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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현대의 장애 인식을 조선 시대로 소급시키지 말자


나는 소속 대학 이외에도 대구대 대학원 장애학과에서 〈한국장애인사〉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삼국에서 고려, 조선, 근·현대까지, 때론 조선 시대만 특화해서 우리나라 장애인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규명해보는 과목이다.

대학원생들은 항상 열심히 참여하고 수업에 대한 반응도 좋아서 항상 즐겁게 강의하고 있다. 다만 이 강의에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조선 시대 장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게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학기 초에는 많은 대학원생이 현대의 부정적인 장애인관으로 조선 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면서, 그들도 온갖 설움을 당하며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비록 신분사회라는 한계가 있지만 조선 시대 장애 인식이 현대와 많이 달랐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조선 시대 장애인사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왜곡된 해석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들은 현대의 부정적인 장애 인식을 과거로까지 소급 적용해서, 조선 시대 장애인사도 피동적·소극적으로 해석하였다. 반면에 정작 조선 시대 지식인, 특히 실학자들은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최한기)’, ‘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당한 자는 문 지키는 데로 돌리며, 심지어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이까지도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홍대용)’라고 말하면서 항상 장애를 주체적·적극적으로 해석했다.


기산 김준근 〈판수경닉는모양〉. 시각장애인인 판수(判數)가 북과 징을 두드리며 독경하는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실제로 조선 시대 장애 인식은 오늘날 우리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그에 앞서 전제해야 할 점은 조선은 신분사회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왕족이나 양반사대부 등 상류층 장애인은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았고, 평민이나 천민 등 하류층 장애인은 신분만이 아니라 가난에서 오는 멸시까지 중첩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시대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위계 서열을 중시하는 주자학이 강화되고 가문을 중시하는 문벌 사회가 되면서, 장애인은 집안에서 지위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거나 재산상속에서 조금씩 배제되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판소리나 탈춤에서 보듯이, 민중들 사이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봉건사회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태도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보다 훨씬 앞서 나간 선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진적인 장애인 복지정책


조선 시대 장애인은 과연 어떻게 불렸을까? 오늘날 우리는 흔히 ‘장애인’이라 칭하지만, 그것은 1980년대 초반에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쓰이기 시작한 것이고, 근대 이후만 해도 ‘불구자(不具者)’란 용어가 주로 쓰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경우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에선 ‘독질(篤疾: 매우 위독한 병)’. ‘폐질(廢疾: 고칠 수 없는 병)’, ‘잔질(殘疾: 몸에 병이 남아 있는 것)’이라 칭하였고, 민간에서는 주로 ‘병신’이라 칭하곤 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장애를 병으로 인식했고, 장애인을 고질병에 걸린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병과 장애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대개 병은 개인적인 문제이자 언젠가는 나을 수 있다는 일시적인 현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실제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조(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條)」를 보면 희명이란 아이가 부처님의 영험함으로 눈을 뜬다. 『심청전』 말미의 맹인잔치에서도 심봉사를 비롯한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덩달아 눈을 뜨고 있다. 반면에 장애(disability)는 말 그대로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 곧 쓸모없는 사람으로 사회적인 문제이자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다는 항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애는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인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도 오히려 현대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앞의 최한기나 홍대용의 지적처럼, 조선 시대엔 장애인에게도 모두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도록 했다. 장애인은 무조건 사회적 약자로 여기면서 집안이나 복지시설에 유폐시킨 채 장애 수당만 지급하면 끝이라는 오늘날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정부는 크게 자립이 가능한 사람과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나누어 장애인 복지정책을 펼쳤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정약용 저, 『목민심서』(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듣지 못하는 사람과 생식기가 불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을 치고, 다리를 저는 사람은 그물을 떠서 살아갈 수 있지만, 오직 독질자와 폐질자는 구휼해 주어야 한다.”

자립이 가능한 사람으로는 대표적으로 시각장애인을 들 수 있다. 조선 정부는 시각장애인에게 점을 치는 점복이나 경을 읽어 질병을 치료하는 독경,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같은 갖가지 직업을 갖고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또 점복가 중 재주가 뛰어난 자는 관상감 소속의 명과학이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악공 중 일부는 장악원 소속의 관현맹인에 들어가 왕비나 후궁을 위한 내연(內宴)에서 악기를 연주하도록 했다. 또 독경하는 맹인을 위해서는 명통시란 집회소를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였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시각장애인에게 별도의 직업과 관직을 마련해주고 스스로 먹고 살도록 유도했다.

반면에 자립이 불가능한 장애인에게는 나라에서 직접 구제해주었다. 위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처럼 독질자와 폐질자의 경우 나라에서 직접 돌봐주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 시대엔 장애인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장애인에겐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하고,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면포로 대신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정(侍丁), 즉 부양자(활동보조인)를 제공하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했다. 기타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하여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였다.




역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장애인들


이러한 장애에 대한 우호적 인식과 선진적인 장애인 복지정책이 있어서인지, 조선 시대엔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장애인들이 매우 많았다. 조선 시대 장애인은 분명 역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엔 장애를 가진 왕도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은 시력 장애가 심해 자주 온천에 가서 치료했다. 숙종도 56세부터 노화로 시력 장애를 입었고, 정조 역시 만년에 거의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다.


세종대왕의 영릉(출처: 문화재청)



특히 양반층 장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조선 시대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하지 않았고, 장애의 유무보다 그 사람의 능력을 더욱 중시했다. 그래서 양반층의 경우 어떤 유형의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과거시험을 보아 종9품 미관말직에서 정1품 정승의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예컨대 현대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정승(좌의정, 우의정, 영의정)만 해도 최소 7명이 있었다. 세종대 좌의정의 허조는 척추장애인(꼽추)이었고, 중종대 우의정의 권균은 뇌전증(간질)이었으며, 선조~광해군대의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는 지체장애인(앉은뱅이)이었다.


심희수 초상(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양대 정치 산맥이었던 소론과 노론의 수장도 장애인이었다. 숙종대 우의정이자 소론의 영수였던 윤지완은 한쪽 다리의 지체장애인이었고, 영조대 영의정이자 노론의 영수였던 김재로는 척추장애인(꼽추)이었다. 그 밖에도 선조~인조대의 우의정과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키가 작은 왜소증이었고, 영조~정조대의 명재상 채제공은 한쪽 눈의 시각장애인이었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蔡濟恭 肖像 時服本). 눈동자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출처: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시대엔 장애인 관료들도 매우 많았다. 세종대 집현전 학사이자 이조판서와 공조판서 등을 지낸 양성지는 말더듬이 언어장애인이었고, 마찬가지 세종대 집현전 학사이자 승문원 박사, 호조정랑 등을 지낸 권절은 여덟 손가락이 붙은 지체장애인이었다. 중종대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은 정신장애인(조현병)이었으며, 선조대 부제학과 전라감사 등을 지낸 유희춘은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다. 영조대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낸 이덕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역시 영조대 단양군수 등을 지내고 실학의 원조인 유수원도 청각장애인이었다. 인조대에 팔도도원수를 지낸 장만도 한쪽 눈의 시각장애인이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양반층 장애인의 주요한 직업은 관직, 즉 정치가였다. 비록 양반층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 장애인의 사회적 한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장애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생겨나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편견과 차별, 배제로서의 부정적인 장애 의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과연 언제였을까? 필자는 『근대장애인사』(사우,2018)란 저서에서, 그것을 아주 최근인 근 · 현대,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였다고 규명했다. 일제 강점기엔 식민지와 산업화로 인해 장애인 수가 급증했지만,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선전수단을 위해 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했고, 정신장애인이나 한센인처럼 위험한 장애인은 무조건 외딴 곳에 격리시켜 버렸다.


제생원 맹아부 수업 장면(출처: 아시아엔 2022.04.15)



장애인의 관직(정치) 참여도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그들의 직업도 산업화 · 서구화로 급속히 사라져갔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어서, 이제 장애인은 놀림과 학대,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엔 우생학마저 확산되어 열성인자인 장애인을 사회적으로 배제, 격리, 단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제시기 식민지적 장애인관이 현대까지도 계속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무비판적인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왜곡된 관점으로 조선 시대 장애인사를 바라보면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집필자 소개

정창권
정창권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조교수이자 대구대학교 대학원 장애학과에도 출강중이다. 서울시청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평가 및 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한국박물관협회 평가 및 자문위원. 서울시교육청 고전인문아카데미(‘고인돌’),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길 위의 인문학 특강. 2010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2019년 롯데출판대상 본상, 2019년과 2022년 세종도서 학술 및 교양 도서 선정, 2015~2019, 2022년 고려대학교 석탑강의상 수상했다. 인문융합형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여성사, 장애인사, 하층민사, 성과 인구, 노년사 등이다. 주요 저서로 『조선의 양생법』,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근대 장애인사』, 『정조처럼 소통하라』,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기이한 책장수 조신선』,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한쪽 눈의 괴짜화가 최북』, 『조선의 양생법』 등이 있다.
“조선시대 점과 점쟁이”

예로부터 무당을 궐 안에 두고 나라의 길흉을 예언케 하였으나 점쟁이는 예언자로 전문적 직업인으로 민간에 생겼다. 점을 치는 종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사의 존망을 점치는 사주점과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운수점,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수점, 단시점(斷時占), 멸액점(滅厄占), 절초점(折草占)따위가 있다. 또한 점을 치는 것으로는 태주가 하는 신점(神占)과 주로 여자 점쟁이가 쌀을 뿌려 점치는 쌀점, 동전을 던져서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산통점(算筒占), 역점(易占), 오행점(五行占), 육효점(六爻占), 팔괘(八卦占), 구궁점(九宮)따위가 있다.

옛날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물음)이요!” 하면서 점을 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 쓴 깃발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이름 짓기와 관상, 이름, 감정 따위를 보았으며 때때로 액운을 막기 위한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中期) 때 민간에 보급된 대표적인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 저술)은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풀이해서 그 해의 운수를 달마다 보는 정초의 풍습이 되었다.

“용한 맹인 점쟁이 심군”

맹인점술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최흥원, 역중일기, 1763-01-06 ~

1763년 1월 6일. 신미년 새해가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어제는 인근에 사는 김용여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새해가 되었으니 신년 운수를 보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편지에는 맹인 점장이 심옥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평소 그가 아주 영험하고 뛰어나단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다고 한다. 엊그제 김용여가 사는 마을에 왔길래 자신도 점을 한 번 쳐보았는데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려다가 점을 한 번 쳐볼 만하니 최흥원에게도 한 번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최흥원은 이 편지를 보고는 둘째 아우를 보내어 그 심옥이란 점쟁이를 데려오게 했다.

오늘 그가 점을 쳐보니, 점괘가 아주 불길하게 나왔다. 심옥은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대뜸 아내 묘소의 이장을 권하는 것이었다. 최흥원은 예전에도 아내 묘의 풍수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심옥의 이야기를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었다. 또 그에게 아픈 아이의 사주를 적어주고 앞으로의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그는 매우 길한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흥원은 내친김에 심옥에게 집안사람들의 운명을 두루두루 물어보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운수를 점치기는 하나, 정확하게 들어맞은 적은 없었다. 막상 심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역시 특별히 용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자뿐 아니라 모두가 아내의 이장을 권하니, 그것은 한 번 고려해 볼 만한 것 같았다.

“과거를 꿰뚫어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1584년 3월, 권문해는 추운 겨울을 지나 어서 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3월 9일, 바라본 소백산에는 겨울처럼 눈이 내려온 산이 다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연일 서리가 내려 초목의 싹이 대부분 시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마음까지도 메마르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군 성주 류세무와 경상북도 선산부백(善山府伯) 류덕수(柳德粹)가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곡사(大谷寺)에 만나기를 청하였다.

3월 14일, 권문해는 집을 나서 대곡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류세무와 류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 이야기 중 경상북도 선산군의 부백 류덕수에게 자신의 고을에 맹인 점쟁이 김여추(金汝秋)에 대해서 듣게 된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그 누굴 만나도 그가 살아온 과거를 귀신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권문해와 류세무는 명경수(明鏡數) 김여추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여추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류세무는 율시 한 수를 쓰는데,
화와 복은 다 이미 정해진 것 禍福皆前定
꽃 피고 시드는 것은 각기 때가 있다네 榮枯各有時
정원의 꽃은 일찍 떨어져 버리지만 花落園中早
산골짝 옆 소나무는 오래도록 산다네 松生澗畔遲
현묘한 이치 원래 수가 있는 것이니 玄機元有數
조물주가 어찌 사사로움을 용납하리오 造物豈容私
모름지기 반계(磻溪) 늙은이를 알아야 할거니 須識磻溪叟
끝내 임금의 스승이 되었네 終爲帝者師

대곡사에 모인 권문해와 류세무, 류덕수는 앞 못 보는 맹인 점쟁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자신의 수명을 점쳤던 점괘가 생각나다”

점괘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미상

1593년 3월, 해가 바뀌자마자 100여 일을 앓았던 오희문은 최근에야 밥을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희문이 병으로 죽었단 소문도 돌았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는 위문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병이 너무나 심하여 오희문 스스로도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다시 살 수 있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희문은 양지현 농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그를 불러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때 김자순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이 54세, 그러니까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70살 넘게 살 수 있다” 그때 오희문은 재미 삼아 친 점이라 특별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임진년에 난리가 터져 거의 죽을 뻔하게 되었다. 비록 몸의 병은 해를 넘겨 생겼지만, 김자순이란 자가 이야기한 점괘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오희문은 새삼 점쟁이 맹인의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풍증(風症)걸린 덕원, 괴상한 말을 늘어놓다”

김령, 계암일록,
1623-05-05 ~ 1624-01-20

1623년 5월 5일, 이직(以直)이 안타까운 소식을 가지고 김령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덕원(李德遠)이 지난 밤 풍증(風症, 미친 증세)이 발병하여 정처없이 계상(溪上)·분천(汾川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부포(浮浦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등지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김령은 그가 가련하고 애석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김령은 이직이 돌아간 뒤 탁청정에 갔다가 제군들을 만나 냇가 길에서 모였는데, 이때 덕원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여희와 이실이 온계(溫溪)로 급히 갔다. 흥이 싹 가셔서 기쁘지 않았다. 탄식스럽고도 탄식스러웠다.

6월 2일, 비 내리는 아침, 김령은 덕원을 만나러 탁청정으로 나아갔다. 그의 언행을 보니 병은 차도가 없었다. 덕원은 괴상한 말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가련하고도 탄식스러웠다. 종종 정상인 것도 같으면서, 말하는 것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통 사람과 크게 달랐다.

덕원의 병은 나아지는가 싶더니, 1624년 1월, 다시 발병하였다. 또 이렇게 고된 병에 걸리다니 안타깝고 애석함이 모두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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