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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한국국학진흥원의 민간 소장 기록유산 가운데
유생들의 일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삶을 조명한 책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
저자 인터뷰

이상호·이정철 지음,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 푸른역사, 2020.03.09




이상호·이정철


Q : 조선시대 유생들의 일기를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부분이 공감이 갑니다. 집필의 역할은 어떻게 분담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호 박사(이하 이미지) 이 책의 내용들은 2014년부터 만 6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 KBS 안동 방송국의 <즐거운 라디오 안동입니다>의 <역사 속 오늘>이라는 코너에서 했던 이야기들 가운데 추린 것입니다. 그 내용은 모두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에서 그 시기 지역의 이야기를 발췌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동일 공간에서 과거 동일 시간대를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 소재를 선택하고 내용을 집필한 것은 지속적으로 라디오에 출연해왔던 이상호 박사가 담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용어풀이와 주석,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토 및 관련 집필은 역사학을 전공한 이정철 박사가 담당을 했습니다. 옛날과 지금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이를 기반으로 해야 그 속에서 삶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정철 박사(이하 이미지) 이상호 선생님은 한국철학,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양명학과 주자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얼핏 철학이나 역사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각자 공부의 소재가 동일한 조선시대이니까요. 하지만 학문 분과로서의 역사와 철학은 공부 내용이나 방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역할 구분은 그런 차이에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상호 선생님이 초고를 썼습니다. 나는 서술된 초고 내용에 대해 증거사료를 제시하고, 또 초고에 있는 불확실하거나 애매한 내용을 바로잡았습니다. 또 서술 내용에 나오는 개념이나 용어를 풀이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산송’이나 ‘방납’은 조선시대에 너무나 흔한 사회적 관행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면 서술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초고를 교열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서술을 더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초고를 쓰는 일이 가장 큰 일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이상호 선생님을 돕는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 일기류는 개성이 강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여러 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이 책에 실린 선정 기준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세요.


사실 일기류 기록은 개인의 집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글이라고 생각되지만, 기획되지 않은 하루 하루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일상이 영화 같지는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상은 평범한 기록들이죠. 이 때문에 이 책은 그들이 가진 평범성을 중심으로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들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특히 당시의 시스템이나 사회적 환경,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특별하게 다룰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더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 다른 국가 시스템과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겪는 일상들을 보여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뽑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글의 선정은 이상호 선생님이 했습니다.




Q : 조선시대 마을은 현대의 공동체와 달리 훨씬 집약적이고, 다기능적이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마을은 우주라고 표현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국가와 마을,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또한 현대의 국가와 공동체,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현대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덕목은 무엇인지?


조선의 마을 공동체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제적 공동체이자, 학문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현대 사회가 다양한 직업군으로 인해 경제적 공동체와 학문적 공동체, 그리고 생활 공동체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마을이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이 때문에 국가는 개인을 직접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가문 중심의 지배를 했고, 마을은 한 단위의 운명 공동체로서 개인들을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관계이다 보니 과거 시험이나 혹은 지식인으로서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마을이 우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마을에서 배척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기반과 직장,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배척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면서 도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까’라는 것은 당시 마을을 운영하는 리더들의 고민이었고, 이러한 고민은 유학이라는 도덕적 이념을 기반으로, 강력한 규율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냈던 것이죠. 이러한 점은 현대의 다양한 공동체 운영에 있어서도 의미를 갖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조선시대 국가, 마을, 개인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국가, 마을 및 개인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마을, 개인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범위와 그것이 갖는 힘이 달라지기는 해도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흔히 과거를 배워서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반대로 같은 정도로 사실입니다. 부모가 되어봐야 자기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과거를 이해하는 정도는 우리가 우리의 현재 이해하는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많이 바뀐 것이 국가, 개인, 마을 중 ‘마을’입니다. 사실 지금의 마을은 옛날의 마을과 비교하면 거의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니, 왜 옛날에는 사람들의 삶이 ‘마을’을 단위로 이루어졌을까요? 이것은 말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말이 필요할 겁니다. 다만 과거에 존재했던 마을은 그냥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간으로서의 마을’은 사라졌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서의 마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옛날 마을이 가졌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내가 떼거나 붙이거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또 주위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생애를 살아가면서 지나게 되는 과정들에도 ‘마을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 결혼하고 누군가 사망했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광경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는 그런 관계가 공간으로서의 마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위해서 복원해 내고 풍부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관계로서의 마을일 것입니다.


Q : 일기들 가운데, 코로나19사태에 지친 국민들이 힐링할 수 있는 사례가 있는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힐링의 소재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조선시대 전염병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우선 많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책에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지만, 실제 조선시대 전염병은 반복적으로 닥쳐오는 불청객이었습니다. 실제 이로 인해 가족이나 이웃을 잃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전염병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인지는 기록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에피소드도 결국 전염병에 걸린 정희생이라는 사람의 어머니가 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따돌림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는데, 이는 전염병의 무서움이 병 자체보다 확장된 공포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싶고요. 그 외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이기 때문에 스스로 현대 사회와 비교해 가면서 읽는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염병은 지금보다 조선시대에 훨씬 자주 발생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전염병 발생과 그 피해가 극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 사람 생애에 여러 번 전염병을 경험했고, 한 번 발생하면 수만 명이 죽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인구 규모로 환산하면 수십만이 사망한 것에 해당합니다. 전근대와 지금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세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서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의학기술의 발전, 전근대와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영양 상태와 상하수도의 설치 등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 자체를 벗어나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조선시대를 당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전염병은 본래 발병한 사람에 따라 그 결과에 차이가 큽니다. 평소 건강하고 영양이 좋은 사람은 회복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저질환이 있고 나이로 쇠약해진 경우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 자체는 조선왕조도 다른 나라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발병 결과의 차이를 ‘지배층의 음모’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지배층은 덜 죽고 피지배층은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것은 지배권력에 대해 피지배층이 평소에 가졌던 생각이 그렇게 유도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실제로 없었을 것입니다. 조정은 전염병이 퍼지면 방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방역을 위해서 취해진 조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과학기술의 수준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정이 백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신뢰가 조선의 장기지속을 가능하게 했던 힘 중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코로나 대처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Q : 특별히 이 책을 권하고픈 독자가 있다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는지 이야기해주세요.


이 책은 유생들이 쓴 일기를 기반으로 창작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 스토리테마파크 이야기 소재를 기반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입니다. 단위별 이야기 소재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를 학자 입장에서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구요. 따라서 조선시대 일상적 사람들의 삶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싶은 독자나,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이 책은 대부분 사실 정보를 중심으로 그 당시의 상황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쓴 것이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스토리테마파크가 원래 지향했던 목적처럼 제2, 제3의 창작이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양한 독자들에게 다양한 목적으로 이 책이 많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 ^) 이상호 선생님과 내가 함께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기반은 역사나 철학이나 똑같이 ‘인문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문’에서 ‘문(文)’은 문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늬’, 즉 패턴(pattern)입니다. 인문이란 말하자면 ‘사람이 갖는 무늬’입니다. 사람이라면 보여주는 특징을 뜻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는 장소나 시간대와 무관하게, 지배층이거나 피지배층이거나 무관하게, 남자거나 여자거나 혹은 그 이외의 성적 정체성을 가진 누군가이거나 무관하게, 인종이나 신앙과 무관하게 사람이기만 하다면 갖는 특성입니다.

이상호 선생님과 나는 평소에도 역사는 좀 더 생각하는 역사여야 하고, 철학은 좀 더 현실에 뿌리박는 철학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이 과거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삶과 생각을 되돌아보고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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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오?”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동생을 살린 미담이 전해지다”

박한광, 박득녕, 박주대, 박면진,
박희수, 박영래, 저상일월,
1922-05-15~

1922년 5월 15일, 박면진은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소식을 들었다. 경주의 각산 마을에 박종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화상을 입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 박종필이란 사람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아우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괴이한 사고와 인륜을 저버린 이야기들만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야말로 인륜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박면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벌써 사람들은 시를 지어 이 박종필이란 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박면진은 소리 내어 이 시를 암송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개자추는
허벅지를 베어서
임금님의 굶주린 배를 채워드렸고
지금의 박종필은
살을 깎아
앉은뱅이 아우를 일으켰네
그 임금과 신하에게는
의리가 소중하였고
이 형과 아우에게는
우애가 돈독하였네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말하지 마라
저 하늘처럼
끝없이 빛나리라

“권문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7-07-01~1587-08-09

1587년 7월 1일, 권문해는 관아에 나아가 일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 맞이한 두 번째 부인 함양 박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독기가 몰려 구부렸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다. 이날은 아내에게 냉약(冷藥)을 쓰고, 또 침을 써서 터뜨렸다. 권문해는 다음날에도 관아에 나아가 잠시 공부를 수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도 권문해는 오한과 발열과 함께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아내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는 권문해는 칠곡에 사는 품관 이함(李諴)이 부종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청해오도록 하였다.
7월 12일, 이함이 궁중에서 파견된 약재 검사관 이운영과 함께 왔다. 이함과 이운영은 아내의 병을 습사(濕邪)로 인하여 온몸이 붓는 것 같다며, 부종에 효험이 있다는 곳을 찾아 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권문해는 아내를 데리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말하길 ‘혈종이 아니고 습종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함양 박씨의 무릎에 침을 놓아 피를 빼고, 대강활산(大羌活散)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찌르는 듯 한 통증을 참는 아내를 보는 권문해의 마음도 찢어졌다. 권문해는 수소문한 끝에 문경에 사는 내금위 진곤(陣崑)이 부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내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

김광계, 매원일기, 1626-10-18

1626년 10월 18일, 김광계는 밤까지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리더니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와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곧이어 중문까지 열어젖혔다. 김광계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침입자는 곧장 김광계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김광계는 한참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오랜 친구 이지형이었다. 본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즐기고 술자리도 가지며 절친하게 사귀던 사이였으나, 1623년 이지형이 그만 풍증(風症)이라 불리는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내면서 왕래가 끊긴 지 이미 몇 년째였다. 정신질환의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 시기 정신질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의해 감금되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형 역시 집안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었는데 어쩌다 틈을 타 탈출해서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 친구의 집까지 용케 찾아왔던 것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6-05-07~1616-05-10

1616년 5월 7일,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을 천남(川南)으로 피신시켜 놓고 김광계는 며칠 전 능동재사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막내아우 이직(以直)이 설사 증세까지 생겼다고 해서 몹시 걱정을 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로 가 보았다. 그러나 마을은 전염병 기운이 여전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노산(蘆山) 재종조부 집에 가서 약재를 얻어 들여보내기만 한 후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했다. 김령 재종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재종숙 김령은 지난 1월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챙기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월당에 도착해보니 덕여(德輿) 형 형제와 김참(金墋) 아재, 이일도(李逸道), 임지경(任之敬), 이의적(李義迪)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수재 전치(全偫)도 있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4-06~1616-08-12

1616년 4월 6일, 이행이 정임수와 함께 왔다. 정임수에게서 아들 김적의 천식약인 담박호(痰剝蒿)를 구했는데 찾아서 온 것이다.
5월 15일, 이날 저녁 김택룡이 큰 아들 김숙이 산양으로 출발했다. 동생 김적의 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6월 20일, 아침 무렵 중소(重紹)가 산양(山陽)에서 와서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니 아들의 병이 여전해서 김택룡은 걱정이 깊어졌다. 춘궁기가 이어져서 곡식이 모자란 터라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곡식을 나누어 보냈다.
7월 24일,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해서 그 집의 노비인 임인이 왔다. 김택룡은 부랴부랴 의원에 부탁해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임인이 돌아가는 편에 보냈다. 김택룡이 들으니 산양의 아들 편지가 영주[榮川(영천)]의 산장(山庄)으로 왔다고 하는데, 산장에서 잊어버리고 자신 쪽으로 전해주지 않고 있었다. 김택룡은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몰라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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