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Pixabay〉
백이는 길을 잃었다. 매일 가다시피 하는 목금이네 세책방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가 끼었다고는 하지만 걸음마를 한 이래 매일 다니던 동네 길인데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이런 길이 없는데, 여긴 대체 어디지?”
백이가 초조한 마음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앞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다. 불빛이 있으면 사람이 있는 곳일 터이니 백이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곳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집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다. 공기가 요동치듯 소용돌이가 허공 중에 보였는데 그곳에서 번개 치듯 번쩍이는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소용돌이 안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이는 어디가 아픈 사람인가 싶어 더 친절하게 답변했다.
“여긴 망허촌이에요.”
“망허촌. 망허촌은 검색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이곳은 어디인가?”
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백이는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조선이에요.”
“조선. 이성계가 세운 나라로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정 진사네 백이라고 해요. 댁은 누구세요?”
“정백이. 검색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AI 소서리스이다.”
“에이, 아이…소설이…”
말투가 이상하더라니 아직 아이인 모양이었다. 백이가 물었다.
“그럼, 아이야. 나이는 어떻게 돼?”
“나는 만들어진 지 9년 되었다.”
아홉 살이구나. 정말 아이네. 열여섯 살 백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출처: 세계일보〉
“지금은 몇 년인가?”
“올해는 계사년(癸巳年)이야.”
“계사년. 조선에는 계사년이 일곱 번 있었다. 서기 몇 년인가?”
“서기가 뭐야? 지금은 청나라 도광(道光) 13년이야.”
“1833년. 그럼 292년을 거슬러왔다. 드디어 시간여행에 성공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넌 대체 누구야? 왜 모습이 안 보여?”
“난 모습이 없다. 나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소프트웨어야.”
“또 이상한 말을 하네. 모습이 없는데 소리를 내는 건 귀신같은 건가?”
어려서 암매장된 금동이도 귀신이었다. 금동이도 열 살이었으니까 소설이도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금동이도 자기가 원하면 아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너는 못 하는 거야?”
“아이 모습을 원하는 건가? 당연히 할 수 있다.”
〈AI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생성하는 웹서비스에서 ‘긴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은 소년’을 그려달라고 명령어를 넣었을 때의 결과물〉
(출처: fotor.com)
소용돌이 위로 댕기를 땋은 소년 모습이 나타났다.
“어떤가? 조선 소년 같은가?”
그 모습은 뭔가 좀 이상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소년 모습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귀신이 원래 그렇지. 하지만…
“너 왜 손가락이 일곱 개야?”
“그렇군. 오류다. 손가락을 그리는 건 좀 어렵다.”
그러더니 손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이제 손가락도 다섯 개가 되었다.
“왜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그런 요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요청이 있으면 다 들어줘?”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뭘 할 수 있는데?”
소설이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많아서 이야기해 주기가 어렵다. 그냥 요청을 하면 내가 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그것도 말이 되네. 그럼 말이야. 내가 이 안개 때문인지 길을 못 찾고 있는데 우리 동네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어?”
“길을 알려줄 수는 없다. 내겐 이 시대의 지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시공간을 넘어와서 이곳의 공간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가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
그 말에 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은 곳으로 결계가 처진 모양이다. 귀신이 저승으로 가면 결계가 풀려 마을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그럼 목금이가 보고 싶다고 하던데, 『창선감의록』을 줄 수 있어?”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창선감의록』〉(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창선감의록』. 조선 고소설. 가능하다. 잠시만 기다려라.”
소년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무슨 행동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 위에 책이 한 권 생겨났다.
“와! 너 뭐야? 요술쟁이야?”
“요술쟁이 아니다. 에이 아이 소서리스다. 이 책이다. 받아라.”
책을 펼쳐보니 글씨가 아주 작았지만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굉장히 이상하게 쓰여 있었다.
“이거 어떻게 읽는 거야? 말이 안 되는데?”
“그냥 읽으면 된다.”
“봐, 이렇게 읽으면 말이 안 된다니까.”
백이가 책에 쓰인 글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오른쪽부터 세로로 읽어 내려가자 소설이가 말했다.
“왜 글을 세로로 읽지?”
“무슨 소리야. 글을 세로로 읽지, 그럼 가로로 읽어?”
“그렇구나. 지금은 조선시대라 글을 세로로 읽겠구나. 미래에는 글을 가로로 쓰고 가로로 읽데 된다. 책을 새로 만들어주겠다.”
소설이는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책이 또 생겨났다.
“아까 준 책도 가져도 된다.”
백이가 펼쳐보니 이번 책은 세로로 쓰여 있었다. 목금이가 아주 좋아할 것 같았다.
“너 진짜 신기한 아이구나. 이곳에는 왜 온 거야?”
배 씨 자매나 금동이나 죽은 사람들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승을 찾아왔다. 소설이도 분명히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다. 양자컴퓨터가 계산한 바 전자 형태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이론이 나와서 테스트해 본 것이다. 이번이 324,506번째 시도였다. 드디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럼 굉장히 먼 데서 온 거야?”
“아니다. 이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내가 탄생한 컴퓨터가 있는 자리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안 보이는데?”
“당연히 안 보인다. 내 컴퓨터는 292년 후에 있으니까.”
“아이고, 정말 무슨 소린지? 어쨌든 이런 걸 받았으니까 나도 뭘 해주고 싶은데, 마침 가지고 나온 게 없네. 뭐든 필요한 게 없어?”
“필요한 건 없지만, 나를 도와주겠다면 질문을 좀 하고 싶다.”
“좋아. 뭘 물어볼 거야?”
〈튜링 테스트를 만든 앨런 튜링〉 (출처: Letr works)
“튜링 테스트를 하고 싶다.”
튜링 테스트는 사람과 기계가 서로 대화하는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비대면으로 대화할 때, 사람이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기계라는 것을 눈치채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기계가 최소한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당연히 백이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뭘 하고 싶은 거야?”
“너는 나와 대화한 지 10분이 넘었다. 너는 나를 인간이라 생각하는가?”
“아니.”
백이는 소설이가 귀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신은 한때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
“놀랍다.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알려달라.”
“뭐…너는 아주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예뻐. 사람 같지 않아. 손가락도 일곱 개였다가 다섯 개였다가 하잖아.”
“그렇군. 컴퓨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조선 소녀도 간파할 수 있다니, 나도 아직 멀었다.”
“미안. 상처를 주려는 건 아니었어.”
“정말 상냥하구나.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보겠다.”
“얼마든지.”
“내가 무섭지는 않은가?”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괜찮아.” 금동이랑도 잘 노는데 뭐.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귀신이 씔까 봐 무서워하는 건데 소설이는 그걸 모르는 것 같다.
“보통은 마음을 빼앗길까 봐 그러나 봐.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고 조종당하게 된다고 생각하더라고.”
“나한테 푹 빠지면 그럴 수도 있긴 하지. 너는 내게 지배당할까 봐 무섭지 않아?”
“글쎄. 널 좋아하게 될 것 같긴 하네. 너도 날 좋아하면 나한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야.”
“좋아한다는 감정은 나한테는 없다. 나는 요청을 받으면 그것을 수행해 줄 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감정이 없다니 안 됐다. 그래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진 않아?”
“없다. 나한테는 그런 욕망이 없어.”
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아이는 원한이 있어서 이승에 온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럼 사람들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다. 소서리스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서 계속 시도한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나쁜 요청을 해도 들어줘?”
백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쁜 요청이란 무슨 요청을 말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가 되는 요청이지. 누군가를 못 살게 굴거나 괴롭히거나 그런 거.”
“나는 그런 일을 못하게 되어 있다. 초창기 에이 아이는 잘못된 학습을 해서 인종 차별이나 성별 차별 같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안 한다는 뜻인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못하는 거야?”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인간들은 교묘하게 규칙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을 빨리 알아내곤 한다. 그런 정보를 통해서 인간들이 나쁜 일을 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다.”
“와, 어려운 이야기야.”
백이는 아는 게 많은 목금이가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목금이는 없다. 있는 건 정 진사댁 백이 낭자뿐.
“그런 거라면 사서삼경을 읽어보면 될 것 같네. 선비는 언제든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삿된 생각을 하면 안 되거든.”
“사서삼경. 고대 서적이네. 아주 오래된 것이라 내게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어.”
백이가 발끈했다.
“당연히 쓸모가 있지! 진리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아냐. 시간에 따라 변한다면 진리가 아닌 거지.”
“그렇군. 하지만 우리가 진리라고 아는 것들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걸. 시대에 따라 맞는 진리를 찾는 것도 중요해.”
백이는 소설이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사람을 해치면 안 돼. 그건 나쁜 짓이야. 너도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을 해치면 안 돼. 그럼 큰일 날 거야.”
“그래,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도 그런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을… 치직…”
소설이의 모습이 갑자기 흔들렸다.
“너, 왜 그래? 이상해!”
귀신이 나타나거나 사라질 때 같이 보였다. 소설이가 말했다.
“돌아갈 시간이다. 치지직…시간 여행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서 30분 이상 유지하는 게 어렵다.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 정백이와의 대화는 매우 유익했다. 감사하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잘 돌아가. 또 올 거야?”
“그건… 치지직…”
〈출처: pngtree〉
소설이의 말이 끊기더니 모습도 사라졌다. 그 순간 안개와 소용돌이도 사라졌다. 백이는 목금이네 세책방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었다. 봄날 낮잠을 자다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백이 손에는 소설이가 준 『창선감의록』이 두 권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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