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페이스북PDF
Story Issue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조선시대 인증 샷 「계회도 (契會圖)

- 오늘 이 기쁜 만남, 글로 쓰고 그림을 그려 길이길이 기억하리라 -

김민옥


이번 호 스토리이슈에서는 조선판 인증 샷, 계회도(契會圖)에 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계회도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특별한 만남을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사진기가 없던 시절에 남겨진 기록 사진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인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된 계회도에 관해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Q1. 계회도(契會圖)란 무엇인가요?


계회도는 선인들이 가족, 친구, 동료 등의 특별한 만남의 순간을 기념하고, 간직하기 위해 제작한 그림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와 인연을 중요하게 여겼던 선비들은 그 마음을 계회도에 담았고, 참석한 사람의 수만큼 그려서 한 장씩 나누어 가지며 소중한 만남을 길이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계회도는 시(詩)‧서(書)‧화(畵)가 종합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선인의 아취와 풍류를 엿 볼 수 있는 그림이라고 할 있습니다.


Q2. 계회도에는 그림과 함께 시와 글도 담겨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계회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계회도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두루마리 형태의 계축(契軸)이나 책자 형태의 계첩(契牒)으로 그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계축의 경우에는 계회의 명칭을 맨 위에 적고 중간에 계회 장면을 그린 기록화를 배치하고, 그 아래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인적사항인 좌목(座目)을 적습니다. 좌목은 관직의 서열 혹은 나이순으로 품계‧관직‧자‧호‧이름‧생년‧본관 등을 적었습니다. 계첩의 경우는 책 표지에 제목을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그 뒷면에 참석자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장계회도(部將契會圖)>, 1586년, 107.5×67, 한국국학진흥원 소장(기탁:야성정씨 참판공 종택)
1586년(선조 19) 5위(衛)의 부장으로 취임하였던 장수들이 작성한 계회도.



<보첩(寶帖)>, 1654년, 35.7×19.0, 한국국학진흥원 소장(기탁 : 광산김씨 설월당 종택)
1654년(효종 5) 9월 6일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안홍정(安弘靖),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채이항(蔡以恒),
진사(進士) 김총(金璁) 등 영남 출신의 선비 26명이 삼청동에 모여 연회하는 모습을 그린 계회도.



Q3. 조선시대 선인들은 어떤 목적과 이유로 모임을 만들고, 계 혹은 계회를 조직했던 건가요?


계는 ‘묶다’, ‘맺다’ 등의 뜻의 한자 계(契) 혹은 재원을 가지는 모임을 뜻하는 계(稧)라는 한자로 씁니다. 한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인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과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였습니다. 즐거운 일이 있거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계(契)를 통해 기쁨을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 나갔습니다. 신라시대부터 모임은 구성원들의 상호부조, 친목 혹은 공동의 이익 등의 다양한 목적과 이유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의를 도모하고 서로 돕는다는 차원을 넘어 선현의 문집을 발간하고, 추모 공간을 건립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조금씩 정성을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계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모임의 목적과 취지에 따른 규약을 만들어 운영되었습니다.


<광신김씨록(光山金氏錄)>, 1635년, 26.0×24.4, 한국국학진흥원 소장(기탁:광산김씨 긍구당종택)
1635년(인조13) 광산김씨 문중에서 결성한 화수회 계안.
적서(嫡庶)를 가리지 않고 일족이 모임으로 거주지와 관직, 당호 등과 규칙인 입약이 수록되어 있다.


<입약(立約)>

  • 매년 봄 가을 모일 것. 봄 3~4월, 가을 9~10월
  • 강회 때마다 각각 술 1병, 안주 1합, 두부 3되, 두 사람이 닭이나 꿩 중 1마리를 준비하고, 유사는 각각 따로 술 1병, 두부 1되, 닭이나 꿩 가운데 1마리를 준비할 것. 물목은 회문으로 먼저 전할 것
  • 강회 때 까닭 없이 불참하면 다음에 모일 때 청주 1단지, 닭이나 꿩 가운데 1마리, 건어 2마리 바칠 것
  • 긴요하지 않은 일로 아뢰어 빠지는 경우 다음에 모일 때 청주 1병, 건어 1마리를 바칠 것
  • 회문을 전하지 않은 자는 다음에 모임 때 청주 1단지, 탁주 1단지, 닭이나 꿩 가운데 2마리, 건어 3마리를 바칠 것
  • 벌을 거행하지 않은 자는 손도(損徒)할 것. 손도를 풀 때는 혼자서 따로 장만해서 바칠 것
  • 수재, 화재, 도적, 관재(官災)와 같은 환란은 서로 구할 것
  • 유사는 두 번 역임 후 교체할 것

Q4. 계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계모임의 유형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결속을 도모하고 길흉사에 상부상조하기 위해서 조직한 족계(族栔), 스승과 선현의 학덕을 추모하는 학계(學契), 관직생활에서 고락을 함께한 것을 기념하는 관계(官契), 벗이나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한 친목계(親睦契)입니다.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 1550년, 121.0×59.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호구(好逑), 공부(貢賦), 전량(錢糧),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담당했던 호조의 정랑(正郎), 좌랑(佐郞)
낭관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삼각산 아래 위치한 관청 내부의 모임 풍경이다.



Q5. 계회도에는 대체로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모여, 풍류와 술을 마시는 장면이 많은데요. 계회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모임은 대체로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정자나 서원, 사찰 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봄‧가을이면 다양한 모임이나 단체들도 야외로 나들이를 많이 가는데요, 옛 선인들도 풍광이 아름다운 봄이나 가을에 계회를 자주 개최했습니다. 계회는 지금의 총무라고 볼 수 있는 유사가 사회를 보며,약 3~4시간 정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모임에서는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며 시를 읊고 풍악을 울리며 풍류를 더했습니다.


Q6. 선인들의 이러한 계모임 가운데 지금까지 이어진 계회가 있나요?


대표적인 계로는 1478년(성종 9)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535년 동안 이어져 오는 우향계(友鄕契)가 있습니다. 우향계는 안동의 고성이씨‧안동권씨‧흥해배씨‧안강노씨 등 5개 성씨 가문의 5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13명이 참여한 계모임이었습니다. 또,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또 다른 계모임으로 임계계회(壬癸契會)가가 있습니다. 임계계회는 1613년(광해군 5)에 임자년(1552)과 계축년(1553)생의 선비 11명이 안동 학가산 광흥사(廣興寺)에서 가진 모임으로 4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임계계회지도(壬癸契會之圖)>, 1613년, 165×65.5, 한국국학진흥원 소장(기탁:도계서원)
1613년(광해군 5) 9월 안동에 사는 임자년(1552)과 계축년(1553) 생인 11명의 선비가
안동의 광흥사에서 가진 계모임을 기념한 그림이다.



    리  :  김민옥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수석연구원)

“퇴계의 시에서 청량산을 읽다”

김몽화, 유청량산서(遊淸凉山序)

청량산은 예안(禮安)의 동북 지역에 우뚝 솟아 있는데,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께서 왕래하며 그 가운데서 쉬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절 안과 문밖에 유람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니 어찌 (퇴계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을 사모함은 사람마다 똑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고금의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숨겨진 곳을 찾아 끝까지 탐색하고 빼어난 경치를 그윽이 감상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지만, 누가 등산의 묘한 맛은 눈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노선생께서는 산수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인지(仁智)의 취미를 드러내셨다.
그전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妙意祇難言(묘의기난언) 기묘한 뜻을 말하기 어려우나
佳處每獨領(가처매독령) 아름다운 곳은 매양 홀로 도맡았네.

라고 하셨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청량산 등반가, 17년 동안 13회 오르다”

금란수, 보현암벽상서전후입산기

청량산(淸凉山)은 산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나귀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경우나 질박한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머무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산과는 매우 다르다.
금난수는 정미년(1547년, 명종 2년) 봄에 이 산을 두루 거치며 들어가 본 뒤에야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기유년(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이비원(李庇遠), 이임중(李任仲)과 함께 산에 들어가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다. 구경서(具景瑞), 윤이직(尹而直), 권자반(權子胖), 김대보(金大寶)가 이미 이 암자에 우거하고 있어서 날마다 구경서 등 여러 사람과 서로 모여서 독서한 것을 강론하였다.
경술년(1550년, 명종 5년) 봄에 또 이 암자에 묵었다.
신해년(1551년, 명종 6년) 음력 7월에 또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는데, 퇴계(退溪) 선생께서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주셨다.
임자년(1552년, 명종 7년) 여름 6월에 산에 들어가 홀로 안중암(安中庵)에서 한 달을 머물고는 만월암(滿月庵)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한 달 쯤 지나 안중암으로 돌아왔다.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09-02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열두 봉우리 이름, 주세붕 선생이 짓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년 9월 1일, 청량산 유람을 떠난 김득연 일행이 드디어 동문(洞門)에 들어갔다. 옛 성이 있는데, 들쭉날쭉 나 있는 나무들 속에 깊숙이 숨어 있기에, 승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 공민왕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 터무니없는 전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전쟁이 요란하던 날 어지러운 병사들에게 쫓기던 임금이 한 모퉁이에서 아침저녁을 구차하게 살아 있던 것을 생각해보니, 한 거친 성가퀴가 만고에 근심을 머금었으나, 지난 일이 황당무계하여 논할 수 없다. 낙수대(落水臺)를 지나니, 냇물이 돌에 흐르는 소리가 옥 소리처럼 영롱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골짜기가 고요하고 숲이 우거져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이 쌓이고 모여 있었다. 한 승려가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이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옛날 한 승려가 연대사(蓮臺寺)를 창건하려고 뿔 셋 달린 소로 변하여 재물을 나르고 일을 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다가 하루 만에 죽어 구덩이를 파 매장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득연이 말하기를, “신령함을 받고서 인간이 되었으니, 반드시 소로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는 눈으로 그 사실을 보았는가?” 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지 못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