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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이민자, 조선에 충효를 다하다
원주변씨 간재종택 ‘충효고가’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여섯 번째 이야기는 중국에서 고려로 이민을 오게 된 원주변씨(原州邊氏) 간재종택(簡齋宗宅)에 있는 편액인 ‘충효고가(忠孝古家)’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원주변씨는 중국 심양에서 무관직에 있던 변안열이 고려로 들어와 원주원씨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에 정착하였습니다. 변안열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워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 김저와 함께 죽었습니다. 후손들은 변안열을 시조로 하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변안열의 현손 부사직 변희예가 무오사화 때 동생과 함께 낙향하여 영주 화천에 정착하였다가 아들 변광이 안동 금계촌(현 서후면 금계리)에 살던 판서 권철경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금계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변광의 아들 동호 변영청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49년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 대구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변영청의 아들 변경장은 153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습니다.

변경장의 맏아들 변희일은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동생 변중일과 함께 가산을 털어 군량미 1백 섬을 마련하여 상주 진영으로 보내는 등 많은 공을 세워 관직을 받았습니다. 간재 변중일은 형 변희일과 함께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효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1686년(숙종 12) 충효각이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안동의 원주 변씨가 살고 있는 마을을 알아볼까요?

안동의 원주 변씨가 살고 있는 마을은 검제마을입니다. 간재종택과 간재정이 있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김성일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습니다. 금계리는 원주변씨, 의성김씨, 안동장씨의 집성마을입니다.

『영가지永嘉誌』에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옛날부터 ‘천년 패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했다. 사복정 배상지(裴尙志)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栢竹堂)이 있다.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판서 권예(權輗)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원주변씨 간재종택의 전경 (출처 : 한국의 편액 사이트)



간재종택은 변중일 후손의 살림집이자, 200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3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간재종택은 간재 변중일의 아호인 간재를 따 이름을 붙였습니다. 간재종택에는 ‘충효고가’라는 편액이 있습니다.


충효고가(忠孝古家) / 44.5x104.5x1.7 / 예서(隸書) / 원주변씨 간재종택(原州邊氏 簡齋宗宅)



변중일은 임진왜란 당시 80여 세의 조모가 노쇠하여 거동할 수 없었습니다. 왜구가 들이닥쳐 칼로 위협하자 변중일이 조모를 지켰습니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왜구들이 깃발 하나와 칼 한 자루를 그 집 문에 매달아 놓아 뒤따라오던 왜구들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조모가 별세하자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에서의 전투를 도왔으며 인조가 붕어하자 1년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효성과 충성을 겸비한 변중일에게 그의 사후인 1686년 정충효각(旌忠孝閣)이란 정려가 세워져 현존하고 있습니다.


정충효각(旌忠孝閣) (출처 : 네이버 블로그_옛문화답사회, 원주 변씨 간재종택,간재정)


충효고가라는 편액은 이 정려각에서 유래했습니다. 변중일은 만년에 간재정을 지어 임진왜란의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간재’의 간(簡)은 『논어』 「옹야」에서 “몸가짐을 경건히 하고서 대범하게 행사한다.[居敬而行簡]”에서 따왔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예서로 썼습니다.

변중일은 「간재기」를 지었는데, “내가 간(簡)에서 의미를 취하는 것은 예가 번중하고 화려한 것보다 간(簡)하여 질박한 것이 낫고 일이 번중하여 갖추어진 것보다는 간(簡)하여 정리된 것이 낫고 말이 번중하고 세련된 것 보다는 간(簡)하여 투박한 것이 낫다는 점 때문이다. 간(簡)은 중(中)에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오도(吾道)에 해가 되지는 않으며, 궁극적으로 편중되지 않고 중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니, ‘경에 자리하면서 간을 행한다.[居敬而行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하여 자신의 지향을 밝혔습니다.

이민자라는 주제에 맞추어 중국에서 넘어온 성씨 중에 하나인 원주변씨, 원주변씨와 간재종택에 있는 편액 ‘충효고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변안열은 이주자지만, 고려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후손들은 고려 말기에 고려로 들어온 변안열을 원주변씨의 시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은 조선의 임금에게 충을,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으로 효를 다하였습니다.

특히 변중일은 충과 효를 다하였기 때문에 정충효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자였던 그들은 한반도의 원주민 못지않게,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인 고려와 조선에 충성을, 그리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변안열과 그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의 훌륭한 백성이었습니다.

    고  :   한국의 편액 사이트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최참봉 일가가 피난을 오다”

오희문, 쇄미록, 1597-09-17 ~

1597년 9월 17일, 오늘 저녁 오희문의 집에 참봉 최형의 온 집안 식구들이 찾아왔다. 최형의 4남매를 비롯하여 25명의 식구들과 소와 말 7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전란을 피하여 피난을 온 것이라 한다. 강원도로 오긴 했는데, 달리 머물 곳이 없어서 오희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지인이라 우선 아들 윤해의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윤해의 집에는 윤해의 장모가 머물고 있었는데, 우선 오희문의 집으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오희문의 집에는 오희문의 어머니와 윤해의 장모가 와 있어, 식사는 쌀 1말과 반찬거리를 윤해의 집으로 보내서 거기서 밥을 지어 대접하도록 하였다. 마침 집에 술이 1병 있어서 이걸 가지고 최참봉을 대접하였다.

“배고픔에 처자식을 길에 버리다”

오희문, 쇄미록, 1593-07-15 ~

1593년 7월 15일, 오희문은 일가를 데리고 전라도로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고부군 앞을 지나는데, 문득 길가의 좌우를 둘러보니 밭과 들이 모두 절반이나 황폐해 져 있었다. 비록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린 곳도 간간히 있었으나 모두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땅에는 호미로 김매기를 한 흔적도 있었으나, 이미 7월 중순인데도 자란 것이 겨우 두어 치 높이에 불과하였다. 호남은 예부터 넓은 들판으로 조선 제일의 곡식 생산지였는데, 이제 천리나 되는 기름진 들판이 거친 풀로만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올해와 내년 굶주린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할지 벌써부터 큰 걱정이었다. 아마 내년이 오기 전에 시체들이 구덩이를 가득 메울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걱정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길가에 7-8세 가량 된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여인도 한명 있었는데, 그 역시 길가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니, 여인의 말이 남편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곤 우리 모자는 장차 굶어죽게 되었다며 슬픈 목소리로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으니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요,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로 비록 짐승이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심지어 사람의 탈을 쓰고 처자식을 길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다니! 그 배고픔이 얼마나 컸으면 어찌 이런 지극히 괴이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정녕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이러한 배고픔으로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를 것인가! 오희문은 울고 있는 모자를 쳐다보며 거듭 탄식이 배어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무주에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서 지례읍으로 향해 오다”

여중룡, 갑오병신일기

1894년 10월 어느날, 여중룡은 난리를 피하여 지례읍(知禮邑)에 들어가서 친척인 호운(湖雲)과 같은 집에 있다가 10월 11일에 식구를 다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한편, 무주(茂朱)의 동학도는 계속 존속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을의 수령이 대구부(大邱府)에서 병사 20명을 청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막을 채비를 갖추었다. 어느날 보니 무주 근방의 동학군이 정황을 살펴보니 몇 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지례읍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서 포수와 창잡이를 보냈다.

“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 ⓒ독립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15 ~ 1911-01-24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이역만리에서의 고깃국 파티”

김대락, 백하일기, 1911-06-22 ~

김대락과 그 가족들은 이역타국의 삶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넉넉한 식량이 없어서도 잘 먹지 못해서이지만, 타국의 낯선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 적도 많았다. 1911년 6월 22일, 김대락의 식솔들이 청나라 사람의 집에서 개를 한 마리 사왔다. 개의 가격은 중국돈으로 7각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조선에서 쓰던 돈으로 환산해보니 2냥8전이었다. 매우 싼 가격이다. 중국은 물가가 모두 비쌌는데, 이것은 매우 쌌다. 이것이 이렇게 싼 이유는 청나라 사람들은 개를 즐겨 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침 신흥강습소 기숙사에서 황서방(황병일)이 왔다. 마침 개장국이 있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이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조선의 방식으로 개장국을 끓여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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