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빈 (‘미삼이’팀 최종 피칭자)
전공 필수 수업에서 무려 ‘공모전에 참여하기’를 과제로 해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우리는 미리 친한 동기들끼리 팀을 만들어 함께 수강신청하자는 전략을 짰다. 운이 나쁘면 ‘팀플 빌런’을 만날 수도 있으니, 적어도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 1인분씩은 해낼 수 있는, 한마디로 검증된(?) 사이끼리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학점 사수를 위해 미디어학부 23학번 네 명이 모였다. 그래서 팀명은 ‘미삼이’! 그때는 알지 못했다. 2025년을 이들과 함께 꽉꽉 채우며 지지고 볶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첫 회의 날, 우리는 각자 스토리테마파크를 샅샅이 훑어 매력적인 소재들을 잔뜩 들고 왔다. 난항이 예상되던 회의였지만, 의외로 하루 만에 만장일치로 마음을 빼앗긴 소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정감록 원본을 찾아 해석하고, 각종 다큐멘터리와 기사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우리만의 정감록 백과사전을 만들며 우리의 이야기에 가져올 핵심적인 내용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미디어학부 학생이었기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영화나 드라마로 출품 분야가 좁혀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각자의 관심사와 흥미를 하나씩 꺼내놓고 토론을 거듭하다 보니, 단순한 서사물보다 게임적 요소를 결합한 ‘이머시브 추리연극’이 우리 팀의 색깔과 가장 잘 맞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선택으로 인해 서사 뿐 아니라 관객 참여 방식, 단서 설계, 동선, 무대 세트에 이르기까지 기획이 필요한 영역이 두세 배 많아졌지만, 덕분에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자유롭게 확장될 수 있었다.
공모전 2차 면접을 앞두고 떨리는 대기실에서
(왼쪽부터 팀장 공하연, 팀원 이서연, 이아선, 박예빈)
공모전 선발을 위한 심사 과정부터, 최종 피칭까지 우리는 대부분의 작품 기획 과정을 모두 함께했다. 누군가가 주도권을 가지고 끌고 갔다면 의사결정은 더 빨랐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전부 듣고 논의하며 한 단계씩 진행하기로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의견이 있더라도, 팀원 중 누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심사위원이나 관객들도 같은 지점에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모든 의견은 반드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같이 공유할 수 있었다.
회의 기록을 차곡차곡 남긴 노션 페이지의 일부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우리끼리 회의를 하고 각자 맡은 파트를 준비한 뒤, 주마다 멘토님을 찾아뵙고 정리한 내용을 공유하며 서사를 쌓아갔다. 그러던 중 큰 변곡점이 찾아왔다. 안동에서 열린 교육캠프의 새벽이었다. 작품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와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고, 그동안 만들어온 구조를 과감히 뒤집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몇 시간 동안 해결책을 찾지 못해 모두 막막했지만, 결국 방향성 자체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메인홀에서 로비로 자리를 옮겨 앉은 자리에서 지난 몇 달간 만들었던 구성을 거의 처음부터 다시 짜냈다. 때로는 한 번의 단호한 결단이 수십 번의 회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크게 체감한 날이었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진 교육캠프 팀별 회의를 마치고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기획안 제출을 코 앞에 둔 추석 연휴! 열흘의 시간 동안 광란의 기획안 편집이 이어졌다. 문장의 어미와 조사 하나까지 붙잡고, 문단 배치부터 디자인 요소의 작은 색감까지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며 하루 10시간 넘게 매일 회의를 이어갔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온 힘을 다해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로가 대견하면서도 살짝은 징글징글(?) 했다. 한 명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욕심을 조금은 덜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아이디어들을 냈고, 그 대부분을 실제로 반영한 결과 100장에 가까운 별첨 문서가 탄생해 버렸다. 파란만장한 연휴의 끝, 마침내 기획안을 제출하고 나니 팀원들이 마치 전우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우리의 생각을 마음껏 펼치고 한 장면 한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낸 기획안이기에 후회는 없다.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기획안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피칭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참신하고 몰입감 있게 작품을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고, 피칭 멘토님의 조언을 참고하며 PPT 속 인물과 대화를 나누고 세트 일부를 직접 제작해 활용하는, 난도가 꽤 높은 발표를 구성하게 되었다.
피칭 연습을 위해 모인 연습실 / 학교 대강당 자체 리허설
하지만 한 달 내내 우리를 가장 괴롭힌 건 바로 분량이었다. 준비한 내용을 모두 보여주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버리면서 분량을 줄이기 위한 회의만 수 차례 이어졌다. 끝없는 수정 끝에 모든 요소를 넣어 전체 리딩을 했을 때, 제한 시간 안에 피칭이 안정적으로 들어 왔다. 타이머를 보고 감격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피칭을 맡게 된 나는 약간의 욕심을 부려 ‘대본 통암기’를 결심했다. 그런데 기획안 때처럼 조사 하나를 두고 몇 시간을 토론하며 직접 대본을 쓰다 보니, 정작 암기를 시작해야 할 단계에서는 이미 절반 이상을 자연스럽게 외우고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학교 대강당을 빌려 실제 피칭 무대와 비슷한 환경에서 동선을 연습하고, 따로 연습실을 빌려 시선과 제스처 하나하나를 정리하기도 했다. 최종 피칭이 다가올수록 떨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설렘과 기대가 훨씬 컸다. 어느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했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종 프로모션을 앞둔 피칭 대기실에서
최종 피칭과 심사위원 질의응답(이아선, 박예빈, 이서연, 공하연)
최종 피칭 당일, 한국국학진흥원 담당자님들부터 수많은 스탭분들까지 우리를 위해 많은 분들이 애써주고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함과 함께 묘한 현실감이 밀려왔다. 우리만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 올라 이런 발표를 해볼 기회가 인생에 얼마나 있을까? 긴장과 기대를 품고 마침내 피칭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준비한 모든 것을 후회 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우리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우리는 이미 많은 걸 얻었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순간, 지난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울리던 팀 카톡방 이름과 사회자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대상은 미삼이!"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미삼이 카톡방 프로필
8개월간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들이 한순간에 끝나고 나니 후련하면서도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얼마나 귀중한 경험을 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여럿이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사실 기여도와 노력의 정도를 서로 저울질하고 억울하거나 미안해지는 마음이 은근히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그런 계산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만큼 모두가 애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한계를 시험하며 매사에 집요할 정도로 집중할 수 있었다.
원래 내 몫이 아닌 일을 맡게 되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남으면 당연하게 다른 팀원의 일에 손을 보태고 싶어졌다.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내 자신이 신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단계를 훌쩍 넘어선 이상적인 모습의 팀워크를 경험한 것 같다. 값진 수상만큼이나 무언가를 후회 없이 노력해 본 경험,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멋진 일들을 함께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한 팀원들을 얻게 된 것이 공모전을 통해 내게 남은 큰 수확이다. 백번은 족히 넘을 만큼 수많은 회의를 하면서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 모든 과정이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으로도 남을 수 있게 해준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길었던 공모전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다채로운 가능성에 설레는 내일이 계속되길 바라며, 최종 피칭의 마지막 멘트와 동일한 문구로 체험기를 마친다. “저희는 오늘의 무대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꿈을 향해 도약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머시브 연극 〈파계의 날〉은 조선시대의 금지된 예언서 〈정감록〉에서 시작된 민란과, 이를 두고 대립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참여형 추리극이다. 관객은 조선시대의 마을을 재현한 복층의 극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배우와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고, 극 중에 일어난 수상한 사건들의 전말을 밝혀낼 단서를 수집한다.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생생한 몰입과 함께, 모든 관객이 두 인물 중 누구의 편에 설지 선택을 내리면 그에 따라 회차마다 다른 총 4개의 결말이 펼쳐진다.
공하연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번 공모전에서 전체적인 스토리 기획과 피칭 화술 준비 및 피칭 소품 준비 등을 담당했다. 새로운 스토리가 진행될 때, 각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생각을 즐긴다. 인물에 대한 디테일을 불어넣으며, 작가로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보다도 그 인물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상상하며 매력적인 스토리를 찾아 작품을 완성시킨다. 훗날, 모두의 기억에 남을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박예빈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번 공모전에서 전반적인 스토리 기획과 공간 및 이머시브 요소 기획, 그리고 최종 프로모션 피칭을 담당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파묻혀 함께 두근거리는 순간을 무엇보다 즐긴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을 작품을 만드는 창작가가 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이다.
이아선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번 공모전에서 전반적인 기획과 함께 최종기획안 디자인과 피칭 PPT 제작을 담당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다. 또한 무언가를 마음 모아 함께 만들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느낀다. 〈파계의 날〉의 디자인을 맡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준 만큼,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잘 그려낸다.
이서연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번 공모전에서 최종 대본 작성과 피칭 자료 이미지 제작 등을 담당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으며,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도전하고 있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9개월동안 창작에 대한 막연한 열망을 해소했다. 앞으로도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하고 걸어갈 수 있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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