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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의병장 희순>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권숯돌 글, 정용연 그림저자 인터뷰


1. ‘의병장 희순’을 조명하게 된 기획 배경과 두 작가님이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가네 소사」란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적이어서
한국에 갔을 때 정작가님한테 사인을 받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죠.
기회가 되면 함께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쓴 짧은 단편 스토리를 보여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연말쯤 연락을 받았어요.
성남 문화재단이란 곳에서 만화가들을 모아서 독립운동가 33인을 조명해
(지금은 2차 팀이 꾸려지고, 3차까지 계획 중이라 100인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웹툰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일정이 빡빡해서 혼자서 글, 그림을 다 하기가 만만치 않다고
스토리 작업을 같이 했으면 하는데 어떠냐고 하셨어요.
처음엔 좀 주저하다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일이겠다 싶어 덤벼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처음에 정작가님이 말씀하신 인물은 윤희순 의사가 아니었어요.
모 언론사 기자였는데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보훈처 등급은 윤희순 의사보다 높은 분이었지만, 인간 군상 드라마로는 좋을지 몰라도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맞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여쭤보니 정작가님께서 그 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을 의뢰한 재단 측에서 인물을 선정해 작가들에게 추천한 것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제안을 드렸죠.
기왕이면 여성에다 아직 덜 조명된 분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요.
정작가님도 그 방향에 흔쾌히 동의를 하셨고 그래서 윤희순 의사를 그리게 됐습니다.




권작가님은 SNS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림들이 좋았습니다.
기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선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어서요.
글들도 마음에 들었고요.
알고 보니 일본으로 떠나시기 전 방송 일을 하셨더라고요.
한 번은 저에게 단편만화 스토리를 두어 편 보내오셨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성남 문화재단으로부터 독립운동가 웹툰 의뢰가 들어왔어요.
일정이 빠듯하기도 하고 협업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끌어내보는 기회로 삼자 싶었지요.




2. 의병장 희순의 기록 가운데, 작가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기록과 그것이 왜 인상 깊었는지, 또 어떻게 표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윤희순 의사가 직접 쓰신 의병가사도 물론 인상적이었지만
남기신 일생록을 보면 자식들에게 남기는 당부 말씀이 있어요.
그게 참 현대적이고 진보적이었어요.
예를 들어 아랫사람이 인사한다고 앉아서 가만히 받지 마라
천민이라도 내 집을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주고 반가이 보내 주거라
누가 무엇을 부탁하거든 선뜻 대답하는 것을 삼가 거라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죠.
작품 속에도 중간 중간 이걸 살릴 수 있는 에피소드를 팩션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분의 행적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적이라 꼭 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쓰신 󰡔일생록󰡕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글 속엔 일본어와 영어 번역체가 수두룩합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짧은 이 글속에서도 일본어 문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어요.
우리말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쪽은 아니지만 많이 오염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윤희순 의사가 쓰신 글엔 우리말이 오롯이 살아 있어요.
군더더기 없이 참 잘 쓴 글이란 생각이 듭니다.
국어시간에 배웠으면 좋겠어요.
『일생록』에 있는 문체를 작품 속에 담아내지 못한 건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서사 위주로 가다보니.




3. 전염병과 자연 재해 등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희순의 태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작은 일이라도 자기 자리에서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하는 태도,
그리고 그걸 혼자 자족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함께 하려고 시도하고 노력하는
당당하고 능동적인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다양성이란 미명하에 너무 많은 이해관계와 가치가 난무하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조차도
누군가에게 함께 하자고 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신중한 배려도 좋지만 때로는 그이와 같은 주저 없는 당당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우리와 동시대에 윤희순 의사가 살아 계시다면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디선가 환경운동을 조직하고 계실 거 같아요 ㅎㅎ)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던 그 분의 용기를 많이 배웠음 좋겠습니다.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퍼트려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한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북돋우며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냈으면 합니다.




4. 작가님이 생각하는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저로서는 특정 장면의 아름다움보다
책 전편을 통해서 사투리의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독자들이 느끼셨으면 싶네요.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는 어느 정도 친숙하지만
강원도 사투리는 생경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저도 이번 작품을 통해서 공부도 하고 발굴도 하면서
강원도 사투리의 아름다움에 반했거든요.
사투리와는 별개로 장면을 굳이 하나 고른다면 마지막 장면입니다.
가장 아름답다기 보다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장면이라
애착이 간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은데요.
희순할미가 일기를 쓰다가 결국 쓰러져 숨을 거두며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대목.
이 부분 대사는 실제 일기나 기록에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뭔가 그이에게 말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오래 했죠.
내가 그이라면 과연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하구요.
그리고 그 언어가 이 시대를 사는 어린 자손들에게
할매 또 캐캐묵은 소리하네 하고 여기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죠.
책이 나오고 나서 독서 리뷰에서 마지막 대사 인용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작가로서도 공들인 보람을 느낍니다.




단언컨대 쉽게 그린 컷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컷 한 컷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꼽으라면 중국으로 망명하며 마을 아낙들과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리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헌데 인쇄된 걸보니 색을 잘못 쓴 것도 있고, 인쇄가 진하게 나와
그 때의 감정이 살아나지 않더라고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저를 아끼시는 이희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마지막에 윤희순 의사가 쓰러진 장면을 꼽더라고요.
윤희순 의사의 일생이 그 한 컷에 응축돼 있다고요.
제가 생각해도 명장면 같아요. 만화작법의 교본으로 삼고 싶을 만큼.






5. 특별히 이 책을 권하고픈 독자가 있다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나요?





어린 학생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1860년생 희순의 일생 속에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으니까
아마 훌륭한 역사 교과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여성으로 태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달리느라
힘들고 억울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읽고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고요.
구한말의 역사하면 부끄럽거나 울화통만 난다는 분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습니다.
다른 독자 분들에게는 글쎄요. 위인전으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해요.
가까운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듯이 읽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틀림없이 더 많은 희순들이 있었을 테고
무수한 이웃과 동지들이 희순과 함께 했을 거예요.
의병장 희순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 역사에 대해 좀 더 겸허해지고
우리 안의 멋진 DNA들에 대해서 더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욕심이지만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아니 이 땅 너머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공동선을 위해 평생 동안 애쓰다 가신 분이 있구나하며
돌아봐주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요.
더불어 그 분이 활동했던 춘천에 윤희순 거리가 생겨
지나는 이들이 한 번쯤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의병장 희순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들을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조카의 관례, 빈으로 참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2-15 ~ 1611-03-08

1608년 2월 15일, 국상 때문에 천례(薦禮)를 정지했다. 오후에 임 참봉의 아들 임지경(之敬)이 와서 그의 어른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2월 18일, 임 참봉의 아들이 글을 배우러 왔다.
2월 22일, 오시쯤 임 참봉과 누이의 편지를 보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 때문이었다.
1611년 3월 6일, 임 참봉의 편지를 보니 8일날 아들의 관례에 초청을 하면서 서신의 의범(儀範)을 빈례로써 하였다. 그 내자되시는 누님이 따로 여종을 보내어 편지로 나를 청했는데 지극히 난처해서 감히 답장을 하지 못했다.
3월 7일, 오시에 임지대(任之大) 군이 갑자기 왔다. 다시 임 참봉 내외의 편지를 보니 나를 초청하는 것이 몹시 간절하였다. 임 군은 어제 저녁에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지금 명을 받들고 왔으니 몹시 미안하였다. 부득이 점심을 먹은 후에 임 군·이실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갔다. 지나가는 곳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빛이 무르익어 넘치니 경치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임 참봉댁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인들이 활개를 치고 지금 주상은 덕을 잃어 어떤 벼슬아치라도 직언을 하면 즉시 퇴출된다고 한다.
3월 8일, 아침에 홀기를 보니 빠진 부분이 많았는데 어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었다. 나는 힘써 빈을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이실을 찬자로 정했다. 밥을 먹고 행례를 마친 후에 법도대로 술 석 잔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누님을 뵈오니, 창녕 누님도 또한 와 계셨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드디어 주인과 작별하고 사안·민보·덕휘를 차례로 들러보고 이지·이실과 함께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 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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