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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

편액으로 살펴보는 미수 허목 선생
전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정리 : 하해빈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네 번째 이야기는 전서(篆書)를 새롭게 해석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글씨가 담긴 편액 두 개를 소개합니다. 먼저 편액을 소개하기 전에 미수 선생의 학문을 소개하겠습니다.

미수 허목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물려받아 근기의 실학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수 선생은 사서(四書)나 주희의 전통 주자학보다는 시(詩)·서(書)·역(易)·예(禮)의 오경(五經)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는데요. 이를 통해서 미수 선생은 공리공론보다는 사회적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나중에 실학의 태동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수 선생은 사상적으로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미수 선생의 글씨는 어떨까요? 미수 허목 선생은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룬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에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서예의 최고 이상향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 미수 선생은 고문학을 공부하면서 고전체(古篆體)를 바탕으로 하여 떨리는 필획의 독특하고 ′기이한′ 전서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미수 허목 선생이 쓴 글씨 해동명필첩(海東名筆帖)에 수록된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이다.
한시를 전서로 쓴 독특한 작품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럼 미수 허목 선생이 쓴 글씨인 전서가 담긴 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개의 현판을 소개하고자 하는데요, 두루종택의 경류정과 하회마을의 충효당입니다.



경류정(慶流亭)


진성이씨 대종택인 두루종택의 모습과 경류정의 내부 모습


경류정(慶流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주하리에 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종택인 두루(주촌周村)종택 별당의 편액입니다. 경류정은 이연(李演, 1492~1561)이 만년에 두루종택 앞 200미터 떨어진 곳에 건립했다가 그의 손자 이정회(李庭檜)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경류’는 『주역』, 「곤괘 문언坤卦文言」에 “집안에서 쌓은 것이 선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치고, 쌓은 것이 선하지 못하면 재앙이 후세에 흐른다.[家之所積者 善則福慶 及於子孫 所積 不善則災殃 流於後世]”라고 한 데에서 취하였습니다. 한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경류의 의미를 「제경류정題慶流亭」이란 시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경류정」 3수 가운데 첫 번째 시입니다.

선이 쌓이면 원래 복과 경사 불어나는 법
몇 대 전한 인후함이 종파와 지파에 넘치네
그대에게 권하니 문호를 더욱 힘써 지키라
위씨 일가의 화수 모임을 매년 따르리라

善積由來福慶滋
幾傳仁厚衍宗支
勸君更勉持門戶
花樹韋家歲歲追


퇴계는 이 시를 통해 경류정 주인에게 선이 쌓이면 복과 경사가 넘쳐나니 문호를 정성껏 지켜주기를 당부하는 동시에 당나라 위씨(韋氏) 가족들이 꽃나무 아래에서 종친 간 화목을 다지려고 행한 전통적 가풍을 인용하여 위씨 집안처럼 종친 간 화목을 다지는 화수회를 해마다 따르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퇴계 선생이 쓴 편액과 미수 허목 선생이 쓴 편액 두 개가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미수의 친필입니다.


경류정慶流亭 / 42.2×85.3×5.8 / 전서(篆書) / 진성이씨 주촌문중(眞城李氏 周村門中)



충효당(忠孝堂)


서애 류성룡 종택의 전체 모습과 편액의 모습


충효당(忠孝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종택의 편액입니다. 서애의 증손 우눌재(愚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98)가 충효당을 증축한 뒤 당호의 편액를 충효라고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임종 직전에 자손들에게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가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라는 유언시를 남겼는데요. 류의하는 서애가 평소 강조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이라 하였습니다. 충효의 가치는 서애의 손자와 증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풍으로 형성되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졌습니다.


충효당忠孝堂 / 84.0x196.0x6.6 / 전서(篆書) / 풍산류씨 류성룡종택(豊山柳氏 柳成龍宗宅)


경류정과 충효당은 퇴계 이황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집에 있는 현판들인데요, 미수 허목의 글이 두 선생의 집에 있을까요? 미수 선생과 류성룡 선생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공부하였으며, 미수 선생이 두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수가 직접 그들의 편액에 글씨를 넣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보는 이황 선생과 류성룡 선생 모두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미수 허목 선생은 1595년에 태어났습니다. 양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세대이며 ‘조선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대적인 고민을 가지게 된 세대입니다. 자신이 찾는 답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사서 중심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자학(朱子學)을 따랐다면 미수 선생은 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하여 송시열 선생과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미수 선생은 이 과정에서 자신 만의 답을 찾았기 때문에 그의 특별한 전서체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편액 왜 봐야할까요? 미수 선생의 이야기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수 선생도 과거의 학문을 공부하며, 자신의 길을 찾았으며 나아갔습니다. 편액이란 글씨를 쓴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뜻을 담은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 시대의 편액을 보는 입장이 앞의 문장이라면, 지금 우리가 편액을 보는 입장은 어떠한가 한 번 고민을 해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으로 편액을 보고 있나요?

    고  :   한국의 편액 사이트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서당교육을 폐하고 신식교육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906-06

1906년 6월, 근래 상주에는 면마다 촌마다 학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상주군수 길영수란 사람이 학교 설립을 담당하는 관리를 현지에 며칠씩이나 유숙시키면서 학교시설을 독촉하였는데, 사람들이 응하지 않아 성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승지 벼슬을 지낸 정하묵이란 이는 스스로 중학교를 설립한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상주의 유약소에다가 소위 보조금이란 것을 냈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수만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상주의 유약소에서는 이를 거부하자는 통문을 돌리어 마침내 정하묵의 기도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정하묵이란 자는 ‘나는 지금까지 공맹의 학문에 속아왔는데, 이제야 크게 깨달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도 왕년에는 유학자로 자처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올해 들어 향교나 서당의 교육이 위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3월 각 읍마다 교육회를 설치한다는 칙령이 내렸는데, 앞으로는 모든 서원이나 서당의 교육은 교육회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대구시내에서는 구식 서당 선생을 내쫒았는데, 이후부터는 학당에서 글을 읽는 자가 없다고 한다. 또 안동향회에서는 이 새로운 교육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한다.

“서울에 여학당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8-08

1898년 8월, 박주대는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비로소 여학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독립협회가 연설회를 개최해 일반인들도 정치에 관해 연설을 할 수 있다는 소식도 놀라웠는데, 이제 여자들도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당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이 놀랍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학당의 당수는 완화군의 어머니인 이상궁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대궐 문 밖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임금께서 이들의 상소를 들어주겠다 비답을 내리셨다 하는데 당원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천하에 이와 같이 기괴하고 또 기괴한 일이 만고에 있었겠는가!
그 뒤에 여학당의 수가 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며, 그 형세가 매우 융성해졌다고 한다. 한편 그들이 올렸다는 상소를 뒤에 구하여 읽어보니, 첫째 여성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 줄 것, 둘째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쓰개치마를 없애 줄 것, 셋째 내외를 나누는 법을 없애줄 것, 넷째 남편이 고질병으로 신음할 때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가도록 허락해 줄 것 등이라고 한다.
아! 이 상소문을 읽어보니 세상의 말세가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앞의 세 항목이야 천 번 만 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마지막 고질병인 남편을 두고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세상에 남편 된 자로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예천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나들이, 《단원 풍속도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7-02

1897년 2월, 박주대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년 병신년 의병이 봉기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이 횡행하였으나, 이제 의병들은 해산하고 이들을 잡기 위한 군대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던 주상께서 드디어 궁궐로 환어하셨다고 한다. 근 몇 년간 조정도 마을도 모두 시끄러웠던 때에는 요즘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하였다. 이제 불운이 물러가고 태평한 운수가 오기를 기원해 보는 박주대였다.
그런데 근래 들어 예천 고을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안동이나 예안 일대에는 소매통이 넓은 옛 두루마기를 입는 사람이 많았다. 박주대 역시 옛 두루마기를 만들어 나들이옷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지 말라고 금지하였을 때에는 모두가 이 조치를 원망하였는데, 막상 의복은 입기 편한 대로 하라는 훈령이 떨어진 뒤로는 거의가 좁은 소매에 새털로 짠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박주대가 입은 넓은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심지어 양반 집안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심심치 않으니 괴이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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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일행, 이를 닦는 솔을 선물받다”

배삼익, 조천록, 1584-07-29 ~

배삼익 일행이 늦게 망룡교(莽龍橋)를 출발하여 장가점(章家店)ㆍ신점(新店)ㆍ칠가령(七家嶺)을 지나 칠가(七家)에 있는 유이(劉二)의 집에 유숙하였다. 유이가 이를 닦는 솔을 선물로 주었다.
다음날 오후에 대란하(大鸞河) 가에서 휴식을 하고 배로 양하(兩河)를 지나 저녁에 영평부(永平府) 남쪽 주희등(周希登)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양하 주변의 전답과 집들이 남김없이 침수되어 있었고 성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사망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을 수리하느라 목재를 수습해 가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무에 둥지를 틀고 거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본 것들이 너무도 참혹하니, 예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물난리는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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