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집권기! 안으로는 왜란 이후 나라를 재건하고, 밖으로는 쇠망해 가는 명(明)과 날로 성장하는 후금(後金) 사이에서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칠 수 없는 외교를 펼쳐야 하는 매우 예민한 시기였다. 특히 1620년에는 신종 만력제(재위 1572~1620)가 사망하고, 광종 태창제가 즉위하였으나 태창제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는 등 중국의 정세는 극도로 혼란했다. 이러한 때에 광해군은 1620년 10월 16일, 67세에 이른 류간을 태창제의 진향사로 차출했다. 류간은 1618년(광해군 10) 1월 11일 대사헌에 임명된 뒤 선조와 인목대비의 딸인 정명공주를 서인으로 강등하려는 논의에 반대하다가 그해 2월 울산부사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즉 광해군의 무리한 정국 운영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일기』기사(1620년 10월 16일)
전교하기를, “울산 부사 류간(柳澗)의 임기가 만료되었다고 하니, 류간을 진향사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류간은 무오년 서궁(西宮)을 폐출(廢黜)하자는 청이 있을 당시 대사헌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담당해 왔던 자인데, 폄손(貶損)에 관한 절목을 정부에서 감정할 때 우연히 눈물을 흘렸다가 그 때문에 논핵을 당하고 체직되어 울산으로 밀려났던 자이다. 이때 와서 또 해사(海使)로 특별히 차출되었는데,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
『광해군일기』 광해군 12년(1620) 10월 16일
그런데 1621년(광해군 13) 4월 초, 경상도 예안현에 살던 김령(1577~1641)은 생질 전한(생몰년 미상)에게 명나라 사신으로 간 류간 등이 후금에 포로로 붙잡혔거나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안동부사 박로(1584~1643)는 명나라에 간 아버지 박이서(1561~1621)를 찾아보기 위해 서울로 갈 계획이었다.
『계암일록』 및 일기를 쓴 김령의 문집 『계암선생문집』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신유년 4월 7일 맑음. … 영천(榮川, 영주)의 전한(全僴)이 내성에서 왔다. 들으니 건주위의 오랑캐 군대가 지난달 14일에 심양을 함락시키고 또 요동도 함락시켰다고 한다. 대개 총병(摠兵) 하세현(賀世賢)이 내통하여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원 경략(元經略)은 겨우 도망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우리 사신 이필영(李必榮)·류간(柳澗) 등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고 하며, 박이서(朴彛叙)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안동부사 박로(朴𥶇)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보기 위해 서울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실종은 피랍이 아니라, 사고 때문이었다. 『광해군일기』 1621년 4월 13일 기사에는 중국으로 간 사신 박이서와 류간이 경사(京師,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배가 침몰하여 익사한 내용이 실려있다. 후금의 요동 점령으로 명나라를 오가는 육로의 대안으로 바닷길이 개척되었지만 위험한 항로였던 것이다.
『광해군일기』기사 (1621년 4월 13일)
중국에 갔던 사신 박이서와 류간이 경사에서 돌아오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침몰되었다.
【그후 익사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요동으로 가는 길이 갑자기 끊어져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처음으로 수로(水路)를 개척하였는데,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철산(鐵山)의 튀어나온 곳에 이르러 으레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신 강욱(康昱)과 서장관 정응두(鄭應斗) 등도 연이어 빠져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사신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자 도모하여 뇌물을 쓰고 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광해군일기』 광해군 13년(1621) 4월 13일
해상 실종을 알지 못했던 류간의 아들 류여항은 4월 16일 광해군에게 상소하여 명나라의 조사(詔使) 행차를 따라가서 병든 부친을 간호하며 오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4월 20일 광해군은 류여항을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제수했다. 한편, 안동부사 박로는 4월 14일 체직을 요청했고, 6월 16일 광해군은 박로 역시 부친의 행방을 찾아 중국 관내로 들어가는 것을 윤허하였다.
1621년 3월 19일 후금이 요양을 점령하면서, 명에서 요양과 심양으로 통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때 명 희종은 조우(趙佑)에게 해상으로 귀국하는 진향사 류간 등을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닷길로 다니지 않은 지가 200년인지라 뱃사공이 안전한 항로를 알지 못하였다. 결국 배는 태풍을 만나 바다에 침몰했고, 조정은 배가 침몰한 곳도 알지 못했다. 다만 류간이 배를 탄 날짜가 9월 9일이어서 이날로 기일(忌日)을 정했다. 이후 류간의 가족은 원주 부론면(富論面) 갑좌(甲坐) 언덕에 류간의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조선 조정은 나랏일을 하다가 희생된 류간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광해군은 류간에게 좌찬성을, 인조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추증은 공훈을 세우고서 죽은 신하와 그의 직계 조상에게 관작을 내려 주는 일종의 보훈 제도였다. 대상은 공신과 실직(實職) 2품 이상 문무관의 3대로 그 범위가 매우 넓었다. 1776년 정조는 류간에게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숨김이 없이 지조를 굽히지 않는 것이 정(貞)이며[不隱無屈曰貞], 백성들을 슬프고 쓰라리게 하는 것은 민(愍)이다[使民悲傷曰愍]라는 의미이다.
류간의 아들 류여항과 류여각은 광해군 시기 문과 급제 이후 줄곧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에 있었지만, 인조 정권에서 희생되지 않으며, 주로 지방관으로서 관직을 이어갔다. 인조반정 당시에 아버지 류간의 삼년상 중이었기도 했지만, 광해군 말 아버지 류간의 순국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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