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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조선 공론 정치의 원형,
만인의 청원 ‘만인소’



지난 51호에서 한국기록유산 지식센터 개소식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이 보존하고 있는 두 점의 만인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지역 목록(이하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에 등재 소식을 전했습니다. 만인소 등재로 한국국학진흥원은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 4점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유교책판,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으로는 한국의 편액과 만인소입니다. 이번 호 스토리이슈에서는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두 점의 만인소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유교적 윤리관 실천, 만인소

만인소는 조선 시대 만여 명에 달하는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연명해서 왕에게 올린 청원서입니다. 만 명이 중요했던 것은 ‘만(萬)이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인소 운동은 1792년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해 달라는 청원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각기 다른 사안들을 가지고 19세기 말까지 총 7차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아태기록유산에 등재된 만인소는 원본이 남아 있는 1855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당시 중앙정부에서 진행된 복제 개혁에 반대하는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2점입니다.

만인소는 ‘만여 명의 개인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유교적 윤리관을 국가에 실천적으로 적용하고자 한 민주주의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 참여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국가에 적용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청원했던 결과물이라는 점이 등재의 주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만인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부분은 ‘민주적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만인소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통문과 회합을 통해 공론을 모으는 과정부터 시작합니다. 공론에 따라 만인소 운동이 결정되면, 추천과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상소의 대표와 업무 담당자를 선출하고, 여러 상소 초고를 수렴해 논의를 거쳐 공론으로 최종 상소문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상소문에 모든 참여자들은 자필로 이름을 쓰고 자필서명(sign)을 함으로써 자발적 참여와 자기 책임성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이번 등재과정에서 만인소는 기록물의 형태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만인소는 청원 내용과 그 청원에 참여한 만여 명의 서명 및 자필서명으로 이뤄진 대형 기록물입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1만94명이 연명한 상소로, 폭 1.11m, 길이 96.5m, 무게 16.6㎏이며,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8849명이 연명한 상소로, 폭 1.02m, 길이 100.36m, 무게 8.3㎏입니다.

이 두 상소의 청원 내용은 다르지만, 유교적 올바름을 실천하려 했던 참여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세자 추존만인소’는 정통 왕위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 싸움으로 인해 뒤주에 갇혀 불운하게 생을 마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당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왕통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은 현실을 바로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임오의리를 분명하게 할 것을 청하는 상소
<서명자 수: 10,094명, 폭: 1.11m, 길이: 96.5m, 무게: 16.6kg>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1884년 내려진 복제 개혁에 반대하면서 이 정책에 대한 재고를 청원하는 내용입니다. 복제개혁에 대한 반대는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시대에 역행하는 내용일 수 있지만, 유교 이념에서 벗어난 중앙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 고종 21년에 내려진 복제개혁 조치를 취소하라는 상소
<서명자 수: 8,849명, 폭: 1.02m, 길이: 100.36m, 무게: 8.3kg>



이처럼 재야 유교 지식인들은 100m에 달하는 연명 상소를 작성해 왕조의 정통성 논쟁에 참여하고, 유교적 예제를 회복하려는 입장을 중앙에 강력하게 전달했습니다.

만인소는 그 성격상 중앙정부를 비판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권력에 반하는 성격들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에 참여한 재야 지식인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고, 실제 만인소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는 유배를 가기도 하고, 중앙정부의 탄압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참여자의 숫자와 그 성격을 가지고 보면 현대 청와대 청원운동과 닮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만인소 운동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옳지 않음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던 목숨을 건 실천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질이 억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안음현에서 살인사건이 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8 ~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도기찰(都譏察) 김한평(金漢平)과 사후(伺侯) 김동학(金東鶴)과 더불어 지대면(知代面)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관가(官家)에 들어오던 중, 행차가 장수사(長水寺) 뒤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도적 10여명이 불쑥 나타나 도기찰과 사후를 난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태건과 구운학 두 사람은 몸을 피해 달아나 사건을 고할 수 있었으나, 아마도 그 사이에 도기찰 등은 분명히 운명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안음현감은 매우 놀라 위의 변고(變故)를 고한 김태건과 구운학 등을 우선 잡아가둔 후에 사실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함께 죽은 데다, 죽은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군관인 도기찰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으며, 더욱이 도적 10여 명이 출몰하였다 하니 큰 사건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은비녀와 흰밥을 이용해 시험하니 독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검시결과 김한평(金漢平)과 김동학(金東鶴) 두 사람 모두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비녀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흰밥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독살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주무원록에서 밝힌 격식에 따라 시장에 검시 내용을 기록하다”

『신주무원록』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처음에 덮었던 포대 2장을 제거하니 다음으로 베적삼 하나, 다음으로 무명 바지 하나 등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발을 서쪽으로 하고 전면(前面) 이 되도록 눕히고는 오작(件作) 양인(良人) 하순걸(河順乞)로 하여금 차례차례 벗기고 돌려 눕혀 법물(法物)로 몸을 씻기게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시하였다.
나이는 35, 36세가량 남자. 신장이 5척이고 머리털 길이가 2척이고 두 눈이 반쯤 열렸고 입이 반쯤 열렸고 혀가 이[齒]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온몸에 색깔이 엷은 황색이다. 두 손은 조금 쥐었고 두 다리는 곧게 뻗었고 음경[莖物]과 음낭[腎囊]은 아래로 늘어졌다.
전면[仰面]의 상처는, 머리 부분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는데 길이가 1촌 1푼이고 넓이가 3푼이고 깊이가 2푼이고 혈액이 흐르고 부드럽다. 이마(顖門) 두 곳에 피부 찰과상이 있는데 색깔이 자줏빛이고 모양이 작은 팥알 조각 같고 매우 단단하다. 눈썹[眉叢] 왼쪽에 피부 찰과상은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눈꺼풀[眼胞]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2푼 5리이고 넓이가 7리이고,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왼쪽 눈동자[眼睛]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3푼이고 넓이가 2푼이고 색깔이 자줏빛 이고 매우 단단하다. 위아래 입술[脣]은 조금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왼쪽 아랫입술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길이가 6푼이고 넓이가 1푼이고 색깔이 조금 검붉고 매우 단단하다. 아랫입술 아래는 많이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결분 뼈[缺盆骨]에 피부 찰과상 한 곳이 있는데 직경이 4푼이고 색깔이 엷은 검은색이고 매우 단단하다.

“살인사건이 나면 관할 수령과 인근 수령이 직접 시신의 검안을 실시한다”

『검요』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10 ~

1751년 7월 10일, 성주목(星州牧)에서 죽은 유기장(柳器匠) 조수업(趙守業)의 시신(屍身)을 관할 수령 성주목사(星州牧便) 신준(申晙)이 초검(初檢)을 실시하였으며, 인근 수령인 고령현감(高靈縣單) 정창유(鄭昌兪)가 전례대로 복검(勸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전임 경상감사(前慶尙監司) 민백상(閔百祥)이 이임(離任)하여 올라가는 길에 보고하였으며, 또 신임감사 조재호가 부임한 초에 등본(謄本)으로 하여 보고하고 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1 ~ 1616-07-14

1616년 7월 11일, 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말도둑 사건’ 처리 문제로 다시 관아에 들어가 현감을 만났다. 그리고 잡히는 과정에서 막복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었던 춘금이가 밤사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현감은 춘금의 어미와 친족들을 모두 불러 이 사실을 전달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숙은 일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하고 현감을 설득하려하였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이 날은 그냥 돌아와 아버지인 택룡에게 걱정만 늘어놓았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은 수심에 찬 채로 다시 현감을 만나러 갔다. 현감은 더 강경하게 나왔다. 활을 쏜 막복을 살인자라고 감옥에 가두고, 이웃의 영천 군수에게 춘금의 검시까지 요청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말도둑 사건은 관심이 없고,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 법적 절차대로 해결하려 했다. 택룡의 큰 아들이 수 차례 설득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현감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 날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택룡과 그의 큰 아들은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출처 : 세계유교문화재단)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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