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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500년 전의 맛과 멋, 보물
『수운잡방(需雲雜方)』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조선시대 경상북도 안동에서 저술된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음식요리서입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으며, 올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번 스토리이슈에서는 따끈따끈한 우리의 보물, 『수운잡방』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수운잡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서로 조선시대 우리 음식의 조리와 가공법을 소개하였습니다. 총 121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마다 재료의 사용에서 조리, 가공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책 제목에서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 문화를 뜻합니다.

“구름 위 하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

『역경(易經)』에 나오는 이야기로, 구름 위에 있는 하늘나라에서는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 걸맞은 요리 만드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누가 썼을까요? 수운잡방을 쓰기 시작한 인물은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입니다. 김유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유는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무예에 흥미를 보여 무과까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형인 김연(金緣, 1487~1544)은 중앙정계에서 우승지, 관찰사 등의 종2품 관직을 맡거나 강원도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맡으며 고향을 떠나 있는 기간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김유가 고향을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탁청정(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김유는 1544년(중종 39)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예안 고을을 지나는 손님들을 정중하게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김유와 교유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그 모임의 모습을 글로 남겼습니다.

“일신(一身)은 자족(自足)하여 좋은 곳 오천(烏川)에 밭도 있고 집도 있네. 주방(廚房)에는 진미가 쌓여있고 독 속에는 술이 항상 넘치도다. 제사(祭祀)하며 봉양(奉養)하고 잔치로써 즐겼네.”

퇴계 이황(李滉), 김유의 비문


이황의 글을 보면 김유가 부유한 오천 지역에 거주하였고, 그 집에선 항상 진미와 술을 넉넉하게 준비하여 손님들을 대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향에서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찾아오는 여러 친족과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던 일이 많아지자 김유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유는 음식조리서인 『수운잡방』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유가 『수운잡방』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 이후로 생각됩니다. 더욱이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음식과 관련한 일들을 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운잡방』은 이후 그의 손자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에 의해 완성됩니다.

『수운잡방』을 살펴보면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 편집되어 있습니다. 상편은 행서(行書)이고, 하편은 초서(草書)로 다른 글자체입니다. 상편은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 하편은 ‘계암선조유묵(溪巖先祖遺墨)’이라고 적혀 있어, 김유와 김령의 합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121개 항목 중에 상편 86항은 김유, 하편 35항은 김령의 저술입니다. 1603년(선조 36)부터 1641년(인조 19)까지 38년간 김령이 쓴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서 『수운잡방』 저술을 암시하는 글이 곳곳에 있습니다. 김령은 직접 “선조가 남긴 글을 내가 지금 정리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운잡방』은 할아버지 김유로부터 시작하여 손자 김령에 이르기까지 선비 가문의 비법이 담겨 있는 조리서입니다.

『수운잡방』에는 식초 담그는 법, 소주 빚는 법, 우유 만드는 법, 장 담그는 법 등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법과 장 담그는 법 등 요리에 관한 정보가 121개 항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항목별로 보면 상편에는 술 만드는 법이 41항, 국수 만드는 법이 1항, 식초를 만드는 법이 5항, 김치를 담그는 법이 14항, 고리를 만드는 법 1항, 장을 담는 법이 7항, 메주를 담는 법이 2항, 과자를 만드는 법이 1항, 장채 2항, 씨에 대한 것이 5항이며 기타 조리법도 7항이 있습니다. 하편에는 술 만드는 법이 18항, 국수 만드는 법이 1항, 김치 담그는 법이 3항, 과자를 만드는 법이 2항, 그리고 기타 조리법이 11항이 있습니다. 『수운잡방』에 기록된 요리들은 수운잡방 연구원에서 재현하여 실제 체험할 수 있습니다. 500년 전 조선의 음식을 현재의 우리가 맛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수운상차림(출처: 수운잡방사이트)

이뿐만이 아니라 『수운잡방』은 이제 21세기 영화시나리오로도 변신하였습니다. 작년 2020년에 한국국학진흥원은 창작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통 기록자료를 활용하여,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영화 시나리오 장르의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 공모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때 한 작품이 『수운잡방』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대상〕 강선주 작가

바로 대상을 받은 강선주 작가의 〔수운서생(需雲書生)〕입니다. 〔수운서생〕은 안동 최고의 미식가 ‘김유’와 먹는 게 제일 싫은 조선의 왕 ‘인종’의 먹방 사극입니다. 고고한 선비의 조리서가 21세기 문화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된 것이죠. 이 작품은 현재 영화사 ‘쇼박스’와 계약되어 작품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빨리 만나보고 싶어 현기증나네요. 마냥 기다리기 힘드니 작품의 줄거리만 살짝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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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이 없는 인종, 그러니 당연히 삶에 대한 미련도 욕망도 없다. 인종에게 삶이란 그저 무거운 짐과 업무에 대한 책임감뿐. 이런 인종이 먹는 것만 봐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조선 최고 프로 먹방러 김유를 만나 궐 안에서 수라를 둘러싼 좌충우돌 먹방 사극으로 펼쳐진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이 되었다. 지극한 효심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거식증을 앓는 인종. 인종의 외삼촌 윤임은 보다 못해 안동에 살고 있는 前이조판서의 아들 김만균에게 도움을 청하고, 김만균은 자신의 처조카이자 안동 최고의 미식가인 김유를 궐로 보낸다. 벼슬은 고사하고 정치라면 딱 질색인 김유! 오늘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피골이 상접한 인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김유는 점점 인종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오래 조선의 훌륭한 왕으로 남길 바란다.
김유는 결국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수라간으로 들어가 온갖 산해진미로 인종을 위한 밥상을 진두지휘하고, 인종과 함께 먹방 식사를 하며 속내를 터놓는 친구가 되는데…
반면, 어서 인종이 죽어 자신이 낳은 아들 경원대군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문정왕후. 그녀는 인종의 혈색이 나날이 좋아지고 궐 내 그에 대한 신임이 날로 높아지자 가만 보고 있을 수 없다. 문정왕후는 결국 인종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기로 하는데…!!
결국 김유는 인종의 식사 기미를 하고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고 만다.
김유가 쓰러지자 다시 거식증이 시작된 인종…!
김유는 어떻게 해서든 인종을 지키고 그의 왕위를 지켜주고 싶다.
과연 김유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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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이자 500년 전 최초의 음식조리서 『수운잡방』은 이제 눈으로 보고 입으로 즐기는 문화콘텐츠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선인들의 전통문화가 보고, 듣고, 체험하는 문화콘텐츠로 활용되는 모습까지 소개하고 따끈따끈한 보물 『수운잡방』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정      리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유교넷(http://www.ugyo.net)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수운잡방 (http://www.soowoonjapbang.com)
이성원 저,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수운잡방』, 민속원, 2019.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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