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는 아버지 오달현 현감이 불러서 사랑으로 나갔다.
“왔느냐? 희한한 먹을 것이 생겨서 불렀다.”
자리에 앉자 상이 들어왔다. 접시 위에 손가락 마디만한 갈색의 길쭉하면서 동글동글한 것들이 소복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호콩이라는 건데, 청나라에서 엄청 유행하는 간식이라고 하더구나. 청나라에서 가져온 거라 호콩이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이름은 낙화생(落花生)이라던가 그렇다네.”
“아, 호콩이랑 낙화생이 같은 거였군요. 이거 처음 봐요.”
산비가 얼마 전에 본 책에 낙화생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희한하게도 꽃이 떨어진 뒤에 그 가지가 땅속을 파고들어가서 거기서 열매를 맺는다고 해요. 그래서 꽃이 떨어지면서 생긴다고 낙화생이라고 부른다네요.”
“신기하구나. 나도 이번에 처음 봤다. 이 갈색 껍질을 손으로 비벼서 까면 하얀 콩이 나온다. 봐라.”
오 현감은 자신의 상 위에 있는 낙화생 껍질을 벗겼다.
“너도 어서 먹어봐라.”
호콩은 오늘날 땅콩을 말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비도 낙화생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고 오도독 씹어보니 고소한 것이 이 세상맛이 아니었다.
“이거 참 맛있네요.”
“움, 움, 그렇지?”
오 현감은 입안에 낙화생을 하나 가득 담은 채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 귀한 건 어디서 나셨어요?”
“아, 황 부자가 보내 온 거다.”
“황 부자가 왜요?”
“아, 그 일전에 조칠갑이라는 이가 살해된 사건이 있지 않았느냐? 그걸 잘 해결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보내온 거란다. 황 부자가 거래하는 상단이 이번에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면서 이 낙화생을 많이 가져왔다고 하더구나.”
산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황 부자가 그냥 인사만 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오 현감이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하하, 역시 내 딸이야. 벌써 그걸 알아냈구나.”
오 현감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이번에 황 부자 아들이 관례(冠禮)를 올리는데 나보고 한번 와주십사 하더구나. 자(字)를 지어달라고 하더구나.”
“황 부자가 우리 고을에서 제일 잘 살긴 하지만 공명첩도 받은 적이 없는 일개 백성 아닙니까? 감히 고을의 관장을 오라 가라 하다니요?”
오 현감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게 황 부자가 선대에 공명첩을 받은 적이 있다. 향안에도 올라있어. 그냥 고을 사람들이 황 부자라 부를 뿐이지.”
“그건 제가 미처 몰랐네요. 관례는 언제 치른다나요?”
“내일 하는 모양이던데…”
“잘 됐네요. 관례 올리는 건 한 번도 구경을 못해봤는데, 소녀도 따라가겠습니다.”
오 현감이 그 말에 사레라도 걸린 듯 기침을 했다.
“쿨럭, 그, 그, 그래도 관례를 치르는 곳에 외간 여자가 가는 건 좀 그렇지 않겠느냐?”
“네? 왜요?”
관례는 선비 집안의 남자 아이가 열다섯 정도 되면 올리는 의례로, 이제 한 사람의 남성이 되었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관례를 올리면 댕기를 풀고 상투를 올린 뒤 갓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대개 관례를 따로 올리기 보다는 혼인을 하면서 관례도 함께 치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 처녀가 간다는 것은 미묘한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 오 현감이 생각한 것이다.
관례 올리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남자가 관례를 올리는 것처럼 여자도 어른이 되면 올리는 의례가 있어서, 그것은 계례(筓禮)라 불렀다. 계례는 댕기를 풀고 쪽을 지는 것으로 쪽에 비녀를 꽂는다. 계(筓)는 비녀라는 뜻이다. 계례는 따로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혼례를 치르면서 함께 행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계례 재현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오 현감이 계속 난감한 얼굴로 있자 산비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또 오촌 조카 병훈이가 출동하는 걸로 하죠.”
황 부자 댁에서 살변이 났을 때 산비는 남자 아이로 변장을 해서 오 현감을 따라갔었다. 그때 사용한 이름이 병훈이었다.
“허허, 참. 꼭 그래야 하겠느냐?”
“조칠갑 살변 때도 병훈이가 갔었으니 황 부자도 뭐라 하진 않을 걸요?”
“그, 그렇긴 하겠구나.”
마지못해 승낙한 오 현감이었다.
관례는 보통 정월에 날짜를 잡아 올리는 것이지만, 때를 놓치면 4월 초하루나, 7월 초하루에 올려도 되었다.
황 부자의 아들 윤석은 올해 열다섯이 되었다. 아직 철부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는데 졸지에 관례를 치르게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긴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위해 잔치가 열리는 것에 기분이 한창 좋기도 했다.
대청마루에는 탁자가 놓여서, 그 위에 난삼(襴衫), 조삼(阜衫), 심의(深衣), 신, 빗, 망건, 띠, 가죽신이 놓였는데 그게 다 윤석의 것이었으니 신날만도 했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황 부자가 난데없는 말을 한 것이다.
난삼(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심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자, 목욕재계부터 하자.”
“네?”
“신성한 의례를 치르는데 몸을 정갈히 해야지. 광에 물 끓여놓았으니 어서 가서 목욕을 하고 와라.”
윤석은 어쩐지 오늘 신나는 걸로 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목욕을 하고 나와 새 옷을 입고 나오자, 이미 와 있던 친척 어른들과 손님들이 대청에 좌정하고 있었다. 모두 수염 허연 어르신들인데 그 중에 자기 또래 남자 아이가 하나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집안 어르신과 손님들께 인사드려라.”
황 부자가 아들에게 이르면서 오 현감에게 제일 먼저 데려갔다.
“우리 고을을 다스리시는 사또 나리시다.”
황 부자는 아들의 눈이 그 옆에 있는 아이에게 향한 것을 보고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아인 사또 나리의 조카 오병훈이고.”
윤석은 이상하게 병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잘 모르겠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기까지 했다.
“그럼 사당에 가서 우리 윤석이가 어른이 되어 예를 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하도록 하자.”
사당을 다녀오자 이제 머리를 올리는 순서가 되었다. 집안 어른들이 댕기를 풀어주고 머리를 잡아 올려 상투를 매었다. 머리를 끌어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아팠지만 윤석은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를 참았다.
“상투가 아주 잘 매어졌구나.”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작은 할아버지가 망건을 씌워주고 아버지가 상투에 관을 꽂고 머리에 건을 씌워주었다.
“자, 옷을 갈아입자.”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또가 한마디를 해주었다.
“오늘 좋은 길일을 만나 장수 황 씨 문중의 윤석이 관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문에 힘쓰고 도의를 잊지 않아 장차 나라의 동량으로 잘 커가기를 바랍니다.”
뻔한 이야기가 늘어지는 동안 윤석은 그 옆의 병훈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찌 사내가 저렇게 피부가 뽀얀지, 입술은 어찌 그리 붉은지 알 수가 없었다.
옷을 다시 갈아입는 재가례, 삼가례가 끝나고 술이 나오는 초례 순서가 되었다. 윤석은 이날 처음 술을 입에 대었다. 단번에 술을 삼켜버리니 목 안이 화끈하면서 뜨끔했다. 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으면서, 이런 걸 굳이 왜들 마시나 싶기도 했다. 윤석은 술을 친척과 손님들에게 돌렸다. 다들 이렇게 맛난 술은 처음이라며 달게 마셨다. 윤석은 어른이 되면 이런 술이 달게도 느껴지나 보다 싶었다.
초례를 위해 준비된 술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그럼 이제 사또 나리께서 윤석이에게 자를 내려주시겠습니다.”
윤석이 마당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술을 마신 탓인 모양이었다. 긁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사또 나리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윤석의 윤(允)은 진실되다는 뜻이고 이곳은 포천이니 참 진(眞)에 포천의 포(抱)를 합해서 진실을 감싸안는다는 포진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황 부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깊은 뜻이 담긴 자를 지어 주시니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관례 중 자(字)를 지어주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가례)
윤석은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술 한 잔에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할 줄이야, 라고 생각하는데 점점 숨도 가빠져왔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윤석은 그 자리에 고개를 박고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윤석에게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은 병훈으로 변장한 산비였다. 산비는 급히 윤석의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고 바로 눕게 만들었다. 병훈의 목이 벌겋게 부어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두 손으로 목을 붙잡고 있었다. 흘러내린 소매로 드러난 팔에는 붉은 포진이 잔뜩 보였다.
“이건…”
산비는 급히 대청으로 올라갔다.
“자제 분이 마신 술병이 어디 있습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윤석을 돌보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다행히 산비는 상 위에 있는 술병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산비가 술병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눈살이 금방 찌푸려졌다. 산비는 다시 마당으로 뛰어내려가 황 부자에게 외쳤다.
“아드님이 평소에 은진(癮疹)이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은진은 두드러기가 갑자기 온몸에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황 부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게… 그게…”
“지금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빨리 말씀해주세요!”
“저기 호두나 잣 같은 걸 먹으면 조금 그런 일이… 아참, 낙화생도 그랬구나.”
“그럼 그럴 때 대비해서 준비해 둔 약재가 있지 않습니까?”
“아, 저기… 의원이 비상시에 쓰라고 준 약물이 있는데, 정말 긴급한 경우에만 사용하라고 했네.”
“지금이 그 긴급한 경우입니다. 어서 가져오세요.”
약재를 먹이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 현감이 정신이 나간 얼굴로 산비에게 물었다.
“산… 아니 병훈아, 이게 무슨 일이냐?”
“누군가 윤석을 죽이고자 술을 먹인 것입니다.”
오 현감이 고개를 저었다.
“그 술은 나도 마셨고, 여기 많은 사람들이 같이 마셨다. 어찌 윤석이에게만 문제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
“사람 중에는 낙화생을 먹고 은진이 돋는데 심하면 목구멍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낙화생을 키우지 않아서 이런 증상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 댁에는 낙화생이 넘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낙화생을 술을 빚을 때 같이 넣어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황 부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하인들을 불러 술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캐물었다. 그 사이에 측자를 달인 물이 도착하여 윤석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뭐라? 그 년이 술을 만들어왔다고?”
황 부자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하인 하나가 쩔쩔 매며 말했다.
“네, 저희도 맛을 보았는데 아주 맛이 있었고 아무도 탈 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서 그 조칠갑의 마누라를 끌고 와라!”
산비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살변의 피해자였던 조칠갑. 그의 아내가 왜 윤석을 죽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황 부자가 그 살인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끌려온 조칠갑의 처 안산네의 입을 통해서야 그 내막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네 아들놈이 땅콩을 먹으면 부어오르는 걸 알아서, 내가 그랬다! 낙화생을 갈아서 죽을 만들어 막걸리에 섞어서 이 술을 만들었다. 맛이 죽이지 않더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지?”
안산네가 악을 쓰자 황 부자도 눈이 돌아갔다.
“이 미친 것이! 여봐라, 저것을 매우 쳐라!”
산비가 얼른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오는 것을 막아섰다.
“무슨 짓들이냐! 여기 사또 나리가 계시다.”
산비는 안산네에게 물었다.
“이미 죄를 자백하였으니, 왜 그랬는지도 고하시오.”
안산네는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억울해서 그랬습니다! 저 안산의 밭은 돌아가신 지아비가 뼈를 갈아 넣으며 개간한 땅입니다! 그런 걸 지아비가 살변을 당하자마자 자기네 땅이라고 저 늙은 것이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황 부자가 길길이 화를 냈다.
“그럼 그 산이 뉘 산이냐? 그 산이 내 산인 것은 세상천지가 다 안다! 어디 남의 땅을 공으로 먹으려 하느냐! 내가 그래서 그 땅의 소작을 나누면 거길 써도 된다고 했냐, 안 했냐!”
“지아비도 없는데 7할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내가 어찌 그걸 감당하냐고! 그걸 가지고 생색을 내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황부자의 욕심이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것을, 저 욕심꾸러기 노인은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때 오 현감이 산비 옆으로 와 조용히 속삭였다.
“설마 내가 자를 포진이라고 지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산비는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 지금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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