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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국문소설의 시발점이 되다,
쾌재정(快哉亭)

10월 9일 한글날은 한글이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만들어진 국경일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주도해 창의적으로 만든 문자로서, 유네스코는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해 1997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든 목적과 창제원리 등을 설명한 일종의 해설서입니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누가, 어떻게 한글을 사용했을까요? 당시 세종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인 한문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쓰여진 한글 서적은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씨 부인이 쓴 한글요리서인 음식디미방, 영남지방 여성들의 집단문학인 내방가사 등 남녀불문하고 다양한 작가와 장르가 남아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한글소설로 만들어져 백성들이 향유하게 된 『설공찬전(薛公瓚傳)』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재인식하고 작품 내용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상주시 이안면에 위치하는 ‘쾌재정(快哉亭)‘은 난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가 만년에 『설공찬전』을 지은 곳입니다. ‘쾌재’는 속세(俗世)의 시비(是非)와 영욕(榮辱)을 벗어나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조선 문자시대라는 주제를 맞이하여 『설공찬전』을 쓴 조선의 문장가인 난재 채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 되다, 난재 채수



난재 채수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임호서원


채수(蔡壽)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이며, 남양 부사(南陽府使) 채신보(蔡申保)의 아들입니다. 그는 1469년(예종 1)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거친 중종반정 정국공신입니다.

채수는 젊은 시절부터 총명한 두뇌를 자랑했습니다. 19세 되던 1466년(세조 12) 가을에 성균관의 생원·진사 두 시험에 모두 합격했습니다. 20세에는 회시(會試)의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진사는 1등, 생원 역시 상위의 성적이었습니다. 1469년(예종 1) 21세 되던 해 8월 증광 관시(增廣館試)에서 장원하고 9월에 회시, 11월 전시(殿試) 갑과(甲科)에 각각 수석 급제하였습니다. 관시·회시·전시에 연달아 수석급제한 일은 조선 개국 이래 이석형(李石亨, 1415~1477)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합니다. 채수의 학문적인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재 채수의 신도비


난재 채수의 신도비


앞서 채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도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폭군 정치를 한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나기 전날 밤, 채수는 반정무리와 동참하기 원하지 않았지만 사위 김감은 그를 만취시켜 반정이 한창인 궁궐 내부에 데려다 놓고 사라졌고, 다음 날 아침 궁 안에서 눈을 뜬 채수는 공신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반정공신의 일원으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후배들과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부끄러워하여 벼슬을 버리고 상주로 낙향하니 그의 나이 58세였습니다.


전 계층에게 소설을 보급하다, 『설공찬전(薛公瓚傳)』



채수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쾌재정’에서 지은 소설 『설공찬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설공찬전』은 한문 원작이 발표되자 이것이 한문으로 필사되어 유통되는 것은 물론, 국문으로도 번역되어 경향 각지에서 읽혔습니다. 채수가 번역했는지 남이 번역했는지는 모르지만, 한문도 알고 한글도 아는 누군가가, 그 내용을 혼자 읽고 말기에는 아쉬워 부녀자 또는 국문 해독층을 위해 국문으로 번역했을 것입니다. 국문본 『설공찬전』이 등장함으로써 『설공찬전』을 향유하는 계층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죽음과 귀신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주제가 생소할 수 있으나 그의 일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수는 17세 때 부친을 따라 경산(慶山)에 갔는데, 그때 밤에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희미한 것이 있어 가보니 둥글기가 마치 수레바퀴와 같았는데, 거기 닿은 막내 동생이 급사하였지만 채수는 접촉되었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신비체험은 유교를 공부하던 채수의 귀신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설공찬전(薛公瓚傳)』(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설공찬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습니다. 어느 날 설공찬 누나의 귀신이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설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듭니다. 설충수가 주술사인 김석산을 불러다 귀신을 퇴치하려 하자, 혼령은 동생인 설공찬을 데려오겠다며 물러갑니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합니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설공찬은 설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설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줍니다. 설공찬이 사촌동생들을 불러오게 하였고, 이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입니다. 저승에 간 귀신들 가운데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하며 지내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알려줍니다. 이승에서 임금이라도 반역해서 왕권을 차지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습니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설공찬의 귀신과 저승이야기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입니다. 소설 속에선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언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합니다. 또한 '이승에서 여자여도 글만 할 줄 알면 저승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다'며 저승에서는 남존여비가 없음을 전하고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전체적으로 귀신과 저승을 소재로 활용하고 당시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적절히 배합,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반정에 가담했던 세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귀신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세(俗世)의 시비(是非)와 영욕(榮辱)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다, 쾌재정(快哉亭)



쾌재정


쾌재정


‘쾌재정’은 채수가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설공찬전』을 지었던 곳입니다.

‘쾌재’는 ‘속세(俗世)의 시비(是非)와 영욕(榮辱)을 벗어나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라는 의미입니다. 채수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성종, 연산군 등의 시기에 벼슬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정자의 시를 보면 그가 왜 정자 이름을 ‘쾌재’라고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늙은 내 나이 금년에 예순여섯老我年今六十六
지난 일 생각하니 모두가 아득 키만因思往事意茫然
소년 시절 재주는 겨룰 사람 없었고少年才藝期無敵
중년에는 공명 또한 홀로 뛰어났지中歲功名亦獨賢
빨리 가는 세월 노끈으로 매기 어렵고光陰衮衮繩難繫
청운의 길 아득한데 말 걸음은 제자리라雲路悠悠馬不前
어찌하면 티끌세상의 일 다 던져버리고何似盡抛塵世事
봉래산 정상에서 신선과 벗이 될꼬蓬萊頂上伴神仙


정자 이름을 ‘쾌재’라고 지은 것은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채수가 상주로 내려와 은거하고 있지만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함에서 오는 한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설공찬전』을 짓고 백성들에게 보급하여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쾌재’는 채수가 꿈꾸는 세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창시하던 한글은 양반보다 일반 백성들이 사용했습니다. 중국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자와 한문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문자입니다. 이에 양반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활용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시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랐습니다. 채수가 지은 소설 『설공찬전』은 백성들에게 하고픈 말을 소설화하여 나라를 올바르게 하고픈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창작물입니다. 작품의 원작은 한문이지만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불합당한 정세를 백성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한글을 활용하는 모습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시했다는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글로 번역되어 전 계층이 향유하게 된 『설공찬전』을 지은 곳으로 알려진 ‘쾌재정’ 이야기는 다가오는 한글날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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