁에 참여하여 이곳에 진을 쳤다는 당의 설인귀과 유인원장군의 성을 따서 붙인 지명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는 설인귀와 연개소문의 설화가 구전(口傳)되고 있기도 합니다. 설례참 뒷산은 장령이고, 개활지로 흐르는 하천이 분수령에서 분기하여 흐르는 구절양장의 팔도하(八道河)입니다.

동팔참의 진이보(鎭二堡)인 통원보는 옛 이름이 노보촌(老堡村)입니다. 역성(驛城)이 있었기 때문에 지명도 ‘노보촌’입니다. 마을 외곽에 정방형의 성곽 돌무더기가 밭이랑에 남아있고, 연행노정은 중앙 관통하여 지나갑니다. 연암 박지원일행은 이곳 통원보 마을에서 여름장마로 6일간을 머물게 됩니다. 박지원은 투전판도 기웃거려보고, 서당의 훈장과 서적목록도 만들어 보고, 중국 민간의 가축 기르는 제도, 벽돌의 유용성, 중국식 구들인 캉(炕)과 조선의 온돌에 대한 비교 등 무료한 나날 중에도 마을 이곳저곳에서 중국의 풍속과 제도, 민간 생활 문화의 양태를 꼼꼼히 기록하곤 했습니다. 답사팀을 운영하면서 가끔은 연암이 겪었던, 혹은 사신들이 겪었던 노정의 경험들과 유사한 상황들이 발생하곤 해서 간접체험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통원보 서쪽을 흐르는 하천이 아마도 당시 일행을 붙잡았던 그 하천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마침 답사팀도 불어난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추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열하일기>에서 이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포복절도할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데요, 원문의 일독을 권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통원보 수해의 현장 통원보 수해의 현장
연산관 ‘편담’지는 농민 연산관 ‘편담’지는 농민
노보촌(舊통원보) 노보촌(舊통원보)
연산관 전경(좌측 산봉우리가 회령령) 연산관 전경(좌측 산봉우리가 회령령)

초하구는 사행기록에 ‘답동(畓洞)’으로 표기되고 있는데요, 조선 사람이 붙인 지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수령아래 연산관은 요동 천험의 요새로 ‘아골관’이라고도 합니다. 연암은 연산관에서 숙박할 때 술에 잔뜩 취해 잠자리에 들었다가, 꿈속에서 심양구경을 실컷 한 뒤에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고서는 다시 되돌아올 일이 아득하여 애태우며 뒤척이다가 꿈을 깨곤 했다고 합니다. 변문에서 변방의 번화함을 보고 ‘변방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큰 도회지라야...’라고 했던 것처럼 연행노정 연도에서 시시각각 견문하는 것들에 대한 소회가 꿈속에서도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연행노정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회령령(지금의 마천령)과 가장 험준한 고개인 청석령을 지나야만 요동에 이르게 됩니다. 회령령과 청석령 고개는 지금도 동팔참 구간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팔참지역은 연행노정에서 산과 하천이 많고 자연경관이 조선의 기맥과 닿은 듯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인데다가 예로부터 이 지역은 고구려의 강역으로 인식되던 곳이니 동팔참 여정은 사행들의 감회도 남달랐던 곳이었을 것입니다.

마천령(舊회령령) 포장도로 마천령(舊회령령) 포장도로

답사초기인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산길은 비포장이어서 답사차량을 중간에 되돌리곤 했는데, 2005~2007년 사이 도로가 포장되고부터는 답사가 수월해졌습니다. 연산관에서 본계시의 김가하(金家河)를 따라 우회하여 첨수참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회령령에서 곧장 첨수참과 청석령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마천령아래 관제묘 터에서 바라본 청석령(원 움푹 패인 곳) 마천령아래 관제묘 터에서 바라본 청석령(원 움푹 패인 곳)

첨수참은 사행단이 청석령을 넘기 전에 물가에서 밥도 지어먹고, 말먹이도 주며 잠시 쉬어가던 곳입니다. 냇가의 물맛이 좋았던지 지명도 ‘첨수(甛水)’입니다. 지금은 만주족들의 집거촌으로 ‘첨수만족향’입니다. 첨수참에서 산길인 청석령과 평지 길인 호랑곡으로 나뉩니다. 사행이 청석령 고개를 넘다 우마차가 넘어지고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는데, 더러 첨수참 입구의 탑만촌에서 호랑곡으로 우회하여 낭자산참에서 합류하는 노정을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청석령 고개가 험난하다보니 호랑곡 평지 길을 이용하는 겁니다. 호랑곡 입구 둔덕에 작은 요대 탑(塔)이 있어 사행 길의 이정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첨수하(첨수만족향)

    첨수하(첨수만족향)
  • 탑만촌 요탑(호랑곡 입구)

    탑만촌 요탑(호랑곡 입구)

청석령은 옛길의 흔적이 가장 온전히 남아있어 옛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남다른 감흥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특히 병자호란의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던 봉림대군이 청석령을 지날 때 읊었다던 ‘음우호풍가’는 이후 청석령을 넘나드는 사행들의 마음에 비분감을 심어주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청석령 지났느냐 초하구 어드메뇨/호풍도 차도 찰사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뉘라서 내 행색 그려 님 계신데 드릴까.” 라는 내용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 공간을 지나간 사행에게 병자호란의 치욕과 아픈 기억은 볼모의 몸이 된 왕자의 그것만큼이나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남아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연행록’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청석령 서쪽고개는 임도로 활용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고 돌(靑石)이 널려 있어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길입니다. 청석령 고개에는 영험한 관제묘가 있었다는데, <열하일기>에서는 관왕묘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묘 터가 잡초 더미 속에 방치되었다가 2012년부터 복원을 시작, 2014년에 공사를 마무리하여 현재는 여 도사(女 道士)가 참배객을 맞고 있습니다.

청석령 정상(노거수(上), 관제묘터(下)) 청석령 정상 - 노거수(上), 관제묘터 터(下)

청석령은 조선사행이 연경으로 향하면서 사행길의 안전과 임무의 성공을 기원하는 공간이었지만, 임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가장 먼저 고향소식을 들었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사행단이 요양을 거쳐 청석령에 다다를 때쯤이면, 선래군관을 통해 소식을 접한 의주관아에서는 미리 이곳까지 관아의 인원을 보내 사신단을 영접케 했던 모양입니다. 수개월에 걸친 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사행단에게 가장 반가운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고향의 가족, 친지들 소식이었을 겁니다. 가족친지들의 안부가 적힌 편지(家書)를 받아들기 전에 ‘무탈’한 소식이 적혀있기만을 염원하기도 했습니다.
청석령을 넘어 임도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상보(上堡)마을을 지나 양갑(亮甲)마을 앞에 서면 큰 저수지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탕하수고(湯河水庫)입니다. 청석령을 넘은 사행단이 하룻밤 묵었던 ‘낭자산참(狼子山站)’이었는데, 지금은 탕하수고에 수몰되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본래 마을 주민들이 수고 인근의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여 만든 마을이 양갑촌입니다. 책문에서부터 조선사행단의 물품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낭자산과 석문령 옛길(중국여도) 낭자산과 석문령 옛길(중국여도)

홍대용도 낭자산참에 들렀을때 운송업자 왕가의 집에서 묵기도 했습니다. 왕가네 집 뒤에 ‘계명사’가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계명사촌을 말합니다. ‘계명사’는 당태종의 고사와 관계되는 사찰입니다만 자세한 소개는 별고를 기약합니다.
낭자산에서 삼류하, 두관참으로 이어지는 옛길은 수몰지역이 되어 답사가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이어볼 뿐입니다. <중국여도>에서 수몰되기 전의 옛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석문령은 요양 직전에 넘는 큰 고개입니다 청석령이나 회령령에는 못 미치지만, 큰 돌문이 있어 제법 웅장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궁장령구의 산길에 그 흔적이 남아있고, 정상부를 많이 깍아 내려서 완만한 등성이를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대석문령’이라고도 하며, 아랫마을은 사행단이 한겨울에도 얼지 않은 달달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던 ‘냉정촌’, 즉 왕보대촌 입니다. 망보대촌 사진 좌측의 가옥 안에 ‘샘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 대석문령

    대석문령
  • 망보대촌(舊냉정촌)

    망보대촌(舊냉정촌)

<포로가 된 고려 사람, 돌아가지 못하고 요동에 묻혀 고려총을 이루다>
왕보대(王寶臺) 40리를 가서 진씨(陳氏) 성의 민가에서 점심을 먹고 영수사(迎水寺) 30리를 가서 기하(旗下)의 주씨(朱氏) 성의 집에서 묵었다. 석문령(石門嶺) 마루터기의 석벽이 딱 벌리고 있는 것이 문짝을 훤하게 열어 놓은 것과 같았다. 왕보대(王寶臺)는 바윗돌이 층지어 걸려 있는 것이 돌 축대를 쌓은 것 같은데, 석문령(石門嶺)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냉정(冷井)이 길 곁에 있는데 호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 (중략) 고려총(高麗叢)은 다른 한 명칭은 고려총(高麗塚)이다. 고려 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가지 않은 자들이 죽어서 이곳에 묻힌 것 같다. 길 왼쪽에 10여 개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 앞에 간혹 비석을 세우고 돌 향로를 마련한 것도 있다. 혹시 그것들이 고려총일까. 왕보대(王寶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12-02>

<열하일기>에는 석문령 고개를 넘어 냉정촌과 고려총의 낮은 산을 끼고 돌면 본격적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바로 ‘요동벌’입니다. 연암이 ‘한바탕 크게 한 번 울만 한 곳’으로 묘사한 ‘호곡장론’의 무대입니다. 일망무제의 요동벌판은 요하서쪽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이어지지만, 육안으로 확인하는 요동벌의 시작은 태자하를 건너서부터 라고 생각됩니다. 다음 회에 심양으로 향하는 여정과 함께 좀 더 소상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동평야 요동평야

사행단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요양외곽의 아미장(蛾眉庄)에서 팀을 둘로 나누어 이동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정관을 중심으로 한 일군은 목창나루에서 태자하를 건너 숙소참인 영수사로 향하고, 유람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군은 구요동으로 들어가 연행의 장관인 ‘요동백탑’을 관람한 후 영수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요양에서 사행단이 주로 유람했던 공간은 화표주, 요동백탑, 관제묘 등이었습니다.

요양 관제묘 - 소실전(左), 복원중(右) 요양 관제묘 - 소실전(左), 복원중(右)

요동백탑은 ‘연행 길의 장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웅장하고 볼만한 장관이었습니다. 물동이만한 크기로 탑신에 매달린 ‘풍경’과 ‘한벽광류’ 글씨를 보기 위해 천리경을 빌려 올려다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요동백탑기>를 통해 요동백탑의 웅장함을 찬탄해마지 않았습니다.

  • 대석문령

    백탑 조망
  • 망보대촌(舊냉정촌)

    요동백탑과 광우사 전경

일망무제의 요동벌판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 있어 그 위용이 천하의 장관이요, 간간이 울리는 풍경소리가 요동벌을 진동시켰다던 그 장면을 상상으로만 추체험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기도 합니다. 주변의 인공구조물로 인하여 옛사람들이 경험했던 ‘장관’을 경험할 수 는 없지만, 요동백탑은 옛사람들이 보았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연암은 요동백탑을 비롯한 유람을 마친후 태자하를 건너 신요양의 영수사에서 숙박을 하였습니다. 영수사는 찰원이었습니다. 지금은 택지개발로 영수사 일대가 모두 ‘상전벽해’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2~3년 전까지만 해도 사진과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양 영수사(사행의 숙소로 이용되던 찰원 터) 요양 영수사(사행의 숙소로 이용되던 찰원 터)

영수사에서 난니포와 만보교를 지나면 동팔참(東八站)의 마지막 역참인 호피역(십리하보)입니다. 여기까지가 동팔참구간입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동팔참 지리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요양까지를 동팔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연행의 초절은 요양-십리하-백탑보-혼하-심양까지를 말합니다. 동팔참은 연행의 초절에 속합니다. 구련성에서 심양에 이르는 ‘초절’ 구간은 연행노정의 여느 구간보다 조선의 山河와 닮은 구석이 많은 지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사행이 임무를 마치고 요동에 들어서면 조선의 산천과 너무나 닮아 있는 이곳을 지나며 고국을 향하는 그리움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높은 산과 고개, 하천이며 기암괴석도 조선의 그것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홍경모는 <총수산기>에서 “동팔참의 산천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강역은 다르지만 기맥이 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봉황산과 조선의 명산을 비교했고, 고구려의 안시성의 위치를 비정하기도 했으며, 청석령, 요동일대를 지나면서 북방고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팔참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사의 강역이 펼쳐진 공간이었기에 옛 사람들에게 있어 북방 고토의식이 가장 강렬하게 피력되던 공간이었습니다.

이렇듯 연행노정에서 우리역사의 흔적을 상기하거나 고국산천의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연행의 초절구간인 동팔참이었습니다. 다음호에서는 요동지역, 특히 심양일대에 남아있는 병자호란의 기억과 소현세자, 일행의 행적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작가소개

신춘호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등이 있다.
“신립(申砬)의 활약과 승전보”

초간일기 권문해 <초간일기>,
1583-02-15 ~ 1583-02-09(윤)
1583년 2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진에서 일어난 이탕개의 난을 해결하기 위해 최고의 무관과 장수들이 북방으로 향했다. 도순찰사로 임명된 정언신이 한양을 떠나 경원진을 향해 진격하는데, 경원진의 인근의 온성부사로 있던 신립(申砬)이 호인을 추격하여 흉노족들이 막사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5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경원진에 도착한 정언신은 신립 등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의 격퇴에 나섰다.

“신립이 전사하다”

신립장군 순절비 및 비각 정경운 <고대일록>,
1592-04-20 ~ 1592-04-28
1592년 4월 20일, 조선 땅에 상륙한 왜적들은 같은 달 25일 충주에서 신립과 마주했다.
충청도 충주 달천에서 조선군은 신립(申砬)이 패배하여 사망하였으며, 정예병 5백여 명도 모두 물에 빠져 숨지고 말았다.
이 소식이 1592년 4월 28일에 선조에게 보고되었는데, 궁궐이 떠들썩했다.

“병마절도사 김체건에게서 병자호란 무용담을 듣다”

성이성 성이성 <연행일기>,
1645-03-28 ~ 1645-03-29
1645년 3월 28일, 사신단 일행은 출발하여 안주(安州)로 들어갔다. 병마절도사 변사기(邊士紀)가 인사드리러 왔고, 우후(虞侯) 남두형(南斗炯)이 이어서 왔다. 부사(副使)가 백상루(百祥樓)에 오르자고 하여 함께 올랐다. 넓은 들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긴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깃배와 거룻배가 바람따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한 성의 촌락이 모두 눈 아래에 있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기상이 비록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웅건하고 상쾌함은 또한 평양 연광정(練光亭)보다 못하지 않았다. 병사(兵使, 병마절도사) 김체건(金體乾)이 영선대장(領船大將)으로 마침 성 안에 있어 함께 자리하기를 청한 뒤 병자호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경초관(京哨官)으로 수비를 맡게 되어 가을에 이 성에 주둔하였는데 갑작스럽게 병란을 만났다.

“황하수가 향병으로 적을 격퇴하다 ”

고대일 정경운 <고대일록>, 1592-08-11
1592년 8월 11일, 황해도 황주에 사는 훈련봉사 황하수(黃河水)가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풀이 무성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하나하나 활을 쏘거나 칼로 베어 죽였다. 왜적들이 황주를 지날 때는 황하수를 두려워하여 밥을 지어먹지 못하고 생쌀을 삼키면서 황급하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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