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여덟 벗과 함께, 팔우헌(八友軒)

“조금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하늘거리는 화이트 시폰 커튼이 물결처럼 바람에 날린다. 부드러운 크림 톤의 벽지가 거실을 따뜻하고 깔끔하게 보이게 한다. 그레이 소파 옆 혹은 벽걸이 텔레비전 옆에 몬스테라(monstera)를 둔다.”


몬스테라



몬스테라는 최근 인테리어 소품으로 자주 등장하는 식물이다. 그래서 화이트 콘셉트의 미니멀 인테리어에 하나의 식물을 둔다면 멕시코가 원산지인 몬스테라를 둘 것이다. 하트 모양의 넓은 잎을 가진 몬스테라는 ‘스위스 치즈 플랜트(Swiss-Cheese Plant)’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몬스테라의 잎 중간에 구멍이 나 있거나 찢어진 듯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스테라는 실내 가습과 공기 정화에 좋은 데다가 개성 있는 모습이 인테리어 효과를 높여 주어 ‘#미니멀인테리어, #플랜테리어, #반려식물’이라고 검색하면 아레카야자, 고무나무와 함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추천 식물이다.

‘반려식물’, ‘풀멍’, ‘식집사’, ‘텃테리어’ 라는 키워드의 주인공은 중·장년층이 아닌 MZ세대들이다. 식물을 키우며 경험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MZ세대들의 생을 더 풍요롭게 한다. 꽃이 주는 아름다움과 초록의 잎사귀가 주는 안정감은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려식물’이라는 말은 최근에 생긴 신조어지만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인 우리는 지금 이전의 시대에도 ‘풀멍’을 즐기며 ‘식집사’ 생활을 했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 선비들은 매화를 완상하며 매화를 시제(詩題)로 하여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시에 표현한 매화는 ‘강매(江梅, 강가의 매화), 설매(雪梅, 눈 속의 매화), 월매(月梅, 달빛 아래 매화), 우매(雨梅, 비 맞은 매화), 풍매(風梅, 바람 속의 매화), 죽매(竹梅, 대나무와 매화), 별매(別梅, 이별과 매화), 몽매(夢梅, 꿈속의 매화) 등 다양하다. 한 대상을 이렇게나 다양하게 표현했다는 것만 봐도 우리 선조들이 꽃과 나무, 자연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산거팔영(山居八詠)」이란 육언시(六言詩)를 지어 자신의 생각을 의탁한, 조선의 ‘식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삶과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봄, 매화 향기 가득한 산


매화

栽汝故近幽軒    그윽한 집 가까이 너를 심었으니
何所獨無芳草    어느 곳 풀인들 방초가 없겠는가
年年一番春雨    해마다 한차례 봄비가 내리면
要我巡簷共笑    처마 따라 거닐며 함께 웃자 하네


장택근의 『매화도(梅花圖)』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봄비 머금은 매화가 꽃망울을 열어 봄 향 가득 전하는 모습을 ‘함께 웃자 하네’로 표현한 이는, 산(山)·물(水)·바람(風)·달(月)·소나무(松)·대나무(竹)·매화(梅)·국화(菊)를 벗으로 삼은 팔우헌 조보양이다. 조선 시대 안동도호부의 속현이었던 감천현(지금의 예천군 감천면) 돈산 산골 사람인 조보양은 외가인 풍산의 우렁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이다.

할아버지 조봉징(趙鳳徵)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합격한 후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원익(趙元益)이고,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조보양의 형제는 조규양(趙葵陽), 조득양(趙得陽), 조의양(趙宜陽), 조몽양(趙夢陽)으로 다섯 형제다.

부모님의 교육 방법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아버지 조원익은 자식을 교육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회초리로 다스렸으며, 어머니도 언사와 안색을 빌리지 않고 반드시 행동거지를 법도에 따라 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배우고부터 내외와 경중의 구별을 알게 되어 집에 들어가면 형제간의 우애가 금옥(金玉)과 같았다. 또 형제간에 서로 도와가면서 학문을 넓히고, 예법으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여 덕업을 이루게 되었다.

조보양이 벗이라 칭한 ‘산(山)’은 마치 그의 부모와 같다. 우뚝 솟은 산처럼 굳건히 서서 자식에게 가르침을 주되 안온(安穩)함을 안겨 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推不去呼不來    밀어도 가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으니
氣深穩態偃蹇    깊은 기상 안온한 자태 웅장하네
不關秋葉春花    가을 단풍 봄꽃을 상관하지 않으니
可愛天然眞面    자연스러운 참 모습을 사랑할만 하구나


조선의 선비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혹자는 선비가 산을 찾는 이유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함이라 한다. 하지만 어쩌면 나무와 나무 사이, 이름 모를 풀꽃들 사이로 낮게 깔려 들어오는 햇살에서 공자와 맹자를 잠시 내려놓고 쉬고(休)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듣는 물소리




去去何時到海    흐르고 흘러 언제 바다에 이르는가
潺潺日夜不已    졸졸 밤낮으로 그침 없이 흐르네
旣浥餘波濯面    여울 물 움켜다가 얼굴을 씻어보니
更得淸音盈耳    맑은 소리 다시금 귀에 가득하네


조보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통감(通鑑)』을 배우는데 범례에 해박하고, 정통과 정통이 아님을 능히 구분하였다. 형 조규양(趙葵陽)과 더불어 문장이 뛰어나 주변 사람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하였다. 또한 소은(小隱)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등 성리서(性理書)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당시 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문하에서 『사서육경』, 『주자문집』, 『퇴계문집』 외에 『상수학(象數學)』 등을 배웠는데, 미세한 발단에서 시작하여 대의까지 통달하여 칭찬을 받았다.

퇴계가 「도산십이곡」 제11곡에서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라고 했듯, 조보양도 이 시에서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어떤 모진 풍파를 겪어도 동요하지 않고 ‘잔잔하게’ 쉼 없이 학문할 것을 다짐하며, ‘맑은 물소리가 귀에 가득’ 차듯 책을 읽고 글을 쓰고자 한 것이라 생각해 본다.

초여름 한낮, 잔잔한 여울물 소리 들으며 『골동록(汨蕫錄)』을 쓰던 조보양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쥘부채를 펼쳐 가볍게 부친다. 팔랑이는 쥘부채를 타고 어디서 솔향이 나는 듯하여 고개를 들어 건넛산을 바라본다.

소나무

始從毫末微妙    처음엔 털끝 같은 작은 싹이 돋아나더니
終得拂雲干霄    마침내 구름을 뚫고 하늘을 떠받치네
若不支了明堂    명당을 지탱하는 기둥 되지 않는다면
便要雲鶴來巢    구름 위에 학이 와서 둥지를 틀겠지


정선의 『반송도(蟠松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보양이 살았던 예천군 감천면에 ‘집의 재목(材木)’이 되지 않고, 학이 찾아와 머무는 ‘세금 내는 나무’로 유명한 ‘석송령(石松靈)’이 있다. 현재 수령 7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인 이 소나무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고 있다.

소나무가 석송령이 된 이야기는 소식이 끊긴 아들을 찾는 애끓는 부정(父情)에서 시작한다. 1920년대 말, 예천에 살았던 그는 자식의 생사를 알 수 없어 힘들어하다가, 죽기 전에 자신 소유의 땅을 이 소나무에게 이전 등기를 했다. 재산을 물려받은 석송령은 정식으로 토지대장에 이름을 올리고 재산을 소유한 최초의 나무가 되었다. 석송령은 본인 소유 땅에서 나오는 임대 소득으로 인근 학교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석송령의 그늘에서 마을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조보양이 살아생전 이 소나무 이야기를 들었다면, 부채를 내려놓고 붓을 들어 『골동록』에 ‘재산세 내는 소나무, 장학금 주는 소나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가을, 바람 끝에 핀 국화


여름이라고 탁족(濯足)만 하고 있을 조보양이 아니다. 학문을 이어간 그는,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1747년(영조 23)에 성균관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1773년(영조 49) 에는 조카 조석회(趙錫晦, 1727~1802)와 나란히 문과에 급제했다. 이에 영조 임금이 한 집안에서 두 명이나 급제했다고 칭찬하면서 직접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하였다. 관직은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예조 좌랑 용양위 부호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보양이 예조 좌랑이 되었을 때, 당시 권세가인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1749∼1776)이 예조 참판으로 오면서 자신의 임관례에 찾지 않았다 하여 조보양의 종을 대신 매질했다. 조보양은 “이 사람의 세도가 하늘을 사를 듯하여 이처럼 선비를 업신여긴다. 군자가 기미를 알아차려야 할 때이다. 흰머리의 낭관이 젖내 나는 아이에게 욕을 당하는구나.”라고 하며 벼슬을 던지고 귀향한다.

바람

不知何去何來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有時盈軒滿室    때때로 추녀와 방안에 가득 불어오네
來看松竹分披    바람 불면 소나무 대밭을 가르더니만
去認琴書靜寂    바람 자면 거문고와 책장 조용해지더라


일반적으로 ‘바람’은 시에서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된다. 윤동주의 「서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의 바람은 인정머리 없이 화자를 힘들게 하고, 향가 작품 「제망매가(祭亡妹歌)」 의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의 바람은 죽음을 몰고 오는 존재로 상징된다. 하지만 조보양의 ‘바람’은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아니다.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의 바람과 결이 비슷하다. 조보양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이 자면 자는 대로, 외부의 자극에 동요하지 않은 편안한 상태에 놓여있는 듯하다. 그래서 예조 좌랑의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국화

屈餐英陶汎杯    굴원의 저녁상 도연명의 술잔 속에 띄운 건
取其趣非爲食    정취를 취한 것이지 먹으려는 것이 아니네
若使只爲口腹    만약 그저 입과 배를 채우려고 한다면
合種數畝藜藿    몇 이랑의 여곽을 심는 것이 합당하겠지


장승업의 『국도(菊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초나라 충신이었던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 ‘아침에는 목란(木蘭)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꽃을 씹는다’라는 글귀가 있다. 그리고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상하걸(霜下傑)’이라고 하며 서리 속에서도 꿋꿋한 호걸이라 칭했다. 시의 첫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조보양은 오상고절(傲霜孤節)로서 칭송받는 국화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 만약 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면 ‘명아주와 콩을 심었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역경을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 꼿꼿한 절개, 고매한 인격을 상징하는 국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확고한 지를 알 수 있다.




겨울, 대소리 들리는 달빛 아래에 서서




天下誰家不照    하늘 아래 뉘 집인들 비추지 않으랴만
最是得意吾廬    내 집을 가장 좋아해 밝게 비추어주네
不怕白髮分明    백발이 분명해도 난 것 두려워하지 않고
獨臥藜牀看書    홀로 명아주 침상에 누워 책을 보네


청명한 날의 겨울 달은 유난히 밝고 크다. 고개가 아픈 줄도 모르고 젖혀 바라보고 있으면 아득히 먼 곳의 달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린아이가 ‘저 달이 나만 따라와’라고 신기해하듯, 백발의 조보양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시에 담았다. ‘내 집을 가장 좋아해’ 더 밝게 비추고 있는 달빛 아래, 책을 읽고 있는 조보양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어린아이 같은 조보양의 순수한 마음은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발현된다. 60세가 넘은 나이의 조보양이 90세의 노모 앞에서 때때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는 것에서 그의 때 묻지 않은 성품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부모님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에게 올릴 음식을 미리 맛보고, 맛난 것만 올리고, 오물이 묻은 부모님의 옷은 직접 빨았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완쾌를 기원하였으나 끝내 효과가 없자 크게 애통해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70세의 고령에도 죽을 마시며 여막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내리면 “솜옷을 입고 방안에 있어도 추운데 땅속에 계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추울까?” 하면서 통곡하였다 한다.



不須渭上千畝    위수 가의 대숲은 바라지 않고
自愛園中數叢    정원의 몇 그루라도 절로 사랑하네
歲暮不改顔色    세모에도 그 모습 변하지 않아
留帶采薇淸風    백이숙제의 맑은 풍모 지니고 있네


유덕장의 『묵죽도(墨竹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옛 시조에서 대나무는 계절적으로 겨울에 진가를 발휘하는 듯하다. 고려 말 은둔생활을 했던 원천석(元天錫)은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 굽다 던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대뿐인가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어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했다. 조보양의 이 시에서도 ‘세모(歲暮)’라는 표현을 통해 섣달그믐의 추운 날에도 변하지 않는 대나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대나무는 오랫동안 꽃을 피우지 않지만 자라는 환경이 갑자기 변하거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자손을 남기기 위해 대숲 전체가 함께 꽃을 피운다고 한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대부분의 대나무가 말라죽고 마는데, 많은 대나무가 한꺼번에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대숲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가 사실은 땅 속 줄기로 연결되어 몇 개체가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목숨 걸고 자손을 남기고 죽는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팔우헌 종택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한양조씨(漢陽趙氏) 집성촌에 있는 팔우헌 종택을 찾았다. 종택은 안채와 천곡서당, 팔우헌의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종택의 안채는 솟을대문을 마주 보고 있다.


팔우헌 종택 전경(예천군 감천면 돈산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팔우헌 종택 안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팔우헌 종택 안채 편액



솟을대문의 오른쪽에 천곡서당이 있다. 이곳은 조보양이 낙향하여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천곡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지금은 쇠락하여 기와 보수작업을 하려고 해서 천곡서당의 뼈대만 볼 수 있다. 중건해서 본래의 천곡서당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팔우헌 종택 내 천곡서당(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지금의 팔우헌 종택 천곡서당



천곡서당의 오른쪽 뒤에 별당 종택인 팔우헌이 있다. 1970년에 중건한 팔우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지금의 팔우헌은 대청에 시래기가 걸려 있어 정감이 갔다. 안채에서 팔우헌으로 가는 길에 개가 묶여있는데, 종택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며 짖는다.

팔우헌 종택 별당, 팔우헌


팔우헌의 마루(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팔우헌 편액(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나의 반려 식물


앞서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를 실천했던 팔우헌 조보양의 당호인 팔우헌과 그가 벗으로 삼았던, ‘산, 물, 바람, 달,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에 대해 쓴 그의 시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조보양은 이 여덟 가지의 자연물을 반려(伴侶)로 삼고 심신을 수양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반려로 삼은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것에 비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실천하고자 했다.

이곳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봄이 되면 ‘오피스 가드닝(Office gardening)’으로 작은 화분을 하나씩 선물해 준다. 작년에 금사철을 받았는데, 처음 이 주 동안은 매일 들여 다 보고 흙이 말랐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쁜 일정에 신경을 쓰지 못하다가, 야외에 금사철을 두면 더 잘 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화분을 건물 밖으로 데리고 가서 햇빛을 쐬게 하고, 비가 오면 비를 맞게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좀 지났을까?

힘 있는 잎사귀들로 금빛을 낼 줄 알았던 금사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새순이 올라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잎이 떨어져 있고, 작고 연약한 잎들이 겨우겨우 가지에 붙어 있었다. 빛, 물과 환기, 온도와 습도 등 식물마다 좋아하는 환경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금사철의 환경을 바꾼 것이다.

만약, 거실에 ‘몬스테라’를 둔다면 이제는 잠깐 애정을 쏟고 내 멋대로 판단하여 그것을 대하진 않을 것이다. 조보양처럼 ‘몬스테라’를 위한 시를 지어줄 정도의 마음으로 내 공간을 내어 줄 것이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유교넷 (https://www.ugyo.net)더보기
3. 조보양, 김용주 외 3명 역, 『18세기 한 영남 남인의 지적 관심과 기록 - 汨董錄』, 한국국학진흥원, 2011.
4. 최정윤, 『식물을 들이다』, 수작걸다, 2019.
5. 문화유산채널, 「석송령, 세금 내는 나무, 장학금 주는 나무」더보기
6. 김병직 외 3명, 『옛이야기 속 고마운 생물들』,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2017.더보기
7. 소현수·임의제, 「매화시제(梅花詩題)를 통해 본 매화 완상(玩賞)의 대상과 경관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3.
“물고기잡이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01 ~

1597년 4월 1일, 낮에 후전리에 사는 별감 김린, 교생 허충, 김애일 등이 오희문을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동쪽 큰 언덕에 올라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 주인인 시중이 국수를 만들어 찾아왔다. 언덕 위 공터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국수를 먹는데, 큰 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깊은 못을 만들어 놓아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의 북쪽은 낭떠러지 절벽이 둘러쳐 있었는데, 이것이 한바퀴 빙 둘러서 반대편에 이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생긴 것이 마치 누각의 머리같이 생겼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낭떠러지라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물결도 잔잔하여 티 하나 없이 맑은데다가, 햇볕도 내려 비치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물도 맑았다. 무리지어 노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다가, 옆에 따라온 아이에게 그물을 쳐서 몰게 하였는데, 몰기가 무섭게 물고기들이 번득거리고 엎어지는 것이 볼만하였다. 간단히 그물질을 하였는데도 60여 마리나 잡아 올리고, 또 낚시대를 가지고 오게 하여 낚으니 이번에도 40여 마리가 잡혔다.

잡은 생선 중 큰 놈을 골라 뼈를 발라내어 말려 놓고, 남은 잔 생선으로 탕을 만들어 밥과 함께 먹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는 것이 몹시 유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아까 잡아 말려놓은 큰 생선이 반이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서편에 사는 강아지놈이 사람들이 부산한 틈을 타서 반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아지가 몹시도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뛰어난 경치와 흥겨운 물고기 잡이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동고동락한 개 이야기”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919년 8월 22일. 장석영은 어제 항소심에서 극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이곳 대구에서 성주까지는 하룻길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집으로 가기로 하고 하루를 묵었다. 밤에 창을 열고 지난 몇 개월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떤 짐승이 창 앞에 마주하여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쫓아도 일어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거기에 있길래 다시 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석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개는 일본인의 개인데 집을 떠나 얼마간 있다가, 댁의 아드님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짓고 음식을 마련하여 밥그릇을 받들어 감옥으로 가기 전에 이 문을 나서면 곧바로 아드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일찍이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감옥 문 앞에 이르러 아드님이 문밖에 서서 밥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 이 개도 그 곁을 지키면서 머물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밥그릇이 나와서 아드님이 돌아오면 개도 따라서 돌아왔다가 이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떠났습니다. 하루가 일상이 되어 출옥하는 날에도 여기 와서 지키며 몰아내도 가지 않는 것은, 필시 아드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장석영 역시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혹 사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일본인이 개를 팔 리도 없지만, 판다고 하여도 값을 많이 부를 것이라 만류하였다.

결국 장석영은 개를 사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아들에게 떠날 때 강아지를 쓰다듬고 따뜻하게 작별의 정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준 감정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강아지를 사서 함께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또한 강아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아들의 효성을 전해 듣게 된 장석영은 한 번 더 감동을 자아내는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골린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하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닭의 발톱에 얼굴을 다쳐 숙모의 상여도 따라가지 못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2-10-16 ~ 1922-10-19

1922년 10월 16일, 남붕은 숙모의 장례가 내일 있어서, 종일 조문객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남붕의 집에서 기르는 닭을 도둑고양이가 물어가는 일이 있었다. 남붕은 놀라 흩어진 남은 닭들을 잡아다가 닭 둥지 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닭을 살펴보려고 둥지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며 남붕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닭의 발톱이 남붕의 눈 아랫부분을 할퀸 것이다.

남붕은 상처가 바람을 맞으면 부스럼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약을 바르고 나가는 일을 삼갔다. 다음날 새벽에 영구를 마을 밖으로 전송하였는데 하필이면 바람이 거세 얼굴에 바람을 맞을까봐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숙모와 조카의 심정과 처지에 있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저물 때에, 윤초(允初) 아재의 모친 장사가 내일 있기 때문에 곡을 하러 가야 했는데, 상처 때문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다녀왔다.

10월 19일에는 숙모의 빈소에 가서 재우(再虞)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굴이 상처로 부어서 상여를 따라가지는 못 하였다.

“소를 가둔 죄로 파직당한 나무송(羅茂松)의 이야기”

김령, 계암일록, 1631-08-30 ~

1631년 8월 30일, 날씨는 종일 맑다가 흐리기를 반복하고, 늦가을 동풍이 몹시 쌀쌀하였다. 저녁 무렵 김령은 전에 예안 현감이었던 담양에 사는 나무송(羅茂松)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그가 파직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 봄 2월 무렵 김시익의 여자 종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소를 훔친 일이 있었다. 본래 흰 점을 가진 소였는데, 소를 훔친 자는 이후 일이 들킬까 염려하여 소의 흰 점을 검게 물들였다. 김시익의 또 다른 종 논복이란 놈도 소를 훔친 자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소가 새로 생긴 것을 관아에 고하고 입안(立案)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듣고 난 후 당시 예안 현감이었던 나무송은 곧 소를 데려다가 물로 씻어보도록 명령하였다. 과연 소 주인의 말대로 검은 부분이 물에 씻기자 곧 흰빛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를 옥에 가둔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형을 가하여 심문하였다. 또 장물인 소도 관아에 가두었다가 곧바로 소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현감의 처사에 매우 감사해하고 소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무송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사헌부 관원이 나무송이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죄로 삼은 것이다. 억울한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준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 분명한데,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나무송의 허물이라고 윽박지르니 나무송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로 나무송이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소 한 마리를 잠시 가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무송은 아직도 그때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듯하였다. 현명한 송사로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고도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니, 김령은 진심으로 나무송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소를 가둔 것을 문제 삼아 현감을 파직시킬 기발한 생각은 대체 누가 했는지, 그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