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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

오직 보물은 청백, 寶白堂보백당

정리 : 김민옥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두 번째 이야기는 ‘보백당寶白堂’입니다. ‘보백당’은 평생 청렴과 강직을 실천했던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종택 별당의 편액입니다. 김계행의 나이 68세 되던 1498년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 2리에 해당하는 설못笥堤에 살았는데, 이때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이라 하였습니다. 보백당에서 ‘보백’의 의미는 선생께서 읊조린 시 가운데 ‘오가무보물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이라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다‘라고 한데서 ’보寶‘와 ’백白‘자를 취해서 당호로 삼았습니다. 그의 자호 또한 ’보백당‘입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마을에 있는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와 별당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은 본래 안동시 풍산읍에 자리했으나,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 지금의 묵계에 터를 잡았다. 현재 보백당 종택은 김계행이 세상을 뜨고, 그의 후손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보백당의 편액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글씨입니다. 김가진은 김계행의 형, 김계권의 후손입니다. 동농 김가진은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하며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조선총독부의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을 견디다 1922년 7월 77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가로서도 유명합니다.


보백당寶白堂/ 54.6×133.7 / 해서楷書 / 안동김씨 보백당종중安東金氏 寶白堂宗中


집안에 보물이 될 만한 것은 청백淸白뿐이라니 글씨에 볼 만한 것은 옥돌을 갈아 만든 듯한 필획뿐이랄까? 대형 편액에 가득 찬 글씨의 개성이 뚜렷하다. 필획은 붓의 출입처에 구분이 없고 마무리한 붓끝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굳세고 단단함이 석조건축물을 대하는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편액은 글씨로서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글씨는 다양한 형태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보백당’ 편액의 글씨에서는 바르고 옳은 길을 택해 강인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김계행과 김가진, 두 선현의 삶의 궤적이 담긴 듯합니다.

김계행은 50세인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를 하게 됩니다. 관직에 나간 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공직자로서의 품위와 자세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백성과 나라를 생각합니다. 첫 관직으로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나, 그의 강직함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53세에 고령현감으로 나아갑니다. 고령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과 함께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에서 그를 사간원정언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천재(天災)와 당시의 폐단과 인사행정의 문란함을 논계했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됩니다. 이후에도 여러 관직에 임명되고 그때마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또 파직되기를 반복합니다. 66세에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르지만 시정의 부조리로 인한 폐단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으나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몇몇 권세 있는 신하들이 나라를 휘저어 나라가 날로 그릇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여러 차례 직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68세가 되던 해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풍산에 ‘보백당’이란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배들을 양성에 힘씁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중종(中宗) 1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김계행은 죽음을 맞아 유훈을 남깁니다.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청백의 정신을 자손대대로 공근하게 지킬 것이며 효우하며 화목하게 지내라. 더욱이 선조의 훈계를 소중히 여겨 너희들은 하나하나 준수할 것이며, 교만방자하고 경박한 행동으로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상례와 제사는 오직 정성과 공경에 있는 것이니, 풍부와 사치에 힘쓰지 말라. 또한 나는 경악(經幄)에 오래 있으면서 군왕을 바르게 인도하고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지 못하였다. 살아서 이미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는 장례는 간단히 하고 성명만 기록하여 무덤을 표시할 뿐 허황된 말과 지나친 미사로 남에게 비갈(碑碣)을 청하지 말라. 훌륭한 일이 없으면서 훌륭한 이름을 얻는 것은 내가 매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
우리집에 보물이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



持身謹愼待人忠厚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함에 있어 충직하고 온순하라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청백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보백당 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하여 관내의 청렴한 공직자와 가정형편이 어려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여 지금까지도 선생의 청백정신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다가 비리에 연루되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을 저질러 언론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자신의 안위와 욕심에 빠져 추악한 모습의 공직자를 볼 때면 새삼 청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녹을 먹는 관료라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 자신의 몸가짐을 늘 바르게 해야 하며, 관직에 물러나서는 사회에 모범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고  :   한국의 편액 사이트

    리  :  김민옥 (한국국학진흥원)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09-28 ~ 1619-10-04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흰죽부터 개장국까지, 끼니도 되고 보신도 하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12 ~ 1626-11-06

1625년 1월 12일, 신유. 권별의 안색은 완전히 희게 되었고, 소변이 붉던 것도 맑아졌다. 조금씩 밥맛을 알게 되어 녹두죽과 백원미(흰쌀 죽)를 4~5차례 마셨다. 밤에도 3~4차례 마셨다. 주부의 기생이 각종 진미를 연이어 보내주셨다. 야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은 지난밤과 다름이 없었다. 달보가 병문안을 왔다.
1625년 1월 14일, 계해. 증세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은 민물고기로, 혹은 새우젓갈로 반찬을 하여 연이어서 미음을 먹었는데, 다 뜨거운 물로 타서 넘겼다.
1625년 1월 26일, 을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꼈다. 청어 1마리를 구워서 먹었는데 해롭지 않았다. 밤에는 기장쌀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숟가락 넘겼다.
1625년 2월 4일, 계미.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식후에 비를 잠시 뿌렸다. 유량의 집은 방이 비좁고 창문이 없는 데다가 또한 날씨마저도 점차 따뜻해져 권별은 기운이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오늘 사랑으로 옮겨 들어갔더니 기운이 갑자기 깨어나고 밝아졌다. 이봉이 민물고기 여러 마리를 들여보냈다. 회를 쳐서 먹었는데, 또한 체하지 않았다.
1625년 2월 9일, 무자.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오후에 빛이 났다. 서비가 7일부터 앓아누웠는데, 증세가 수상하니 염려스러웠다. 안채 변소를 수리하였다. 주부 댁에서 민어 반 마리, 생강 6각을 보냈다.

“새해 첫날 노인이 된 친구들끼리 모이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1-01 ~ 1745-01-03

1745년 1월 1일, 을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차리고 사당에 나아가 차례를 지냈다. 첫날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둘째 날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며, 잠깐 바람이 불기는 했다. 계부를 모시고 추동에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새해 셋째 날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연이어 들렀다. 을축년은 권상일에게 67세가 되는 해이다. 이미 권상일도 환갑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도 두루 거친 그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도 느껴졌다.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였다.
1월 3일 밤에 여러 노인들과 함께 이순(而順)의 집에서 입춘(立春)의 밤을 보냈다. 후경(厚卿)도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 권상일은 오히려 젊은 축이었다. 계삼(季三) 아저씨는 73세, 문언(文彦)은 71세, 계부는 69세, 권상일은 67세, 이순은 63세였다. 그의 동네에 사는 노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노인이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김령, 계암일록
1603-09-08 ~ 1619-10-27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 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온 집안이 병으로 신음하여 개를 잡아 보양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4 ~

1912년 11월 14일, 김대락의 집안은 병마와 싸우느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사촌 제수씨는 이전부터 지병이 있어 상당 기간을 앓고 있었고, 며느리는 최근 감기가 들어 며칠째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들 형식이는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었고, 손자 창로는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바짝 여위였다. 그나마 창로는 누워서 앓는 병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한창 나이에 먹어야 제대로 자랄 터인데 음식을 마다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과 싸우고 있지만, 집에는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김대락은 크게 마음을 먹고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기로 하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을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을 나누어 먹던 녀석이었다. 짐승의 목숨을 버려 사람의 식욕을 돋우려 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는 평소 잘 짖지도 않고 사람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잡아먹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장자가 말한 닭과 산 나무의 교훈은 제법 그럴 듯한 가르침이었다. 개를 잡아 국을 끓이니, 오랜만에 식구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마다하던 창로도 오늘만큼은 제법 요기를 한 모양이었다.
한 끼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가혹한 현실이 돌아왔다. 상점 주인이 와서 외상값을 독촉하였다. 몇 번이나 기일을 미루어 놓았는데, 매번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동짓날이었는데, 팥죽 끓일 재료도 없어 그냥 지나쳤다. 명색이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절기도 그냥 지나치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지라고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에게 인사도 못하였으니, 팥죽 재료가 있다한들 입맛이나 다실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탄식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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