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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과거에 미래를 쓰다


〈웹툰 『정년이』〉 (출처: 네이버)


장안이 온통 《정년이》다. 드라마 《정년이》의 인기는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았고 방영 전부터 이미 그 인기가 예상되었다. 원작인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 그림 나몬)가 지닌 화제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 서사에 대한 관객의 갈증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정년이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극단에서, 여성 관객들 앞에서, 전통 소리로 채운 무대를 펼치는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무대든, 매체에서든 어서 보고 싶은 내용이었다. 작년 2023년, 국립극장에서 이자람이 작창을 맡은 창극 버전의 《정년이》가 올라오자 매진을 기록하며 ‘피켓팅’ 사태가 벌어나기도 했다. 그만큼 드라마 《정년이》는 큰 기대를 모았고 드라마는 시청률을 매회 갱신하며 그 기대에 보답한 듯 보인다.

정년이가 별천지라 부르며 그 안의 별이 되고 싶다고 했던 여성국극단은 해방 후인 1948년, 전설의 소리꾼 박녹주와 임춘앵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올린 《옥중화(獄中花)》가 시초다. 박녹주는 그 자신이 소리의 전설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평생을 무도하고 뻔뻔한 아버지에게 시달렸고 또한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의 평생의 스토킹 대상으로도 유명했다.


〈소리꾼 박녹주〉 (출처: 국악신문)


김유정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좌절하고 분노하여 눈에 띄면 죽이겠다는 혈서를 몇 번이고 거듭 보낼 정도로 무시무시한 스토커였다. 스물아홉에 가난과 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유정의 방 벽에는 ‘녹주 너를 사모한다’라고 쓰인 혈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마음 한 조각 준 적 없던 박녹주로서는 모골이 송연할 일이지만, 당시 욕을 먹은 것은 김유정이 아니라 피해자인 박녹주였다.

김유정의 친구 안회남은 김유정 사후에 박녹주를 찾아가 네가 유정을 죽였다며 행패를 부렸다. 김유정이나 안회남에게 박녹주는 대중 앞에 모습을 내놓고 연희를 하는 공용의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권번에 적을 두어 기적을 가졌던 박녹주였기에 그를 기생으로 칭하며 몸 파는 여자 따위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녹주는 감히, 그들의 감정을 무시할 자격이 없는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취급은 사실상 같은 소리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 일찌감치 권번에서 독립해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여성 소리꾼들이지만 하나같이 기생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기생이라는 직업이 본래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공적인 연회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예술가라는 점이다.


〈권번 졸업생 사진. 사진 아랫부분에 ‘주식회사 조선권번 예기양성소 가곡졸업생 일동. 소화 십삼년 시월 십육일’이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였기에 ‘소화 십삼년(1938년)’으로 표기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생이라고 해서 모두 몸을 파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비록 신분제도 안에서 기생은 노비였지만 몸을 파는 기생은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취급을 받았다. 기생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예악을 담당하였기에 양반들이 사적으로 기생을 부르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다. 지방에 있는 기생들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지방관리는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고 실제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 해도 다른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그 기생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기생은 국가의 재산이었기에 이는 꽤 큰 흠이자 죄가 되었다. 기생이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 더 예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거나 임금의 명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관기가 해체되자 일제는 자신들의 ‘유곽’ 제도를 기생에게 강요하려 하였다. 몸을 파는 여성들에게 부여하던 급수를 기생들에게도 강요하려 했으나 기생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기생들은 일제의 통치하에서도 그들이 지닌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고 단순히 몸을 파는 직군의 여성들과 같은 취급을 거부했다. 학문과 예술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워, 평양이나 한양·군산·남원 등의 큰 도시에 있는 권번에는 반드시 기생 학교가 있었다.

그 당시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소리를 배우고 춤을 배우려면 권번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권번은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기획사와도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안의 학교에 들어가려면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몰락한 중인 가문의 여성들이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권번의 기생 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학비도 만만치 않아서, 이를 마련하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생의 등급을 나누는 일패·이패·삼패라는 말은 일본에서 사용된 용어로 실제로 일제시대 한국 기생들을 대상으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영화 《해어화》의 한 장면. 영화는 일제강점기 경성 제일의 기생 학교 ‘대성권번’의 두 예인(藝人)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생이 ‘국가’라는 높은 담장 너머로 나와 권번을 차리고 활동하자 곧바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요정으로 기생을 불러 ‘기생 놀음’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돈’으로 인해 기생의 평판이 망가졌다. 일반적인 대중은 기생이 뭘 하는 직업인지조차 몰랐기에 기생은 그저 이쁜 옷 입고 술 따르며 춤과 노래 좀 하는 여자인 듯 여겨졌다. 이런 인식은 갈수록 더 나빠져서 해방 이후에는 술 따르고 몸 파는 여자를 기생이라 불렀고 과거 기적에 몸 담았던 예술가들은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후죽순으로 생긴 요정이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때문에 여성 전통 예술가들은 같은 전통 예술계에서도 천대받고 무시받으며 어떤 의사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하곤 했다.

독보적인 소리꾼이었던 박녹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설움을 해소하고자 만든 것이 여성국악동호회였고 하나부터 열까지 여성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남자 배역 또한 당연히 여성이 맡았다. 국극을 통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 전통적인 소재는 물론 오페라 《투란도트》도 각색하여 전통극으로 재탄생했다. 국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전통적인 소재뿐만 아니라 세계로까지 소재를 탐색했다. 일본의 유명한 여성극단 ‘다카라즈카’와 비교되곤 하지만 다카라즈카가 보더빌 시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기원으로 하는 철저한 서양풍(그러나 일본인의 상상 속의 서양풍)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국극은 서양이 아니라 전통의 소리를 바탕으로 100% 여성 연기자들이 판을 벌였다는 사실에서 큰 차이가 있다.


〈1950년대 여성국극의 최고 스타 故 조금앵〉 (출처: 아시아경제)


하지만 드라마 《정년이》에서도 그려지듯이 국극의 전성기는 정년이의 바람만큼 오래 가지 못했다. 드라마의 배경은 1950년대 중반인데 이 시기는 국극이라는 별이 마지막으로 크게 빛나던 시점이었다. 국극의 인기에 수많은 국극단이 생기면서 소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을 키워낼 시간이 없었기에 다음 세대를 키워내기 전에 등장해버린 TV와 영화의 공세 앞에서 국극단의 인기는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드라마 《정년이》 포스터〉 (출처: tvN)


하지만 웹툰 《정년이》는 이러한 현실을 바꿨다. 놀랍게도 국극이 기적처럼 번성해 현재까지 인기를 끄는 장르가 되었다는, 그야말로 판타지이자 희망 그 자체인 결말로 끝낸다. 그리고 이 결말에 현실이 응답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정년이』 덕분에 오늘이 반응한 것이다. 응답은 빨랐다. 관객이 원했다. 웹툰 속의 무대를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드라마는 그 바람을 절반 정도 채워주었다. 하지만 웹툰 속의 소수자인 부용을 삭제하면서 논란이 됐고 부용이 사라지면서, 그가 떠받치고 있던 서사도 갈기갈기 찢기며, 모든 인물들이 정년이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희한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극만으로 보면 《정년이》는 제 역할을 해냈다. 국극에 그동안 비추어지지 않았던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여성국극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도로 취급받으며 문화유산으로조차 등록되지 않았던 국극이 이제야 비로소 시대를 만났다. 남은 것은 좋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다. 과거의 장점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콘텐츠는 앞을 향해야 한다.


〈지난 8월 막을 올린 《레전드 춘향전》〉 (출처: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지난 8월, 경기도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레전드 춘향전》이 무대에 올랐다. 93세의 이소자 배우(변학도 역)가 93년생 황지영 배우(춘향 역)와 함께 연기했다. 여성국극 제작소에서 만드는 이 작품에는 여성국극 2세대, 3세대 배우들이 함께 섰다. 그 말은, 인기가 있든 없든 여성국극이 아주 사라진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12월 3일, 국가유산진흥원에서 올리는 《傳說이 된 그녀들》이 올라온다. 1부와 2부로 나뉜 이 공연은, 1부에서는 원로 배우들과의 대담형식의 토크쇼, 2부에서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를 각색한 《선화공주》가 공연된다. 정년이가 지핀 불길이 군불처럼 오래오래 타오르기를 기대해본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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