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전 세계로 확산된,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2월 23일자로 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에서 코로나19 감염병 위기경보를 ‘심각’단계로 조정하였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 있는 교민 등을 전세기로 귀국시키고, 아산 · 진천에 격리 조치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했을까?
성재일기의 금난수는 16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겪었던 다양한 질병의 증상과 실제 치료법을 기록하였다.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여러 번 피우소를 바꾸어가면서 피접했는데, 재사와 서재, 노비의 집과 산속 사찰이나 암자 등을 임시 거처로 삼는 양상도 기록되었다.
장흥효의 경당일기에도 전염병으로, 뾰족한 방법이 없어 도망다니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특히, 피접의 장소로 정자를 많이 이용하였다.
고산정이 그러했다.
금난수가 청량산 암벽 옆에 지은 정자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의 제자인 성성재 금난수의 정자이다. 내부에는 퇴계의 시와 주인의 시 등이 게판되어 있다. 정자는 청량산의 남쪽 끝자락에서 외병산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가송협의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절경을 이루고 있는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있다.
고산정은 도산구곡 중 8곡인 고산곡에 있다. 가송협이라고도 하며, 안동과 봉화의 접경인 가송리에 있는 협곡이다. 고산정은 외병대 절벽 아래에 있다. 정자 안에서 보이는 강 건너 절벽이 내병대이고, 마주보이는 산이 고산, 독산이다. 정자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집인데, 강물이 넘어오지 못하게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우측 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 방은 뒤쪽의 1칸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결국 마루가 ‘ㄱ’자형으로 깔리게 되었다.
전면과 양 측면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는데,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정자 앞에는 강 쪽으로 기운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고산정의 주인은 이황의 제자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년 ~ 1604)다. 본관은 봉화.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1563년 지을 당시는 일동정사와 고산정을 함께 사용했다.
그의 연보에는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 선생은 항상 경전을 끼고 들어가 머물었는데,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 곳은 푸른 절벽이 치솟아 있고, 고산과 대치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징담이 있어서 작은 배를 갖추고 위 아래로 노닐며 흥취를 돋울 수 있으니, 낙동강의 명승 중 한 곳이다.” 적혀 있다.
이황은 청량산을 매우 사랑하여 ‘우리 집안 산(吾家山)이라 할 정도로 자주 다녔는데, 청량산을 가던 길에 제자의 정자인 고산정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편의 시도 남겼는데 그 중에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같은 시는 이황이 고산정에서 쓴 시다. 또 성성재(惺惺齋) 편액과 고산별업(孤山別業)편액도 써주었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 ‘서고산벽(書孤山壁)’ 이황의 詩
고산정의 편액이다.
고산정, 116.0*52.0 퇴계 이황의 제자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 1530∼1604)가 성리학에 잠심하면서 산수를 사랑하여 지은 정자이다. 이황은 특히 금란수를 아껴 자주 왕래하며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고산에 노닐며’ , ‘고산에서 금문원을 보고’ 등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고산정은 현재 도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넘치는 힘과 박력으로 절로 신이 나며 그렇다고 무겁지만도 않은 편안함이 있다. 금난수는 본관이 봉화(奉化)이고,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齊)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제릉참봉, 장예원사평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그 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고향에서 청량산의 일동에 고산정을 짓고 학문에 힘썼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다.
고산정에 걸려 있던 금난수(琴蘭秀 ; 1530∼1604)의 시판으로, 제목은 ‘고산정에서 노닐다(遊孤山)’이다.
이 시의 운에 따라 퇴계가 답시를 쓰기도 했는데 ‘유고산’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 해의 가운데에 천지 만물이 모두 돌아오니
사계절이 좋은 흥취는 어긋남이 없구나.
붉은 꽃이 다 떨어지면 푸른 녹음 우거지고
노란 낙엽 표표히 떨어진 뒤엔 흰 눈이 날리네.
사암(砂巖) 절벽에 바람 일면 겹옷을 입고
긴 냇가에서 비를 만나면 도롱이를 걸치리.
그 가운데 별도의 풍류가 남아 있으니
취한 채 찬바람 맞으며 밝은 달을 희롱하네.
퇴계 이황은 제자 금난수가 거처한 고산정에 자주 왕래하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이 시는 이황이 금난수의 유고산(遊孤山) 시의 운을 빌려 지은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슬살이 아닌데 돌아올 줄 왜 모르나
안개와 노을을 차지하니 떠나기가 싫은 게지.
땅은 멀리 있어도 갈아 일굴 묵정밭이 넉넉하고
산 외지니 학이 와 깃들기에 알맞도다.
사철에 오고 가니 두 짝의 짚신이오
영고성쇠를 한 벌의 덩굴 옷에 부치었네.
일동·월담 좋은 이름 내 역시 사랑하노니
이따금 그대 찾아 남은 빛을 구경함세.
청량산(淸凉山)은 산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나귀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경우나 질박한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머무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산과는 매우 다르다. 금난수는 정미년(1547년, 명종 2년) 봄에 이 산을 두루 거치며 들어가 본 뒤에야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기유년(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이비원(李庇遠), 이임중(李任仲)과 함께 산에 들어가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다. 구경서(具景瑞), 윤이직(尹而直), 권자반(權子胖), 김대보(金大寶)가 이미 이 암자에 우거하고 있어서 날마다 구경서 등 여러 사람과 서로 모여서 독서한 것을 강론하였다. 경술년(1550년, 명종 5년) 봄에 또 이 암자에 묵었다. 신해년(1551년, 명종 6년) 음력 7월에 또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는데, 퇴계(退溪) 선생께서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주셨다. 임자년(1552년, 명종 7년) 여름 6월에 산에 들어가 홀로 안중암(安中庵)에서 한 달을 머물고는 만월암(滿月庵)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한 달 쯤 지나 안중암으로 돌아왔다. 병진년(1556년, 명종 8년) 여름에 다시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다가 금강굴(金剛窟)로 거처를 옮기고 한 달을 머물렀다. 정사년(1557년, 명종 8년) 겨울에 구여응(具汝膺)과 함께 산에 들어가 여응은 문수암(文殊庵)에 머물고 금난수 홀로 이 암자(보현암)에 묵었다. 무오년(1558년, 명종 9년) 겨울에 또 이인중(李仁仲) 삼형제와 함께 산에 들어가 세 사람은 문수암에 묵었고 금난수는 또 이 암자에 묵었다. 갑자년(1564년, 명종 19년) 정월에 두 아들 경(憬)과 업(忄/業)을 데리고 문수암에 묵었다가 금생굴(金生窟), 대승암(大乘庵), 중대암(中臺庵), 별실암(別室庵) 등으로 옮겨가며 묵었다. 대개 정미년부터 지금 갑자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이 산을 다녀간 것이 열두세 번이 된다. 예전에 지은 시들을 더듬어 보니 이미 지나간 흔적이 되어버렸고, 이비원, 이임중, 이인중은 모두 고인이 되었으니, 또한 그 감회를 금할 수 없다. 그 가운데 더욱 부끄럽고 가슴 아픈 것은 산에 들어 갈 때에는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고 책상에서 책을 보며 몸과 마음을 정리하여 본원(本源)을 함양해서 뒷날에 도를 받아들이는 바탕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다른 세속의 업무에 휘둘리거나 일 때문에 곧장 산을 나와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산문(山門)을 나서자마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사물의 끝없는 변화를 만나게 되자 마침내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조금 얻은 것도 함께 다 잃어버려, 모든 언행(言行)에 있어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도리어 세상 속에 빠져 사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헤매고 있으니 끝내 소인이 되어버림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로써 사람이 수양하는 것은 학업에 힘씀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처해 있는 곳의 시끄럽고 조용한 것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았다. 뒷날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금난수를 보고 경계로 삼으라.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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