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사행단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구전苟全 김중청을 기리는
반천정사

학창시절에는 배낭하나 달랑 메고, 떠나는 유럽여행을 꿈꾼다.
조선시대 경북북부 인근에도 국외로 떠난 이가 있었을까?

안동과 가까운 곳, 봉화의 반천정사 · 반천서원은
구전 김중청을 기리는 곳이다.


반천정사
크기 : 52*160cm, 자체 : 해서, 기탁 : 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직선적이며 간결한 필치가 당당한 기풍을 연출하고 있는 가운데,
자체가 보편적인 글씨에 비해 다소 길어 훤칠한 맛을 더하고 있다.



반천서원
크기 : 43.5*134cm, 자체 : 해서, 기탁 : 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해서체로 각인된 편액은
색칠이나 장식도 없이 나무 위 돋음뿐이다.
그래서 정직함이 더욱 돋보인다.
반천정사의 글씨가 훤칠하여 한 눈에 알아보기 쉽다면,
반천서원의 글씨는 먹을 무겁게 머금은 듯, 획이 두터워 눈길을 오래 가게 한다.

‘반천(般泉)’이란 『시경時經』 「위풍고반衛風考槃」의
‘산골짜기 시냇가에 움막을 이룩하니 어진 은자의 마음은 넓도다’에서 나온 말이다.

‘반천정사’는 반천서원의 전신으로 안동김씨 구전종택에 보관되어 있던 편액이다.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1567~162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봉화 유림에서 건립하였다.
김중청은 보백당 김계행의 후손으로, 월천 조목에게 사사하였다.
조목(1524~1606)은 이황 문하의 제자로,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셨으며, 임종을 지킨 사람이었다.

김중청과 사행단에 관련한 이야기는 ‘스토리테마파크’에서도 꽤 살펴볼 수 있다.

김중청은 문한으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사행단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행단은 현대에서 보자면,
해외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한국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


반천서원_구미당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본관은 안동이다.
안동김씨는 안동지역의 재지세력으로 김선평이 시조이다.
김선평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군을 고창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대광의 품계를 받았다.

그의 후손 김득우가 고려말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 명성을 확장시켰고,
조선전기 보백당 김계행이 ‘청백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였다.
김계행의 극례는 봉화의 입향조가 되었으며,
극례의 손자 눌암 김정헌이 퇴계학을 수용,
정헌의 손자 구전 김중청이 퇴계의 문인인
조목과 정구에게 수학하여 큰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김중청의 묘소


김중청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봉화의병장 류종개의 휘하에서 참모로 종군하였다.
전쟁이 종식된 후 조목과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10년 급제했으며, 문한으로서의 능력을 크게 인정받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명에 갔다가 이듬해 1월에 귀국하였다.

당시 사절의 정사는 허균이었다.
당시의 여행을 적은 「조천록」이 문집의 권8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신으로 출발할 때
당시의 명사로부터 증여받은 시문을 장첩한 『부경별장』3책이 현존하고 있다.

김중청은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자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당시 김중청에 대한 평가는 “경학의 정수는 월천에게 전해 받았고,
문장의 온간함은 소고를 본받았고, 예학의 순수함은 한강에게 물려받았다”할 정도로 높았다.


김중청의 친필


구전집 ▶


『구전집(苟全集)』은 김중청(金中淸, 1567-1629)의 문집으로 8권 4책이다.
권8에는 조천일록(朝天日錄)이 실려 있다.
조천일록은 1614년 조천사(朝天使) 허균(許筠)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갔을 때 일을 적은 기록이다.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장관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연경에 가서 황제에게 생일축하의 인사와 선물을 전달하고,
6개월간의 먼 여정 길을 마치고 이듬해(1615년) 1월 11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경에 있는 동안 그곳의 풍속과 정세도 함께 언급하고 있어
당시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김중청은 봉화의 반은동에 서실을 짓고, 83명에 달하는 제자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이 계승되어 퇴계학의 한 갈래를 이루었다.
김중청 사후 1669(현종 10)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한 봉화의 사림들과 문인들은
반은동 서재 아래 반천정사를 건립하고 김중청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831(순조 31) 반천서원으로 승객되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   유교넷(http://www.ugyo.net)  
                   전통과 기록(http://portal.ugyo.net)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   김효은 (한국국학진흥원)

“청나라 새 황제에 대하여 묻다”

옹정제 (출처: 위키백과) 황정, 계묘연행록, 1723-10-10 ~

1723년 10월 10일, 황정은 요동에 있었다. 사행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신요동이란 곳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는데, 추운 날씨에 객사의 온돌이 따뜻하지 않아 민가를 찾아 유숙하였다.
그런데 민가의 주인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역관을 통해서 이번에 새로 등극한 황제가 새로운 정치를 시행하면서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이 그전 황제에 비하여 나은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사행단의 역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나라 황제의 정치 시행에 관한 것인데 어찌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묻는가?”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황제가 계신 북경에서 오신 길이시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역관이 대답하였다.
“먼저 황제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 새로 등극한 황제는 오직 은자(銀子)만 아끼고 좋아한다 합니다”
황정은 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비록 변방의 늙은이라고 하나, 새로운 황제에 대한 인상이 이러하니, 새로운 황제가 탐욕이 많고 어질지 않음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면서 태국 사신들을 보다”

1860년 자금성의 정문 – 오문(午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1-12-29 ~

1801년 12월 29일, 이기헌(李基憲)은 사신단의 서장관 신분으로 명나라 수도에 와 있었다. 한 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오늘, 조선의 사행단은 오문 밖 조방에서 황제의 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오늘 태묘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겠다고 하여서, 궁을 떠나는 황제를 전송하기 위해 명나라의 관료들과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는데, 황색 지붕을 얹은 작은 가마를 타고 있어서 실제 황제의 용안을 보지는 못하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황제의 의장물은 매우 간단하였다.
황제의 어가는 오랫동안 머물면서 신료들을 돌아보다가, 태국에서 온 사신들을 지나쳐 갔다. 그는 아래 반열에 자리한 채로 어가를 맞이하고 서 있었다. 이기헌은 태국 사신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입은 조복(朝服)을 보니 얼룩얼룩한 무늬의 비단에 소매가 없는 긴 도포를 입었고, 쓰고 있는 관은 반자쯤 되는 길이에 동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하여 그 형태가 마치 뿔과 같았다. 머리카락은 자르고 땋아 내리지 않았다. 조회를 마치고 태국 사신들에게 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사석에서는 의관이나 허리띠, 신발 모두 청나라의 제도를 따르지만, 조회를 하고 어가를 맞이할 때에는 본국의 의관을 따른다고 한다.

“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미상, 계산기정, 1804-01-24 ~
왕자정(王柘庭)ㆍ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으로 갔는데, 경암(絅菴)과 추양(秋陽)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 및 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입니까?” 했다.

“청나라의 조참례에 참여하다”

1901년 자금성의 정문 – 단문(端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9-25 ~

1662년 9월 25일, 정태화(鄭太和)는 아침 일찍부터 자금성으로 갔다. 오늘은 청나라 조정의 조참(朝參)례가 있는 날이었는데, 조선 사신도 여기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 일행은 자금성의 승천문을 경유하여 오문을 지나 단문 밖에 이르렀다. 단문 안으로 들어가 서반의 앞 행렬 끝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울리면서 황제가 등장하였다. 3번의 호령소리가 울리더니 황제가 용상에 앉았다. 청나라 관리들 중에서 새로 관직을 제수 받은 사람과 새로 상을 받게 된 사람들이 뜰의 동서로 나누어서 북쪽을 향해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나서 각각 자기의 반열로 돌아갔다.
홍로시 관원들이 청나라에 들어온 사신 일행을 이끌고 다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는데, 정태화의 일행도 이에 참석하였다. 례를 마치자 정사와 부사, 서장관 3명의 사람을 인도하여 황제가 있는 황극전의 계단 위로 올라가게 하여 서쪽 기둥 밖에 앉게 하였다.

“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황중윤, 서정일록, 1620-05-10 ~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