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산비는 자기 방에 배를 깔고 누워서 세책방에서 빌려온 언문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읽다가 아버지 오달현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집에 오는 경우는 일절 없었던 일이었다.
오달현은 나이 마흔에 늦둥이로 산비를 낳았고, 쉰에 급제하여 덕종의 능인 경릉의 능참봉이 되었다. 종9품의, 그야말로 미관말직이었지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까지 했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능참봉에 있은 지 2년 만에 교체되어버리고는 다시 관직을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대문 문턱이 닳도록 도성을 들락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네, 아버지!”
산비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빨리 연다고 연 것인데, 어느 틈에 오달현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됐다! 됐어!”
오달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뭐가 됐다는 말씀이세요?”
“됐다! 내가 현감이 되었다.”
그 말에 산비가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그게 참말이십니까? 현감이라고요?”
현감은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는 가장 낮은 종6품의 벼슬이지만 종9품이었던 오달현이 종6품의 지방관이 되었으니 파격 승진인 셈이었다.
온양군 관아의 동헌(東軒)(출처: 문화재청)
“네 어머니의 외가가 장동 김씨 집안인 것은 알고 있지?”
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5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나마 평생 꿈이었던 남편의 급제를 보고 돌아가신 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계속 통지를 넣어서 한 번 뵙기만 해달라고 청했는데, 지난달에 간신히 존안을 뵐 수 있었지.”
“뉘를 뵈었단 말씀이십니까?”
“이조정랑 자리에 계신 김병연 나리를 뵈었단다.”
이조정랑은 정5품 벼슬로 품계는 높지 않지만 문관의 인사를 총괄하는 자리라 권력이 막강한 자리였다. 오달현은 그 이조정랑에게 크게 뇌물을 써서 현감 자리를 따낸 것이었다. 장동 김씨는 본래 안동 김씨인데, 현 왕비의 친정 가문으로 크게 세도를 떨치고 있었기에 그들의 연줄만 잘 타면 지방 현감 자리 하나를 받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산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임지는 어디입니까?”
“다음 달 보름까지 포천으로 가야 한다.”
산비는 포천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먼 곳입니까?”
“그리 멀진 않다. 고양에서 양주를 거치면 바로 포천이니까. 거기서 한양은 여기서 한양 가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서대문으로 가지만, 거기선 동대문으로 가면 된다.”
“다음 달 보름이면 엄청 바쁘겠네요.”
“그래. 그것도 그거지만, 좀 앉아라. 내가 할 말이 있다.”
『포천군읍지』의 포천군 지도(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오달현은 산비를 방안에 앉히고 자신도 도포를 걷으며 자리에 앉았다.
“너도 이제 나이가 다 차가는데, 과년한 딸을 홀로 남겨두고 가기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산비가 이 무슨 억울한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오달현을 바라보았다.
“이를 말씀입니까? 소녀가 당연히 따라가야죠.”
딸바보인 오달현의 입 끝이 실룩 움직였다. 조선 초에는 수령이 가족을 임지로 데려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가족을 데려가도 괜찮았으니 딸이 가겠다고만 한다면 데려갈 수 있었다.
“음, 음, 네가 괜찮다면야 나도 상관은 없지만…”
“없지만요?”
“그렇다고 이 집을 하인들에게 맡길 수도 없지 않느냐?”
“아버지께서 새로 혼인을 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파주에 있는 다섯째 삼촌네 둘째를 양자로 들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오라버니가 이제 곧 혼인도 해야 할 나이이니 우리가 양자로 들인다고 하면 다섯째 삼촌도 좋아하실 겁니다. 또 우리는 집을 돌볼 사람을 얻게 되고요.”
오달현의 얼굴이 확 펴졌다.
“오호라, 그런 수가 있었구나. 그래, 그럼 빨리 편지를 써서…”
산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어디 편지로 될 일입니까? 직접 다녀오셔야 합니다. 가실 때 파주 큰댁에도 통지를 보내셔야하고요. 포천 현감 행차이니까요.”
오달현은 이번에는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다. 이제 종6품 포천 현감이다. 이만한 벼슬을 한 사람이 집안에 없었으니, 파주 본가에 행차하여 자랑을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산비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오달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응? 뭐, 뭐냐?”
산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대체 돈은 얼마나 찔러 넣으신 겁니까?”
“어흠. 도, 돈이라니, 그, 그게 어디 그런 거냐? 나라의 관직은... 다 내 인품을 보고 그, 저, 수령의 직책을 감당하, 할 만하다고 보신 거지.”
“수령의 직책이라… 그럼 수령7사(守令七事)는 외우고 계시겠죠?”
수령7사라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났다. 오달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내 파주에 다녀오마.”
달포의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포천에 부임하게 된 날은 4월 보름이었다. 포천을 향해 가던 중에 양주에서 포천 관아의 아전들을 만났다. 이들은 신임 사또 신영례(新迎禮)를 위해 머물고 있었다. 이방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올리고 포천현의 중기(重記)를 올렸다. 중기는 현의 재정 관련 문서이다. 또 향리와 군교, 관노의 명단인 삼반관안(三班官案)을 올렸다. 오달현은 받고 바로 옆으로 밀어놓았다.
“이건 관아에 도착한 뒤에 살펴보겠다.”
이방이 말했다.
“관안에 오른 이름 중에 피휘(避諱) 할 이름이 있으면 어찌 할까요?”
오달현의 안색이 굳었다. 피휘는 임금님 이름자에나 하는 거 아니었던가? 왜 이런 걸 묻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산비의 목소리였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한 글자를 고치도록 하되, 한 글자만 같은 경우는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 됩니다.”
오달현이 냉큼 말을 받아서 되풀이하자 이방이 고개를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하룻밤 양주에서 머문 뒤에 다음날 포천 관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산비는 아버지의 사또 생활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비는 사또 업무를 보는 동안 아버지가 분명히 뭔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니 옆에서 보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뻥 뚫린 대청마루에 수령이 앉을 자리가 있으니 따로 아버지에게 귀띔하게 숨을 곳이 없었다. 안채를 둘러보던 산비는 병풍이 있는 것을 보고 그걸 꺼내 동헌 의자 뒤에 펼치게 했다. 그 뒤에 앉아 있으면 바깥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병풍(출처: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
“동헌 마루에 웬 병풍이냐? 치워라.”
오달현은 병풍을 가져온 관노 둘에게 당장 치우라고 명을 내렸다. 산비가 얼른 뛰어가 귓속말을 했다.
“소녀가 아버지 일이 궁금해 뒤에 몰래 앉아 있으려고 놓게 한 것입니다.”
“어허, 그게 무슨 망발이냐? 나랏일을 하는데 아녀자가 어찌.”
산비가 입을 샐쭉댔다.
“그렇게 나오시면 소녀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달현은 입을 딱 벌렸다. 딸바보인 아버지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하루만 있어 보면 지루하기만 한 일이라는 걸 알 테니 다시 나온단 소리는 안 할 것이다. 오달현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했다.
그날 향교에서 온 학장(學長)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향교에는 본래 나라에서 교수(종6품)를 보내주어야 하나, 지방 향교에 오기를 꺼려 하는 경우가 많아 그 지역의 진사나 생원 중에 임명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나마도 찾을 수 없으면 그저 그 지역에서 명망이 있는 집안사람을 임명하였다. 포천 향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침 타지에서 온 선비가 글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학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새 현감이 왔다는 말에 냉큼 달려온 것이었다.
“향교에 귀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장의 말에 오달현이 깜짝 놀랐다.
“귀신이오?”
“밤마다 애기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여인이 구슬피 우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들리는데,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대체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소인이 학장으로 부임한지 이제 달포인데, 한 열흘쯤 전부터 그러고 있습니다.”
“소리는 어디서 납니까?”
“참으로 민망하게도 대성전 쪽에서 나고 있습니다.”
대성전은 제향을 올리는 신성한 곳이다. 그런 곳에 귀신이 나타난다니 참으로 큰일이었다.
“매일 밤 그러합니까?”
“매일 밤 그러합니다.”
“어허, 그 소리가 애기 울음소리 같다고요?”
“네, 애기가 애타게 어미를 찾는 소리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임하기 오래전에 대성전 뒤편에서 애기가 죽은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뭐라고요? 어찌 그런 일이?”
“전모는 정확지 않습니다만, 누군가 사통하여 낳은 아기를 그곳에 버려두었는데 그만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 소인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만.”
“그, 그럼 그 애기의 원혼이… 어허, 대성전에 원혼 굿을 올릴 수도 없고… 어허… 이것 참.”
귀신을 내쫓으려면 굿을 해야 하는데, 하필 그 장소가 유학을 가르치는 향교에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이라니 그런 곳에서 굿을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달현이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허’ 소리만 연발하는데 뒤쪽에서 작게 똑똑 소리가 들렸다.
“아…내 잠시 생각을 정리할 터이니, 일단 물러가 있으시오.”
강릉향교 대성전(출처: 문화재청)
이렇게 학장을 물리친 뒤 오달현이 냉큼 병풍 옆에 가 섰다. 산비가 작게 말했다.
“현장을 가보자고 하십시오. 대성전 주위를 둘러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우선 현장을 봐야지. 내 어찌 그 생각을 못 했을꼬.”
이렇게 해서 오달현은 이방, 병방, 형방까지 대동하고 학장과 함께 향교로 향했다. 물론 향교 구경을 하고 싶다는 딸 산비도 함께였다.
대성전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일행은 명륜당에 모여 한담을 나누었는데 산비는 거기는 따라가지 않았다. 몸종 향월이와 함께 대성전 뒤쪽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있었구나. 향월아, 저것 집어와라.”
향월이가 산비가 가리킨 물건을 집어왔다. 살짝 금이 간 접시였다. 산비는 향월이가 받쳐 든 접시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으, 비린내. 도로 가져다 놓아라.”
산비는 명륜당 쪽으로는 가지 않고 향교의 유생들이 머무는 쪽으로 내려갔다.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동재는 상급 유생이, 서재는 하급 유생이 머문다. 산비가 향한 곳은 서재였다. 한 유생이 밖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산비가 오는 것을 보고 후다닥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산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륜당으로 올라가 손짓으로 오달현을 불러냈다. 귓속말을 하자 오달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가 펴지더니, 금방 웃음이 떠올랐다.
오달현이 명륜당 앞에 서서 말했다.
“자, 수수께끼가 다 풀렸소. 다들 따라오시오.”
사람들은 난데없는 수수께끼 소리에 어리둥절했지만, 현감이 따라오라는데 아니 갈 수는 없었다. 오달현은 향월이가 도로 가져다 놓은 접시 앞에 멈춰 섰다.
“저 접시가 보이시오?”
“보입니다.”
“접시의 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소이다. 서재에 머무는 유생 중에 누군가가 자기 집 고양이를 데리고 온 것이오. 대성전 위의 저 나무들 사이에 고양이가 있을 것이오.”
“고양이가 애기 소리를 낸단 말씀입니까?”
“날이 따뜻해진 이 맘 때가 되면 고양이가 발정기를 맞아서 온갖 구애의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애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여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 같기도 하오. 그러니 고양이를 찾아내면 해결이 될 것이오.”
학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내, 이놈의 고양이를 찾으면 밟아 죽여버…”
그때 대성전 앞쪽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안 됩니다!”
아까 산비를 보고 몸을 숨겼던 유생이었다.
“나비가 소생을 좋아하여 여기까지 따라온 것인데 소생이 차마 돌려보내지 못해 몰래 먹이를 주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낼 터이니,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유생이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학장이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야~아~옹!”
갈색 줄무늬를 가진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 속에서 뛰어나와 유생에게 달려갔다. 유생이 얼른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군후묘필도(君厚筆猫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저, 저…”
유생이 뭐라 말할지 몰라 하는데, 산비가 옆을 지나치며 슬쩍 말을 붙였다.
“빨리 도망치세요.”
유생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학장 나리, 죄송합니다. 벌은 돌아와서 받겠습니다!”
“저, 저놈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지만 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오달현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학장과 아전이 오달현을 돌아보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송나라에 명판관 포청천이 있었다고 하더니, 우리 고을에 그에 못지않은 명판관이 오셨습니다! 어찌 한 번에 이렇게 바로 진상을 파악하실 수 있으십니까!”
“어허, 뭐 이런 일을 가지고. 이제 돌아들 갑시다. 허허허.”
오달현은 슬며시 딸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산비는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 싶어 쓰개치마를 깊숙이 내리눌렀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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