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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끼”있는 어르신들이 만드는
“끼” 있는 마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이번 호 스토리 이슈에서는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을 소개합니다. “예끼마을”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아랫마을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데요, 인적 드문 작은 시골 마을에 예술에 ‘끼’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을 담장에 벽화가 그려지고, 허름한 상가 간판은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모양으로 바뀌고, 빈집은 식당과 카페로, 옛 우체국은 예술 체험공간으로, 면사무소는 갤러리로 바뀌었습니다. 쇠락해 가는 마을에 예술을 접목하여 아름다운 온기가 싹트고 있습니다.


입체적이고 모양으로 바뀐 서부리 상가 간판


옛 도산면사무소 출장소는 지난해 11월 17일 ‘근민당 갤러리’로 이름을 바꾸고 전시 공간으로 탄생했습니다. 첫 전시는 안광식 작가의 작품으로 꾸며졌으며, 현재는 권갑칠 작가의 작품 약 50여 점이 전시 중입니다. 전시는 1월 21일 (일)까지 이어집니다.


갤러리로 바뀐 옛 도산면사무소


옛 우체국은 도자공방과 갤러리‘藝’로 바뀌었습니다. 1층은 도자공방으로 2층은 작가들의 작품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가을과.... 봄 사이’를 주제로 20여 명의 작가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옛 마을회관은 예술가의 화실로 꾸며졌는데요, 시간을 시각화 하는 작가 배수봉 작가가 “예끼화실”이라는 문패를 달고 입주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도자공방으로 바뀐 우체국(좌)과 예끼화실이 된 마을회관(우)의 모습


이러한 마을의 변화를 이끈 건 다름 아닌 서부리 주민들입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근 수몰민 400여명이 서부리에 모여 마을을 이뤘고, 그 시절 부모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한 젊은이들은 어느새 예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습니다. 시간 속에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지만 서부리의 어르신들은 40여 년의 시간 속에 사라지고, 잊혀지고, 쇠락해가는 마을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비록 4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마을이지만 평생의 삶의 터전이 또 다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후대에 아름다운 마을을 남겨주자는 의지가 “예끼마을”의 시작이었습니다. ‘예끼마을’이라는 명칭 또한 ‘끼’ 많은 어르신들이 ‘끼’ 있는 마을로 만들자는 의지를 담아 주민들의 아이디어로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서부리 주민들의 의지는 안동시가 2015년부터 ‘도산 서부리 예술마을 조성 사업’을 지원하면서 힘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동시는 UCC 공모전, 내 이웃 초상화 그리기 교실, 서예교실, 규방공예교실, 바리스타교실 등 다양한 주민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각심포지엄, 갤러리기획전, 주민예술가양성과정에 예술가들을 참여시켜 ‘예술마을’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습니다.



주민이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 활동은 실버극단 <왔니껴>입니다. 평균 연령 65세의 실버극단 <왔니껴>는 도산면 어르신들의 삶을 이야기로 끌어내어 연극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2015년 봄, 임하 수몰민들의 애환을 담은 ‘월곡빵집’을 초연한 후, 이웃의 소소한 일상을 왁자지껄 수다로 풀어내는 ‘잠 좀 자시더’, 마을 지명에 얽힌 설화를 마당극으로 공연하는 ‘마뜰연가’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2017년도 <왔니껴>의 네 번째 공연은 서부리 주민들의 회고를 바탕으로 만든 ‘그리운 예안장터’. 70년대 안동댐 건설 전 어느 해 가을, 장날을 맞은 예안장터는 하루를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엮어 보여주는 악극입니다.

극단에 이어 2016년도 12월에는 ‘예끼마을’ 풍물단이 탄생했습니다. 서부리 마을 주민 30여 명으로 구성단 예끼마을 풍물단은 매주 화, 금 저녁에 전문 풍물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옛 가락과 흥을 익혀가고 있습니다. 예끼마을 풍물단은 마을 행사와 축제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기량이 높아지면 전국 풍물대회도 참가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의 ‘끼’와 서부리 주민들의 ‘끼’가 지금처럼 서로 만나고 어울려 생기 넘치는 마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올 겨울 안동 나들이 계획이 있다면 한번쯤 “예끼마을”에 들러 조용한 마을의 정취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끼마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yeggistory.com/




“예조정랑이 되자마자 청탁을 받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1-21 ~ 1720-01-22
1720년 1월 하순, 정기 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권상일은 지난해 성균관 직강으로 내부 승진이 된 상태였다. 그는 꽤 성균관에 오래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직강이 되었던 그가 정기 인사 대상에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인사대상에 올라 있었다. 예조정랑 수망에 권상일, 부망에 홍구, 말망에 여길에 올라와 있었다. 결국 예조정랑은 권상일이 낙점되었다. 예조는 성균관의 상급 관청이었으므로 같은 5품직이라고 하더라고 성균관보다는 예조가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또한 예조참판과 예조참의 또한 새로 교체되었으므로 예조 관원의 절반 이상이 이번 인사에서 새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예조정랑으로 부임한지 하루도 안되어 청탁이 들어왔다. 역관과 의학 5~6명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 청탁 편지는 대개 취재(取才)와 고강(考講)에 대한 것이었다. 본래 과거는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그런데 기술직 관원인 사역원(司譯院)의 역관, 전의감(典醫監)의 의학, 관상감(觀象監)의 역학 등은 모두 취재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다. 그런데 그 취재 담당 기관이 예조였던 것이다.

“이괄의 난 (5) - 피난하는 임금의 가마를 뒤따른 자들, 승진 리스트에 오르다”


김령, 계암일록, 1624-03-08 ~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인조반정에서의 공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 요소로 경계하는 조정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으킨 난은 순식간에 조선을 강타했다. 영변에서 시작된 난은 보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도성까지 내려왔고, 국왕 인조는 급기야 파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변란의 공과 죄를 물어 체직과 임명이 계속되었다.
이 때 인조의 파천 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수행한 공으로 4품 이상의 관리는 모두 승격을 시켜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기까지 승진 리스트에 오른 관리가 모두 1백 5명이었다.
대간(臺諫)에서는 이를 논계하여 상이 너무 남발되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 결정을 거둬달라는 대간의 논계는 4품 관리는 통정대부로 올린 것만 개정하자고 청하는데 그쳤다. 임금의 가마를 따랐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귀와 김류가 관직임명을 두고 갈등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7-27 ~
1625년 7월 27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내렸다. 식사 때쯤 그치더니, 이 비로 냇물이 불었다. 저녁에는 김시익이 찾아와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김령은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에 남이공이 대사헌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것은 전적으로 김류를 통해서인 듯 하였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와 친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직을 제수받았다. 이를 전해듣고 이귀가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귀가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전하가 하교하여 ‘이귀가 공믈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고 명하시고는 또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인데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우의정 신흠 등이 차자를 올려 겨우 주상전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유배의 명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이 일로 김류 역시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이란 이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의 군적 어사도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이고, 우도는 김시양이란 이가 뽑혔다. 영의정 자리는 이미 봄부터 비어있었는데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정승자리는 비어 있고, 또 반정의 공신들 사이는 저렇듯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었다.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인사 대상에 오르다 번번히 떨어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19년 7월 22일, 정기 인사 기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사를 담당해야 하는 이조참의가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으므로 이조참의를 교체시켜 이병상(李秉常)을 임명했다. 그래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사가 열렸다. 이날 인사에서 권상일은 그토록 바라던 지방관 후보에 올랐다.
강진현감의 말망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망은 실제 거의 가망이 없었다. 3후보 중에서 가장 꼴지가 말망이었기 때문이다. 병조좌랑이었던 김성발이 1순위인 수망으로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와서 벼슬살이 하면서 단지 쇠잔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부친을 영화롭게 모시려 했지만 지금 또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튿날 다시 정사가 진행되었다.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병조좌랑을 대신하기 위한 인사로 권상일이 2순위인 부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못했다. 다음날 또 정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병조좌랑 한자리에 그가 3순위 말망에 올랐고 또 한번은 예조정랑 자리에 2순위 부망에 올랐으나 그는 낙점을 받지 못했다. 다시 성균관에서 몇 개월의 관직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복직 (2) - 성주목사로 복직 될 뻔 했으나…”


권문해, 초간일기,
1582-11-20 ~ 1583-01-16
1582년 11월 20일, 권문해는 공주목사 재직 시절의 모든 사건과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책임을 벗게 되자 관직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주목사로 추천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성주목사로 세 번이나 추천을 받아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탄핵을 받아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때 권문해가 성주목사의 세 명의 후보자 중 말망(末望)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 후보자 모두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임금을 모셨던 사람들로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가장 첫 번째로 추천을 받아 수망(首望)에 오른 윤희길(尹希吉)이 성주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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