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부터 지인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강릉에 가서 찍은 일출 사진과 함께 인사를 전했다. 용광로처럼 빛나는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었다. 수천 명이 동시에 사진을 찍었지만, 내가 직접 촬영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내가 직접 찍었다”라고 밝히며 하나하나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보낸 친구 중에는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한 녀석도 있었다. 오랜만의 안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곧 최근 기자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 주제는 넘어갔다. 이제는 보도자료를 모두 AI에게 맡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 들어온 신입 기자보다 GPT를 더 신뢰한다는 내용도 전해 들었다. 그러다 어느새 “내 일자리도 곧 대체되는 건 아닐까”하는 막연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클로바노트를 소개하는 웹페이지〉 (출처: 클로바노트)
사실 최근 몇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부터 상품 상세 페이지 초안을 AI에게 맡겼고, 그걸 바탕으로 업체와 미팅해 최종 상세 페이지를 완성했다. 녹취 파일은 클로바노트로 옮겨 텍스트로 풀고, 그 문서를 다시 GPT에게 넘겨 요약과 정리를 부탁했다. 이후 관련 서류를 스캔했다. 그리고 그 스캔 문서에 대해 질문하면 자동으로 답변해 주는 GPT를 만들어 팀원들과 공유했다. 내가 부재중이더라도 미팅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GPT가 대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예전이라면 몇 시간을 들여 팀원들과 공유했을 일들이 빠르고 간편하게 해결되었다.
최근에는 전자책 제작 의뢰가 들어와, 목차와 줄거리 요약을 GPT에게 먼저 맡겼다.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내가 기억하는 내용과 대조해 책 표지 디자인 방향도 정했다. 과거 같았으면 ‘크몽’이나 ‘숨고’ 같은 국내 전문가 플랫폼 사이트를 활용했을 텐데, 이제는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 인력과도 손쉽게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이트를 직접 찾고, 메일을 보내는 일도 AI 번역을 활용하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하는 자동화는 아주 작은 축에 속한다. 영상·사진 분야는 말 그대로 ‘개벽’ 수준으로 일하는 모습이 바뀌고 있다. 자동 자막 생성부터, 이미 촬영한 모델에게 AI를 활용해 다른 옷을 피팅시키는 작업, 더 나아가서는 아예 영상을 통째로 AI가 만들어내는 일도 가능해졌다. 자동화와 분업화, 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협업이 현실이 된 것이다. 국내에만 한정됐던 외주 분업, 특히 노동집약적 업종일수록 해외, 특히 인건비가 저렴한 개발도상국 전문가들과 협업할 가능성이 커졌다.
당연히 AI가 일을 돕는 만큼 진짜 인간이 했을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보도자료를 타이핑하거나, 단순히 사진을 찍고 ‘누끼’를 따는(주요 피사체만 남기고 배경을 지우는) 업무를 하던 이들이 직장을 잃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컴퓨터로 노동집약적 작업을 하던 이들마저도 점차 해외 인력으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GPT를 활용하는 내 기자 친구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AI의 등장은 역사에 처음 있는 전환도 아니다.
19세기 중반, 사진기의 발명은 예술계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화가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이른바 ‘미메시스(mimesis)’에 열정을 쏟았다. 그림은 현실을 재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사진기가 등장하며 더 정밀하고 빠르게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했다. 그러자 화가들의 입지가 흔들렸다. 특히 초상화나 풍경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사진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 연작 중 《수련이 있는 연못》〉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그러나 예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기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인상주의였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같은 화가들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순간의 감각과 분위기를 표현하려 노력했다. 빛과 색,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며 ‘사실 그대로’가 아닌 ‘느낌 그대로’를 담아내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이들은 사진기가 구현할 수 없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과 감각을 캔버스에 담아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었다. 예를 들어, 모네의 ‘수련’ 연작은 시간대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미묘하게 포착해 단순히 수련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순간의 생동감을 전달했다. 이는 예술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을 탐구하는 도구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당시 리얼리즘 화가들이 그러했듯, 기술의 큰 변화 앞에서 삶도, 예술 사조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다.
〈GTC 2024〉 (출처: NVIDIA)
2024년 3월, 엔비디아(NVIDIA)의 개발자 연례행사인 ‘GTC 2024(GPU Technology Conference)’에서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 CEO는 “5년 안에 AGI(범용 인공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개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강(强) 인공지능’으로 불렸던, 인간과 유사한 지능 수준을 가지고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을 가리킨다. 인간과 AI의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이 5년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25년 1월, 오픈 AI의 개발중인 ‘o3’ 모델이 AGI에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AI가 가장 잘하는 것은 창의적인 “창작”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 왔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에서조차 AI가 인간보다 월등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강 인공지능’(AGI)이 완성된다면, 그 이후로는 인간의 창작물과 로봇(또는 AI)의 창작물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출처: Amazon)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35년에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술적 복제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며, 특히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는 예술작품이 지닌 고유성과 유일무이함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분위기를 말한다. 이는 작품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만 존재한다’는 사실, 즉 작품의 진정성과 역사성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는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경험되는 것이 중요하며, 바로 이 점이 아우라를 형성한다.
하지만 사진기와 같은 기술적 복제 장치는 원본의 고유성을 해체하고 아우라를 약화시킨다고 벤야민은 보았다. 전에는 특정 장소에서만 감상할 수 있던 그림이나 조각이, 사진 기술을 통해 어디서나 복제되어 재현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 예술작품이 지녔던 전통적 권위와 경외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예컨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을 스마트폰으로 보든, 컴퓨터로 보든, 극장에서 보든 모두 ‘원본’처럼 여겨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결과물에 대한 ‘오리지널’의 경외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기술 복제가 ‘예술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던 예술을, 이제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전통 예술사조를 믿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변화일 수도 있으며, 고급 예술의 ‘위엄’을 중시하던 이들에게는 슬픈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AI 같은 기술은 사진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체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원본의 아우라’만 해산했지만, 이제는 ‘인간만이 고유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역까지 해산한다. 다시 말해, 원본을 해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해체하는 것이 AGI의 궁극적 미래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 왔던 ‘인간의 아우라’가 해체된다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사실 나는 강릉에 갈 필요 없이 몇 초면 AI로 생성한 가짜 일출 사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강릉에서 찍어왔다”고 말해도, 누가 보아도 진짜 일출 사진과 쉽게 구분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하나하나 카톡에 답하지 않고, AI에게 자동 응답을 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시간씩 차를 몰아 강릉에 가서 사진을 직접 찍고, 그것을 지인들에게 보냈다. 좋은 성능의 카메라도 있었지만 굳이 작은 스마트폰과 액션캠을 들고 촬영했다. 내가 생각하는 ‘시대의 콘텐츠’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최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을 보면, 비슷한 콘텐츠들이 수천~수만 건씩 복사되어 올라오고 조회수를 잠시 끌어올린 뒤 사라진다. 앞으로 AI 콘텐츠 역시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끊임없이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AI가 만드는 모든 콘텐츠가 인간의 그것보다 더 뛰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국경의 장벽도 사라져, 내가 꿈꾸는 모든 콘텐츠가 저렴한 가격에 곧바로 생산되는 시대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강릉으로 갔던 이유, 그리고 그곳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냈던 이유는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이다. 사진기가 등장했을 때 화가들이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감각’을 그리려 했듯, 아무리 AI가 완벽한 이미지를 뽑아낸다 해도, “그날의 시간을 내가 직접 박제해 누군가에게 전한다”는 행위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는, 단지 예술작품의 ‘원본성’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이 ‘경험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때 발생한다. 내가 강릉의 바다 앞에서 직접 본 일출, 수천 명이 함께 사진을 찍어도,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담아냈다는 점 그 자체가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이미 수천 명이 찍어 SNS에 올렸을 일출이라 해도, 남는 것은 결과나 원본의 아우라가 아니라 ‘행위의 아우라’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이제 ‘현대 예술’의 어떤 지점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언가를 창작하고, 휴머니즘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이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정’ 일지도 모른다. 강릉에 가기 위해 새벽 1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몇 시간을 노숙하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해변에 모여드는 수천 명 속에서 지인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사진을 찍어 그 장면을 보낸다는 것. AI가 만들어 낸, 나보다 훨씬 더 웅장한 일출 사진은 결국 하나의 ‘결과물’ 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의 고단함과 설렘, 그리고 지인들과 나눈 짧은 대화, 또 그 순간을 오랜만에 전하는 안부에 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여정’이야말로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두 가지다.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과정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리터러시’의 여정이다. 아마도 그 두 가지가 모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리얼리즘 작가들이 그랬듯, 원본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랬듯, 우리만의 고유한 길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 떠나는 과정’과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작은 일출 하나를 선물로 보낸다.
(출처: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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