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비야의 사건일지

낙화생이 사람 잡네

산비는 아버지 오달현 현감이 불러서 사랑으로 나갔다.

“왔느냐? 희한한 먹을 것이 생겨서 불렀다.”

자리에 앉자 상이 들어왔다. 접시 위에 손가락 마디만한 갈색의 길쭉하면서 동글동글한 것들이 소복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호콩이라는 건데, 청나라에서 엄청 유행하는 간식이라고 하더구나. 청나라에서 가져온 거라 호콩이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이름은 낙화생(落花生)이라던가 그렇다네.”

“아, 호콩이랑 낙화생이 같은 거였군요. 이거 처음 봐요.”

산비가 얼마 전에 본 책에 낙화생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희한하게도 꽃이 떨어진 뒤에 그 가지가 땅속을 파고들어가서 거기서 열매를 맺는다고 해요. 그래서 꽃이 떨어지면서 생긴다고 낙화생이라고 부른다네요.”

“신기하구나. 나도 이번에 처음 봤다. 이 갈색 껍질을 손으로 비벼서 까면 하얀 콩이 나온다. 봐라.”

오 현감은 자신의 상 위에 있는 낙화생 껍질을 벗겼다.

“너도 어서 먹어봐라.”


호콩은 오늘날 땅콩을 말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비도 낙화생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고 오도독 씹어보니 고소한 것이 이 세상맛이 아니었다.

“이거 참 맛있네요.”

“움, 움, 그렇지?”

오 현감은 입안에 낙화생을 하나 가득 담은 채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 귀한 건 어디서 나셨어요?”

“아, 황 부자가 보내 온 거다.”

“황 부자가 왜요?”

“아, 그 일전에 조칠갑이라는 이가 살해된 사건이 있지 않았느냐? 그걸 잘 해결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보내온 거란다. 황 부자가 거래하는 상단이 이번에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면서 이 낙화생을 많이 가져왔다고 하더구나.”

산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황 부자가 그냥 인사만 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오 현감이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하하, 역시 내 딸이야. 벌써 그걸 알아냈구나.”

오 현감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이번에 황 부자 아들이 관례(冠禮)를 올리는데 나보고 한번 와주십사 하더구나. 자(字)를 지어달라고 하더구나.”

“황 부자가 우리 고을에서 제일 잘 살긴 하지만 공명첩도 받은 적이 없는 일개 백성 아닙니까? 감히 고을의 관장을 오라 가라 하다니요?”

오 현감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게 황 부자가 선대에 공명첩을 받은 적이 있다. 향안에도 올라있어. 그냥 고을 사람들이 황 부자라 부를 뿐이지.”

“그건 제가 미처 몰랐네요. 관례는 언제 치른다나요?”

“내일 하는 모양이던데…”

“잘 됐네요. 관례 올리는 건 한 번도 구경을 못해봤는데, 소녀도 따라가겠습니다.”

오 현감이 그 말에 사레라도 걸린 듯 기침을 했다.

“쿨럭, 그, 그, 그래도 관례를 치르는 곳에 외간 여자가 가는 건 좀 그렇지 않겠느냐?”

“네? 왜요?”

관례는 선비 집안의 남자 아이가 열다섯 정도 되면 올리는 의례로, 이제 한 사람의 남성이 되었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관례를 올리면 댕기를 풀고 상투를 올린 뒤 갓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대개 관례를 따로 올리기 보다는 혼인을 하면서 관례도 함께 치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 처녀가 간다는 것은 미묘한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 오 현감이 생각한 것이다.


관례 올리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남자가 관례를 올리는 것처럼 여자도 어른이 되면 올리는 의례가 있어서, 그것은 계례(筓禮)라 불렀다. 계례는 댕기를 풀고 쪽을 지는 것으로 쪽에 비녀를 꽂는다. 계(筓)는 비녀라는 뜻이다. 계례는 따로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혼례를 치르면서 함께 행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계례 재현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오 현감이 계속 난감한 얼굴로 있자 산비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또 오촌 조카 병훈이가 출동하는 걸로 하죠.”

황 부자 댁에서 살변이 났을 때 산비는 남자 아이로 변장을 해서 오 현감을 따라갔었다. 그때 사용한 이름이 병훈이었다.

“허허, 참. 꼭 그래야 하겠느냐?”

“조칠갑 살변 때도 병훈이가 갔었으니 황 부자도 뭐라 하진 않을 걸요?”

“그, 그렇긴 하겠구나.”

마지못해 승낙한 오 현감이었다.

관례는 보통 정월에 날짜를 잡아 올리는 것이지만, 때를 놓치면 4월 초하루나, 7월 초하루에 올려도 되었다.

황 부자의 아들 윤석은 올해 열다섯이 되었다. 아직 철부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는데 졸지에 관례를 치르게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긴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위해 잔치가 열리는 것에 기분이 한창 좋기도 했다.

대청마루에는 탁자가 놓여서, 그 위에 난삼(襴衫), 조삼(阜衫), 심의(深衣), 신, 빗, 망건, 띠, 가죽신이 놓였는데 그게 다 윤석의 것이었으니 신날만도 했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황 부자가 난데없는 말을 한 것이다.


난삼(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심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자, 목욕재계부터 하자.”

“네?”

“신성한 의례를 치르는데 몸을 정갈히 해야지. 광에 물 끓여놓았으니 어서 가서 목욕을 하고 와라.”

윤석은 어쩐지 오늘 신나는 걸로 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목욕을 하고 나와 새 옷을 입고 나오자, 이미 와 있던 친척 어른들과 손님들이 대청에 좌정하고 있었다. 모두 수염 허연 어르신들인데 그 중에 자기 또래 남자 아이가 하나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집안 어르신과 손님들께 인사드려라.”

황 부자가 아들에게 이르면서 오 현감에게 제일 먼저 데려갔다.

“우리 고을을 다스리시는 사또 나리시다.”

황 부자는 아들의 눈이 그 옆에 있는 아이에게 향한 것을 보고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아인 사또 나리의 조카 오병훈이고.”

윤석은 이상하게 병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잘 모르겠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기까지 했다.

“그럼 사당에 가서 우리 윤석이가 어른이 되어 예를 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하도록 하자.”

사당을 다녀오자 이제 머리를 올리는 순서가 되었다. 집안 어른들이 댕기를 풀어주고 머리를 잡아 올려 상투를 매었다. 머리를 끌어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아팠지만 윤석은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를 참았다.

“상투가 아주 잘 매어졌구나.”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작은 할아버지가 망건을 씌워주고 아버지가 상투에 관을 꽂고 머리에 건을 씌워주었다.

“자, 옷을 갈아입자.”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또가 한마디를 해주었다.

“오늘 좋은 길일을 만나 장수 황 씨 문중의 윤석이 관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문에 힘쓰고 도의를 잊지 않아 장차 나라의 동량으로 잘 커가기를 바랍니다.”

뻔한 이야기가 늘어지는 동안 윤석은 그 옆의 병훈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찌 사내가 저렇게 피부가 뽀얀지, 입술은 어찌 그리 붉은지 알 수가 없었다.

옷을 다시 갈아입는 재가례, 삼가례가 끝나고 술이 나오는 초례 순서가 되었다. 윤석은 이날 처음 술을 입에 대었다. 단번에 술을 삼켜버리니 목 안이 화끈하면서 뜨끔했다. 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으면서, 이런 걸 굳이 왜들 마시나 싶기도 했다. 윤석은 술을 친척과 손님들에게 돌렸다. 다들 이렇게 맛난 술은 처음이라며 달게 마셨다. 윤석은 어른이 되면 이런 술이 달게도 느껴지나 보다 싶었다.


초례를 위해 준비된 술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그럼 이제 사또 나리께서 윤석이에게 자를 내려주시겠습니다.”

윤석이 마당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술을 마신 탓인 모양이었다. 긁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사또 나리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윤석의 윤(允)은 진실되다는 뜻이고 이곳은 포천이니 참 진(眞)에 포천의 포(抱)를 합해서 진실을 감싸안는다는 포진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황 부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깊은 뜻이 담긴 자를 지어 주시니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관례 중 자(字)를 지어주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윤석은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술 한 잔에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할 줄이야, 라고 생각하는데 점점 숨도 가빠져왔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윤석은 그 자리에 고개를 박고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윤석에게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은 병훈으로 변장한 산비였다. 산비는 급히 윤석의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고 바로 눕게 만들었다. 병훈의 목이 벌겋게 부어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두 손으로 목을 붙잡고 있었다. 흘러내린 소매로 드러난 팔에는 붉은 포진이 잔뜩 보였다.

“이건…”

산비는 급히 대청으로 올라갔다.

“자제 분이 마신 술병이 어디 있습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윤석을 돌보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다행히 산비는 상 위에 있는 술병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산비가 술병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눈살이 금방 찌푸려졌다. 산비는 다시 마당으로 뛰어내려가 황 부자에게 외쳤다.

“아드님이 평소에 은진(癮疹)이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은진은 두드러기가 갑자기 온몸에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황 부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게… 그게…”

“지금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빨리 말씀해주세요!”

“저기 호두나 잣 같은 걸 먹으면 조금 그런 일이… 아참, 낙화생도 그랬구나.”

“그럼 그럴 때 대비해서 준비해 둔 약재가 있지 않습니까?”

“아, 저기… 의원이 비상시에 쓰라고 준 약물이 있는데, 정말 긴급한 경우에만 사용하라고 했네.”

“지금이 그 긴급한 경우입니다. 어서 가져오세요.”


약재를 먹이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 현감이 정신이 나간 얼굴로 산비에게 물었다.

“산… 아니 병훈아, 이게 무슨 일이냐?”

“누군가 윤석을 죽이고자 술을 먹인 것입니다.”

오 현감이 고개를 저었다.

“그 술은 나도 마셨고, 여기 많은 사람들이 같이 마셨다. 어찌 윤석이에게만 문제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

“사람 중에는 낙화생을 먹고 은진이 돋는데 심하면 목구멍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낙화생을 키우지 않아서 이런 증상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 댁에는 낙화생이 넘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낙화생을 술을 빚을 때 같이 넣어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황 부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하인들을 불러 술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캐물었다. 그 사이에 측자를 달인 물이 도착하여 윤석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뭐라? 그 년이 술을 만들어왔다고?”

황 부자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하인 하나가 쩔쩔 매며 말했다.

“네, 저희도 맛을 보았는데 아주 맛이 있었고 아무도 탈 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서 그 조칠갑의 마누라를 끌고 와라!”

산비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살변의 피해자였던 조칠갑. 그의 아내가 왜 윤석을 죽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황 부자가 그 살인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끌려온 조칠갑의 처 안산네의 입을 통해서야 그 내막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네 아들놈이 땅콩을 먹으면 부어오르는 걸 알아서, 내가 그랬다! 낙화생을 갈아서 죽을 만들어 막걸리에 섞어서 이 술을 만들었다. 맛이 죽이지 않더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지?”

안산네가 악을 쓰자 황 부자도 눈이 돌아갔다.

“이 미친 것이! 여봐라, 저것을 매우 쳐라!”

산비가 얼른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오는 것을 막아섰다.

“무슨 짓들이냐! 여기 사또 나리가 계시다.”

산비는 안산네에게 물었다.

“이미 죄를 자백하였으니, 왜 그랬는지도 고하시오.”

안산네는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억울해서 그랬습니다! 저 안산의 밭은 돌아가신 지아비가 뼈를 갈아 넣으며 개간한 땅입니다! 그런 걸 지아비가 살변을 당하자마자 자기네 땅이라고 저 늙은 것이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황 부자가 길길이 화를 냈다.

“그럼 그 산이 뉘 산이냐? 그 산이 내 산인 것은 세상천지가 다 안다! 어디 남의 땅을 공으로 먹으려 하느냐! 내가 그래서 그 땅의 소작을 나누면 거길 써도 된다고 했냐, 안 했냐!”

“지아비도 없는데 7할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내가 어찌 그걸 감당하냐고! 그걸 가지고 생색을 내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황부자의 욕심이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것을, 저 욕심꾸러기 노인은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때 오 현감이 산비 옆으로 와 조용히 속삭였다.

“설마 내가 자를 포진이라고 지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산비는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 지금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닙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과 자리를 함께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흑립(출처: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14일 잠시 흐림. 용만관에서 떠나 소관관(所串館)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川)까지 50리를 가서 양책관(良策館)에서 잤다.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15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잠을 깨니 빗발이 부슬부슬하는데, 지다 남은 꽃과 여윈 꽃술이 암벽 사이에 윤기(潤氣)를 머금고 있어, 지난겨울의 풍경에 비하여 배나 아름다웠다. 잠시 천연정(天淵亭)에 올라가 풍악을 듣다가 떠났다.
차련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에는 관 앞에 반송(소나무)이 있어 울창하고도 우툴두툴하며 높다랗게 우뚝하여 일산과 같았으므로, 명나라 가는 사신들의 시의 소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동림성(東林城)을 지나다 보니 길에 아름드리 솔이 많은데 검푸른 빛이 하늘에 닿았으며 어둑하게 칙칙하고 그늘이 져, 지나가기가 마치 굴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장(別狀) 정관(鄭觀)은 연경에 들어갈 때의 만상(灣上 : 의주)의 군관(軍官)이었는데 먼저 진(鎭)에 도달하였다가 길에서 맞아 절하고 이어 성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대가 그다지 높지는 않은데 건물의 제작이 자못 든든하고 크며 편액을 ‘동림수대(東林帥臺)’라 하였다.
대체로 그 성가퀴는 산을 따라 빙 둘렀지만 그래도 요충(要衝)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성을 고쳐 쌓아 그 남쪽 부분을 넓히면 보장(保障)할 수 있는 요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나, 애석하게도 건의하여 힘을 들이려는 사람은 없다.

대의 북쪽에 별장(別將)의 일 보는 곳이 있는데 건물이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며, 또한 창고에 곡식이 만 곡(斛 한 섬)이 넘게 있는데, 선천부(宣川府)에서 관장한다. 성안의 민가는 열두어 호에 지나지 않으나 이익 내는 것이 박하기 때문에 하나도 모여드는 자가 없다. 앞으로 방수(防戍)하여 막아 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변란이 생겼을 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될까 걱정스럽다.
정관이 음식 한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이옥은 북한산 유람 중이었다. 절들을 돌아보니 승려〔緇髡〕 12(十二則)
승려의 옷은 베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푸른 면포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또는 검은 베로 만든 직철(直綴, 윗옷과 아래옷을 하나로 합쳐 꿰맨 장삼) 두루마기였는데, 소매는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단통모(短桶帽), 포량첨건(布梁簷巾), 폐양립(蔽陽笠, 패랭이) 등이 있고, 대나무 껍질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립(籉笠)이 있는데, 거기엔 입첨(笠簷)이 있어 사립(絲笠, 명주실로 싸개를 하여 만든 갓)과 비슷하며, 위는 항아리 같은데 그 꼭대기는 병(缾)의 입 모양처럼 되어 있다.
승려들의 띠는 대체로 명주실로 땋은 것이다. 혹 명주실로 땋은 것 중에 붉은 끈을 맨 자는, 옥이나 금으로 만들어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모자에 붙이기도 하였다. 또 아의(鴉衣)를 입고 털로 짠 벙거지를 쓰고, 벙거지 꼭대기에는 홍이(紅毦, ‘이’는 새의 날개에 여러 빛깔로 물들여 군복·말안장·투구·전립 등을 꾸미는 것, 속칭 상모)를 나부끼며,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승려의 염주는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 것이 많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율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사는 모양이 보자기 비슷하지만, 타원형이며 비늘을 이어놓듯 만드는데, 옷의 좌우에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수놓은 글자를 붙였다.
월광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자주색, 녹색, 푸른색의 끈 세 개를 늘어뜨렸다.
승려의 말에, “이 옷을 꿰매는 데에는 법도가 있고, 길이는 정해진 치수가 있고, 만들 때는 기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잘못되게 할 수도 없고 감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이 비호해 주는 바요,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가사에서 붉은 면포로 만든 가사를 한 번 보았다.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행장〔行李〕2칙(二則)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철쭉나무 지팡이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얼룩반점이 있는 대나무)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시를 지어 쓰는 무늬 있는 색종이 묶음)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비옷)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나섰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불을 일으키는 도구)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