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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우리 조상의 ‘묏자리’ - 산도(山圖)

하해빈


이번 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 시대 산소를 그린 그림인 산도에 관해서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산소를 그린 그림으로는 묘산도(墓山圖), 지방도, 명당도(明堂圖) 등이 있는데요, 그 중 묘산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Q1. 산도란 무엇인가요?


묏자리나 산소를 담은 그림을 통칭에 산도라고 부르는데요, 그 쓰임새가 조금씩은 다릅니다. 먼저 가문의 묘를 표시하고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묘산도’가 있고, 풍수지리에서 상징하는 이상적 공간으로서의 명당에 자리 잡은 묏자리를 그린 ‘명당도’가 있습니다. 또, 마을 전체의 지세를 묘사한 지방도 또한 산도에 범위에 들어갑니다.

<명당도>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상징하는 이상적 공간으로서의 명당에 자리 잡은 묏자리를 그린 그림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Q2. 조선 시대 집안의 묏자리를 그린 그림이 많이 전해지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 시대 조상의 육체가 묻힐 묏자리를 찾고, 묘를 관리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을 모셔와 섬기는 제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좋은 묏자리에 조상을 안치하고, 잘 관리하는 일은 곧 자손의 도리를 지키고 가문의 권위와 위상이 걸려 있는 문제였습니다. 더불어 묏자리의 선택에 따라 가문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묏자리를 둘러싼 묏자리 소송 사건은 조선 시대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합니다. 산송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산도는 매우 중요한 증거자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이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갑진년에 유남식과 김가의 산송(山訟)중에 작성된 산도> 김가가 류남식 아버지의 묘역에 투장한 묘를 파가도록 해달라는 류도성의 소지에 의해 행해진 산송 중에 작성된 산도(출처 : 옛문서생활사박물관)


<무인년에 전주 유씨가와 이우민의 산송 중에 작성된 산도> 무인년 2월 초6일 전주 유씨가의 모인과 이우문 사이의 산송 과정에서 작성된 산도. 산송이 발생하였을 때 두 묘의 위치 등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령의 명에 의해 작성되는 문서(출처 : 옛문서생활사박물관)


Q3. 묏자리를 둘러싼 산송(山訟)이 조선 시대 크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산송은, 말 그대로 풀면 ‘산과 관련된 송사’입니다. 여기서 산은 묘지 또는 묘지 주변 영역을 가리킵니다. 즉, 묘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송입니다. 산송은 조선 후기에 양반 가문치고 얽히지 않은 집안이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고려 시대 화장 문화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교식 매장 문화로 전환되었고, 묘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주자가례]와 결합하면서 산송이 확산되었습니다. 물론, 유교적 질서 확립과 함께 길지를 추구하는 풍수지리, 산지라는 경제적 이권 등도 산송의 주요한 배경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Q4. 산도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가요?


산도의 종류는 다양하였으며 남아있는 자료도 많습니다. 현재 산도는 많은 연구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산도 중에서도 지방도는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명당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많은데요, 산도와 같은 자료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숙빈최씨소령원도(淑嬪崔氏昭寧園圖)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숙빈최씨소령원도> 보물 제1535호이며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양주의 소령원(昭寧園)을 그린 묘산도.산도의 형식을 취했으며 가운데 묘소와 왼쪽의 제청(제사와 관련된 건물), 오른쪽의 비각(비문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농사짓는 땅)이 그려져 있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수석연구원)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1616년 9월 25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돌아와 소지동(蘇池洞)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말하길, 오늘 박가가 감사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송사가 걸렸던 산에서 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씨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금지시키고 중지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택룡이 이미 박가가 산송 다툼이 일어난 바로 그 곳에 묘를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다시 묘자리를 잡았으니, 두 집안 모두 장례를 허용하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수 등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정소(呈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고자 해서였다. 생질 정득만 김택룡을 찾아 왔다.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01 ~ 1617-03-03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 강아지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말로만 강아지에게 해 주면서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 번 이날 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강아지와 말이 바로 들어가 이자정에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강아지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미상, 임천서당중건일기,
1806-05-03 ~ 1806-05-04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1739년 8월 5일, 권상일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지역 서원의 인사 문제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지역 인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을 찾아가 일일이 뵙는 것도 노령의 권상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상일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어서 권상일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가 아뢰고, 또한 배자(牌旨)를 내어 소송의 상대편이었던 황야(黃埜)라는 자를 잡아오자마자 일제히 나아가 심문하여 보름날 전에 무덤을 파서 옮기겠다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황야는 곧 관청에 하옥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문중 사람들의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황야라는 자가 문중의 묘소에 몰래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에서 투장한 묘를 당장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중에서 직접 황야를 잡아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황야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종이 무덤을 파간 다음에 땅을 고르고 원 상태로 되돌린 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야가 또 다시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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