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허촌 사또 한익범에게는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세책방의 목금 소저의 집에는 어른이 살고 있는 흔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외를 하느라 얼굴을 안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목금 소저에게서 대놓고 물어보기는 민망한 일일 것 같아 그동안 물어보지도 못했다. 한익범은 몰랐지만 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목금은 오랜만에 온 엄마를 보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명절도 아닌데, 어쩐 일로 다 오셨어요?”
“마침 나리가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오신다기에 따라나섰다가 잠깐 들렀다.”
목금의 엄마는 한양의 대감 집에 찬모로 일하고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아 오라는 집이 많았고 아버지가 없어서 돈벌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찬모살이를 하는 중이었다. 새경은 알뜰히 모아 목금에게 보내주었다.
“엄마도 이제 일은 관두고 집으로 와. 맨날 다른 사람 음식만 만들어주지 말고. 나도 엄마가 해준 밥 먹고 싶다고.”
“그 밥 먹고 1년 내내 손가락 빨 일 있냐? 그나마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러더니 엄마는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금은 엄마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와, 새 책이다. 이거 꼭 구하려고 했는데!”
부엌에서 엄마가 명랑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딸애가 세책방을 한다고 했더니 주인마님이 그 책을 가져가라 하셨다. 딸래미가 손이 빨라 바로 필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지만, 어디 그럴 수야 있겠냐? 네가 빨리 베껴놓고 책을 돌려드려야지. 책값이 어디 한두 푼이더냐.”
“맞아요. 금방 베낄 수 있어요. 오늘 밤새 옮겨적어야겠어요.”
“무리하지 마라. 모레 아침에 떠날 거니까, 주인마님이 일 마치고 돌아가시는 시간 맞춰 따라가면 된다.”
“와, 내일 하루 종일 계신다고요? 신난다!”
목금은 후다닥 신발을 꿰어신었다.
“엄마, 종이가 없어서 백이네 가서 좀 빌려와야겠어요.”
“정 진사 나리 댁에? 아기씨한테 잘하고 있는 거겠지? 백이라고 부르면 안 돼.”
“괜찮아요. 우린 친군데, 뭐. 백이도 데리고 올 테니, 엄마 솜씨 잘 발휘해야 돼요.”
“뭐라고? 이 녀석이 지금….”
이미 목금은 달음박질쳐서 뛰어가는 중이었다. 엄마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저 말괄량이를 누가 데려갈지….”
양반댁 아가씨가 오신다니 엄마는 또 열심히 솜씨 발휘를 했다.
“고기가 없는데 어쩌지? 홍이네라도 다녀와야 되나?”
홍이네는 백정 집이다. 백정은 소를 잡는 일을 하는 곳이니 고기를 좀 사올까 생각한 것이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갓을 쓰고 비단 도포를 입은 양반이 기웃대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 바람에 엄마도 같이 놀라고 말았다.
“뉘, 뉘시오?”
“아, 미안하오. 이 고을 사또 한익범이오.”
장천면 소동리 백성이 사또에게 올린 소지_도산서원운영위원회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엄마는 깜짝 놀라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사또 나리께서 이 누추한 곳에 무슨…아, 책을 빌리러 오셨…아니지, 사또 나리가 이런 곳에 왜 책을 빌리러…그러니까 이 누추한 곳에 무슨….”
엄마의 횡설수설이 얼마나 갈지 몰라서 한 사또는 큼큼 기침을 했다.
“저, 목금 소저와는 어떤 관계인지?”
“아이쿠, 어찌 제 미천한 딸아이의 이름을 다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무슨 무례한 짓을 … 이 천둥벌거숭이를 정말 어째야…아니, 그저 너그럽게….”
“아, 그러니 목금 소저의 어머니시군요.”
“네, 네. 사또 나리, 말씀 낮추십시오. 황공합니다.”
“목금 소저가 늘 혼자 지내는 줄 알아서 걱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계시니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네네, 쇤네가 다른 양반댁에 고공살이를 하느라 그렇습니다.”
“아아, 그렇소.”
한익범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다가 황급히 가져온 물건을 내밀었다.
“저, 이거나 받으시오.”
“아유, 이게 뭡니까?”
“목금 소저가 혼자 있을까 싶어 몸보신하라고 고기를 좀 가져왔소. 나눠 드시오. 나는 바빠서 이만….”
한익범은 던지듯이 고기 꾸러미를 안겨주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목금 엄마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은 척하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참, 훤칠한 양반이 우리 딸을 이리 챙기다니. 첩실 자리로 데려가고 싶은 건가?”
한익범이 미혼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목금 엄마였다.
*
목금의 초대에 백이는 냉큼 따라왔다. 더 어렸을 때 목금 엄마가 해주는 밥을 종종 먹었고, 명절 때가 되면 목금이네 놀러 가서 얻어먹는 데 익숙하기도 했다.
종이를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오는데 길 중간에서 한익범 사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 목금 소저. 마침 댁에서 오는 길이었는데, 여기서 만났구만.”
“잘 지내셨어요?”
인사를 하느라 허리를 굽히는데 백이가 갑자기 종이 보따리를 낚아챘다.
“나 먼저 갈 테니, 둘이 말 좀 하다가 와라.”
한 사또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며 외쳤다.
“목금이 잘 보살펴주세요!”
“아니, 저….”
두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며 백이를 붙잡으려 손을 뻗다가 동작마저 똑같은 걸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망허정이라도 가볼까?”
한익범의 말에 목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라 망허산을 올랐다. 길이 그리 험한 편은 아니지만 조금만 턱이 있으면 한익범이 손을 내밀었고 목금도 사양치 않고 잡고 올라서 망허정에 도착하자 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망허정에 오르자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이게 웬일이지? 이리 올라가자.”
두 사람은 망허정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비바람이 거세서 간신히 한가운데 서야 비를 피할 정도였다. 목금은 이렇게 남자와 가깝게 선 것이 조금 부끄러워 등을 돌려섰는데 한익범이 조심스럽게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목금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자 한익범은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비바람이 심하니, 고뿔이 들까 걱정된다. 잠시 가만있거라.”
비바람이 심했지만 목금은 오히려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돌풍이 불며 두 사람은 콰당 자빠지고 말았다.
“오호호호, 이곳에 남녀가 함께 오는 일은 참 오랜만이구나. 아니, 처음인가?”
등골이 쭈뼛할 정도의 냉기와 함께 반투명한 모습의 여인이 등장했다. 입고 있는 복장은 화려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림새였다. 머리에도 본 적이 없는 관을 쓰고 있었다.
“너희는 신분이 다르구나. 좋지 않다. 그걸 알려주려 굳이 이 몸이 행차하셨으니 감사히 생각해라.”
목금이 발끈해서 외쳤다.
“뭐가 좋지 않다는 거죠?”
여인이 목금을 바라보았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처럼 냉기가 흐르는 얼굴이었지만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미인이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을 만난 구미호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목금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망허정이 세워진 이유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어느 시대의 왕이 이곳에서 석양을 감상할 때 한 여인도 숨어서 석양을 감상하다 들켰다는 이야기. 그 여인은 절명시를 짓고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구미호였다고 했다.
“여, 여우 귀신?”
한익범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포자락 밑의 칼을 찾아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호호호, 여우 귀신이라니? 구미호를 뭘로 보는 거냐? 구미호는 여우가 아니다. 너희는 원숭이가 너희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사람이라고 하느냐?”
목금이 말했다.
“그, 그럼 진짜로? 하지만 전설에선 우리 마을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래, 망허촌… 그때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지. 망할 놈의 망허촌. 뭐, 아무튼 나는 그 마을에서 살았어. 너희는 왕이 여길 처음 발견한 줄 알겠지? 그게 아니야. 천 년을 살아온 내가 석양을 감상하던 곳에 잠깐 인간이 들렀던 거지.”
구미호의 눈이 먼 곳을, 아니 먼 과거를 보는 듯한 눈이 되었다.
“그 왕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던 영웅이었지. 너희 전설은 내가 무슨 한시를 지어서 왕이 감탄했다고 말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야. 그때는 그런 것은 알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어.”
“그럼… 왜요?”
구미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넌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니? 하긴 어린 여자라 뭘 모르는구나.”
“한눈에 반했다는 거군요.”
“그래!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영웅왕이 미모에 홀렸다는 말이 싫어서 이야기에 살이 붙었겠지.”
어느새 비바람이 멈춰 있었다.
“하지만 영웅왕은 실로 멋진 남자이긴 했어. 천 년을 산 구미호도 반할만큼. 하지만 우리의 결합은 해선 안 되는 일이었어.”
“왜요?”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일은 배척해. 그게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지.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자신들이 사는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여겨. 재미있는 점은 그 익숙한 삶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규칙은 세월이 지나면서 익숙한 일로 변한다는 거야.”
구미호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신분이 달라.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기에는 아직 일러.”
한익범이 고개를 저었다.
“양반과 평민은 신분이 다르지 않아. 그 이야기라면 말이지.”
목금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에요. 아니, 신분이 다르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아니, 우리가 아니라…”
목금은 말할 수가 없었다.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는 말 자체가 부끄러워서 꺼낼 수가 없었다. 구미호가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백만 배는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공기마저 흐름을 멈춘 것 같은 미모였다.
“그래! 너희는 평민과 양반. 그런 걸로 내가, 이 구미호가 말한 것 같으냐? 내가 영웅왕과 결혼했을 때 나보고 평민이라고, 그 눈먼 자들은 신분을 그렇게밖에 몰랐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런 게 나한테, 그리고 영웅왕에게 문제가 됐을 것 같으냐?”
“그거야 모르죠.”
“어림도 없는 이야기. 하지만 구미호와 인간은 서로 다른 신분이야. 그건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어. 좀더 쉽게 이야기해줄까? 요괴와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거야.”
목금이 약간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요괴가 아니고 사또 나리도 요괴가 아니에요. 우린 둘 다 인간이라고요.”
“그래. 너희는 인간이지. 하지만 같은 인간은 아니야. 넌,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세계를 보잖아. 그건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신분이라는 뜻이지.”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천 년 전의 잣대로 지금을 재단하려고 하면 안 되지.”
“과연 그럴까? 오랜만의 외출 즐거웠다. 다음에 또 보자.”
구미호는 길게 웃으며 천천히 투명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한익범이 목금에게 물었다.
“목금 소저, 괜찮은가?”
목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괜찮습니다.”
“소저, 나는….”
목금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한익범이 입을 닫았다.
“석양이 지고 있어요. 함께 봐요. 망허산은 이것 말고는 볼 게 없다니깐요.”
두 사람은 조용히 손을 잡은 채 석양을 바라보았다.
“저녁, 드시고 가셔야겠네요.”
어두워진 산길을 내려가며 목금이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그리 좋다니 아니 먹을 순 없겠군.”
목금은 집에 밥상이 세 개가 있는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혼자 먹든, 엄마가 와서 먹든, 백이랑 먹든 겸상으로 먹는 게 일상화되어서 밥상을 따로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또 나리와 겸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목금은 신분이 다르다는 건 이런 거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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