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김 생원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실로 오랜만의 밤 외출이었다.
지난해, 꼬박 한 해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양봉 농사가 실패한 후로, 한동안은 술에 젖어 그 상심을 달랬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과거 합격 동기인 송 목사(牧使)의 이 고장 목사 부임이었다. 그 덕분에 과거 합격 동기 모임이 다시금 열리게 되었고, 모임을 빙자한 술잔치가 그에게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러나 그의 일탈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은 것은 아내 서 씨의 추상같은 호통 때문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입니까? 막내딸의 병이 좀처럼 낫지 않는 와중에 집안일을 돌볼 생각은 하질 않고 밖으로만 쏘다닙니까!”
라며 쏘아붙이는 통에 도통 출타하기가 너무도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그 뒤로 두어 달간은, 심사에 뜨거운 것이 욱하고 솟구칠 때마다 벌통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만 끔벅끔벅 피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혼하고 처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어….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처가 세상이니 내 마음 달랠 사람 하나 없구나.’
그리 후회해 봐도 이미 30년이나 지난 세월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대부가에서 남자 집에서 신혼 생활을 보내는 것이 조금씩 늘어나는 세상이었지만, 원래부터 빈한했던 김 생원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주자가례』(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좀처럼 가장이 마당에 들어서도 안채에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아내가 고을을 찾아온 사당패들 구경을 간 것이다. 아내는,
“저는 오늘 아버님 문안을 드리고 내일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 말을 했지마는, 지아비를 우습게 여겨도 유분수지, 그 속마음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렇게만 둘러대는 것이었다. 게다가 볼썽사납게도 비(婢) 여럿을 주렁주렁 달고서 마치 원님 행차하듯이 왁자지껄하게 나갔다.
그러나 김 생원이
“몸 조심히 잘 다녀오시오. 장인어른께도 안부 전해주시구려.”
라고 짐짓 점잖게 배웅하는 것에 그친 것은, 공교롭게도 오늘 밤에 동기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내가 딸아이도 데리고 갔으니, 오늘 밤은 맘껏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될 것이었다.
그는 갓끈을 매면서 아이처럼 부풀어 한껏 오르는 신난 마음을 달랬다. 목사를 만나러 가는데 체통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문고 소리가 너른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고을 안 가장 큰 기방(妓房)에 목사를 비롯해, 고을에서 이름난 자들이 모두 모였다. 김 생원은 목사의 옆자리에 앉아 좌중의 예우를 받았다.
‘내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아녀자가 지아비 하는 일을 우습게보고. 안 사람이 이 모습을 보면 아무 소리도 못 할 터인데.’
흐뭇함과 분함 사이에서 상념 하던 그를 깨운 것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리,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기생 종기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종기야. 내 너를 만난 지도 꽤 여러 달이 되었구나.”
“그렇사옵니다. 허나 나리께서 근자에 발걸음이 뜸하셔서, 소인은 나리께서 소인을 잊은 줄로만 알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사옵니다.”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이니라. 내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다만 바빴을 뿐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일전에 목사님께서 소인을 따로 찾으시어 나리의 분주한 소식을 전하셨지요.”
“목사께서? 너를?”
종기의 말에 김 생원은 살짝,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만 미간을 찌푸렸다. ‘분주한 소식’이라니. 내가 벌 키우고 있는 것을 다 알면서 목사는 무슨 말을 한 것인가. 또한, 어찌하여 종기를 따로 부른 것인가.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기생방에 배반(杯盤)나고〉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마음속에 피어오른 의심의 꼬리가 채 커지지도 못할 무렵, 송 목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어찌 박 진사가 안 보이네만? 이번에는 꼭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에 모임에 연락을 돌린 오 참봉이 답했다.
“박 진사가 이번에는 꼭 온다고 했지만, 안 사람이 그렇게 잔소리를 해서 못 온다는 전갈을 보냈네.”
“또 인가? 이거 참 낭패로구먼.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이 중처럼 살아야 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우이.”
그렇게 말을 받은 목사는 곧 시선을 김 생원으로 돌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 김 생원이 참석하여 얼마나 좋은가. 그동안 자네가 없어 참으로 적적했다네.”
“고맙네. 내 몇 번이고 오려 했으나, 다만 좀 바빴네.”
“알지, 알지. 내 김 생원 바쁜 거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은가! 그래서 올해 양봉은 어떨 거 같나?”
양봉 얘기가 나왔다는 건 목사의 주사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술만 먹으면 목사는 김 생원에게
“사대부가 벌이나 키우고 있고. 요즘 글은 아예 읽지 않는 건가? 자네도 이러다가 상단(商團) 하나 만드는 거 아닌가?”
라면서 농을 하는 것이었다. 농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은근히 사람 속을 밭이랑 매는 것 마냥 박박 긁어대니, 이따금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김 생원과 서당 시절부터 동문수학하던 이 판관이 끼어들었다.
“어허, 이 사람. 또 취했는가.”
“아니, 취하기는! 이 정도는 거뜬하다네.”
“거뜬하기는 무슨. 자자, 오늘은 벌써 밤이 매우 깊었네.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니, 파하기는 어딜 파하나! 이제 시작인 것을.”
그 뒤로도 목사는 한참을 우겨대었으나, 좌중에는 이미 술기운이 수그러들었고 사람들의 눈가에도 졸음이 한 꺼풀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오 참봉이 말했다.
“이만 잠자리에 드세. 다들 각자의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면 되네.”
목사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지도 못한 김 생원은 그 말에 자못 체통 없이 일어서 자리를 떴다. 그에게 배정된 방문을 열려는 순간, 누구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라온 종기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리, 침소에 드시는 겁니까?”
“그래. 이미 밤이 많이 늦었구나.”
복잡한 표정의 김 생원을 바라보던 종기는 잠시간 뜸을 들이다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은 미력하나마 소인이 밤 시중을 들게 하소서.”
그 말에 김 생원은 그만 아득해져 버렸다.
친영(親迎)날 사모관대를 쓴 이후로 김 생원은 단 한 번도 외간 여자와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종종 시주하는 뒷산 큰 절 부처님 앞에 맹세코 진실이었다. 대장부로서 살아가려면 꼭 해야 하고 거쳐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대부의 모임 자리에는 꼭 술이 있었고, 기생이 있었으며, 시중드는 여종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외정(外情)을 주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혈기왕성했던 시절에도 그랬다.
조선 시대 혼례의 한 장면(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그런데 어찌하여 늦은 나이에 봄바람이 살랑이는 것인지 그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여러 달 전, 합격 동기 모임에서 만난 기생 종기가 수줍게 말을 건넨 후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눈길만 주어도 좋고, 목소리만 들어도 떨리며, 그 고운 손을 만질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성현의 무거운 말씀들은 모두 의식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한 번은 그녀를 참아내기 위해 마음속으로 『예기(禮記)』를 줄줄 외워 보기도 했으나, 어느새 그의 머릿속은 그녀의 말들로 가득 채워져 버렸다.
그러나 그 애타는 마음을 안고서도 결코 그녀와 밤을 보내지 않은 까닭은 어려운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해 온 아내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가 첩을 들이는 것이 그다지 흠이 아니라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리를 저버리는 일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물며 평생 함께 고생해 온 아내를 저버릴 수는 없노라, 그래서 그는 매번 술자리에서도 홀로 잠을 청해왔다.
그 노력도 무색하게, 그가 그토록 피해왔던 순간이 별안간 찾아와 버린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종기를 향해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에 들자꾸나.”
푸드덕 소리를 내며 작은 말이 시골길을 걸었다. 고삐를 잡는 김 생원의 노비 걸노는 유난히 경쾌한 발걸음으로 말을 몰았다. 숙취 때문에 갓을 쓴 머리 언저리가 깨질 것만 같던 김 생원은 몇 번이나 토악질하며 간신히 실려 왔다.
“네, 네 이놈 걸노야.”
“예, 나리마님.”
“조금만 천천히 말을 몰아라.”
“나리마님께서 아까 분명, ‘이거 야단났다. 걸노야, 빨리 말을 몰아라. 오시(午時, 11시~13시)가 되기 전에 집에 닿아야 한다.’라고 분부하셨습니다요.”
그건 그랬다. 홀로 이부자리를 차면서 일어난 김 생원은 부리나케 옷을 입고 걸노를 찾았다. 아내 서 씨가 오시까지 돌아온다 하였으니, 그 전에는 집에 닿아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걸노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말을 빨리, 또 거칠게 몰았다.
“이놈아. 그렇다고 이렇게 말을 몰아대는 것이냐. 괘씸한 놈이로고.”
“쇤네는 그저 나리마님께서 분부하신 바대로 하는 것입니다요.”
게다가 이 고약한 놈은 김 생원이 길옆 냇가에서 토악질하거나, 말 위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하게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이바구 할 힘도 없던 김 생원은 그저 ‘내 돌아가면 저놈의 고약한 버릇을 단단히 고쳐 노리라’라며 속을 다질 뿐이었다.
《성협풍속화첩》, 〈길 떠나는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저 멀리 김 생원 댁 솟을대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마당 코앞에 닿았다. 김 생원이 말에서 내리자, 기다리던 노비들이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김 생원은 아연실색했다.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마당에 있었다.
“복, 복놈아.”
“예. 나리마님.”
“지금이 몇 시진쯤 되었느냐?”
“이제 막 사시(巳時, 9시~11시)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저, 저, 저것이 왜 여기 와 있느냐?”
“저것이라 하시면… 아! 마님의 가마 말씀입니까요? 마님께서 어젯밤에 탈이 나셔서 급히 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잖아도 제가 나리마님께 연통을 넣으려고 했는데, 마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연통을 받지 못하셨는지요?”
“무어라? 안 사람이 어젯밤에 돌아왔다고?”
“예, 예.”
돌처럼 굳어버린 김 생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늪에 빠졌구나.’
그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했다.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리라. 그는 반사적으로 대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때, 문을 박차고 나오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어딜 가시는 겝니까!”
아내 서 씨는 노기가 등등한 낯빛으로 여종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마당으로 내려왔다.
“어딜 가시는 게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아니, 저, 벌통에 좀 가보려….”
“또 저를 기만하시는 겁니까? 당신께서 지난밤에 어딜 다녀오셨는지 이미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
“천것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시고 싶으신 겝니까?”
“알, 알았소. 바, 방으로 들어가리다.”
힘이 풀려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그는 계단에 올라섰다. 히죽거리던 걸노의 얼굴은 파안대소를 참아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불경한 꼬라지를 보고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는 어제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습니다.”
옆으로 돌아앉은 김 생원을 향해 서 씨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구경을 간다고 했지요?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가 당신의 모임 날이라는 것을요.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시는 듯하여, 모른 척 자리를 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주무시고 오진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요.”
“…‥”
“그렇지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밥알이 목구멍으로 한 알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리 먼 곳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외박을 하신 겁니까? 저는 이미 그 이유를 압니다. 그게 다 기생 종기 그 년 때문이지요.”
“어허, 그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지난주에 저는 들었습니다. 그 년이 당신을 향해 뭐라 하고 다니는 줄은 아십니까? ‘김 생원 나리께서 저에게 너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데, 어째서 멀리서라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이냐 라고 하셨답니다.’라면서 동네방네 떠들고 있습디다. 이 말이 정녕 사실이온지요?”
“부인, 어떻게 이렇게 허황된 말을 믿는 것이오!”
말인즉 옳았다. 김 생원은 그런 농익은 말을 종기에게 전한 바가 없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단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그 년은 기방 행수(行首)에게 ‘자신은 김 생원 나리에게 시중을 들 터이니, 다른 손님은 받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하더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다 늙은 몸으로 이게 무슨 추한 짓입니까?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서 씨는 그 말과 함께 베개를 집어 던지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던진 베개는 이미 뭔가로 실컷 찢어져 있는 상태였다. 김 생원은 등골을 스치는 섬뜩함을 견디며 입을 열었다.
(출처: 조선일보. 2021.08.25.)
“부인, 나는 단 한 번도 지금껏 외정을 준 사실이 없소. 그것은 부인도 잘 알지 않소. 그런데 어찌하여 천한 기녀들 말만 듣고, 이렇게 투기(妬忌)하실 수 있소. 이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지 않소.”
“어찌 이것을 투기라 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지난밤에, 누구와 함께 밤을 보내셨습니까? 당신의 침소에 들어간 기생은 대관절 누구란 말입니까?”
그제야 김 생원은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 필경 아내의 여종, 막년이와 향금이 짓이었다. 몇 차례 이것들이 기방에 일손을 보태러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의 기생들과 친해져 말을 옮기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다 함정이었구나. 낭패로다, 낭패야.’
“부인, 그런 것이 아니오!”
“무엇이 아니란 말입니까? 왜 말씀을 못 하시는 겁니까!”
“부인이 들은 말들은 모두 허황된 말이오. 나는 외정을 준 사실이 정녕 없소.”
“…‥.”
김 생원은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 확고한 목소리로 의혹을 부정했다. 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 씨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가시지요.”
“부인!”
“저는 당신과 더 할 얘기가 없사옵니다. 나가시지요.”
“이것 보시…‥읍!”
김 생원의 입을 막은 것은 난도질당한 채 날아오는 베개였다. 몇 차례 더 얻어맞고 나서야 그는 쫓기듯 사랑으로 건너왔다. 안채에서는 상가 집 마냥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르륵.’
배고픔에 속이 뒤틀릴 수도 있을까? 김 생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제, 아내에게 쫓겨난 그는 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내는 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고, 김 생원에게 밥을 차려줄 생각은 더욱 없었다. 게다가 밥을 할 줄 아는 노비들은 모두 아내가 거느리고 있으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간 적 없는 김 생원은 그저 쫄쫄 굶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그는 새벽녘 몰래 복놈이를 불렀고, 복놈이가 가져온 밥에 물을 말아 먹어 간신히 허기를 채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리마님!”
“무엇이냐?”
“기방 행수가 나리마님을 찾습니다!”
“오, 오냐. 옳거니. 드디어 왔구나! 어서 안으로 들라 하라.”
“예, 예.”
김 생원은 급히 의관을 고치고 문을 나섰다. 그가 문을 나서자, 마당에서 기방 행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두 사람은 사랑채로 들어갔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안채로 한 노비가 발을 옮겼다. 김 생원의 꼬르륵 소리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부인, 이 자는 기방의 행수 되는 사람이오. 이 자가 곡절을 잘 설명해줄 것이오.”
“마님. 김 생원께서는 한 번도 기생 종기와 정을 나누신 바가 없사옵니다.”
“그대도 나를 기만하는가? 내 똑똑히 들은 바가 한두 번이 아니네!”
“아니옵니다. 어젯밤에 이미 다른 분이 종기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그 말에 김 생원과 서 씨, 두 사람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만 김 생원은 금세 표정을 지웠다. 약간의 침묵 후 그 말을 받은 것은 서 씨였다.
“누구란 말이오?”
“목사님이십니다. 하여 이제 종기가 김 생원님의 술시중을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현듯, 그날 밤 김 생원에게서 채 피어나지 못했던 의심의 꼬리가 드디어 닿을 궁둥이를 찾았다.
‘그날 밤 종기가 했던 그 말은 역시 목사 놈의 수작질이었나.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부인, 그 날 밤 종기가 내 침소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나는 아내와의 두터운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했고, 그대로 종기를 돌려보냈소.”
“…….”
서 씨는 아무 말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고생한 사이지 않소? 인간 사이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내가 부인과의 의리를 지키지 않겠소.”
“허나!”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서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마음은 이미 종기에게 내주시지 않았습니까…….”
“…….”
말이 없어진 쪽은 도리어 김 생원이 되었다.
“제가 당신을 모신 지가 어언 30년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저는 속속들이 압니다. 그 자리에 가는 날마다 아이처럼 환해지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도, 제가 그 속을 모를 거라 생각하셨는지요?”
“……행수, 나가 있게.”
“예. 나리.”
사랑방의 문이 닫히자, 서 씨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께서 출타하실 때마다 지으시던 그 아이 같은 표정, 처음 저희 집으로 장가오시던 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부부의 연은 하늘이 맺어준다 하던데, 인정(人情)이 천연(天緣)보다 두터운 것입니까?”
서 씨는 가슴을 두드리며 설움에 가득 찬 말을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입에 뭘 넣을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도 종기가 목사의 수청을 들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당신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아쉬우셨지요? 안타까우셨지요?”
《단원풍속도첩》, 〈신행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김 생원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뭐라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을 원망했습니다. 왜 아녀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했냐고. 저도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제 마음대로 기개를 펼치면서 살았을 텐데요. 아녀자에겐 법도와 행실 거지를 그토록 말하면서, 왜 사내들은 그 법도를 비껴가는 것입니까?”
가슴 속에 맺힌 말들을 한참이나 토해낸 서 씨는 이내 지친 듯 숨을 골랐다. 김 생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부인. 자네의 말이 다 맞소. 나는 이미 늙은 나이에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꼈소. 나도 그것들이 두려워 성현의 말씀을 수없이 되새기고, 부인과 함께 고생했던 젊은 나날도 다시 새겼소. 부덕한 나를 만나 자네가 고생한 바를 생각하면 내 미안함을 그칠 수 없소.”
김 생원은 말을 그치고, 아내의 손을 잡았다.
“작금에 생긴 일들로 부인의 몸과 맘이 많이 상했으니, 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허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로 부인의 몸과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 특히나, 내 다시는 그 기방에 가지 않을 것이오.”
“믿어도 되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내 기방에서의 그 날 밤, 이미 그리 다짐하였소. 밖에 행수 있는가!”
“예, 나리.”
“이제 내가 그 기방에 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일세. 그리 알고 앞으로는 우리 집에 인사를 오지 않아도 되네.”
“알겠사옵니다.”
“그걸로 되는 것이옵니까?”
서 씨의 반문에 김 생원은 잠시 말을 골랐다. 이내 그의 입이 문자를 외웠다.
“『중용(中庸)』에서는 도(道)의 단서가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소. 내 비록 고관대작에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나, 군자의 덕을 잃고 살지는 않을 것이오. 나의 도는 당신에게 있소.”
서 씨는 퉁퉁 불은 눈을 들어 김 생원의 눈을 마주하였다.
“……그 말씀, 저의 응어리진 가슴을 참으로 시원하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 또한 이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노부부는 여전히 주름이 가득한 각자의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사랑방 안의 소란이 사라진 짐과 동시에 걸노의 히죽거림도 사라졌으며, 마당 구석에서 각양각색으로 숨어 있던 노비들은 빗자루와 호미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 생원 댁에는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긴 숨을 토해내며 저물었다.
윙윙거리는 벌들이 제집을 지키기 위해 성화였다. 노비를 시켜도 될 일이건만, 김 생원은 직접 벌집을 들어 꿀을 들어냈다. ‘집 안 구석구석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그의 신조 때문이기도 했으나, 이미 장성한 자식이 여럿인 그에게 양봉은 마지막 취미이기도 했다.
벌통의 꿀을 따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꿀 수확을 마친 김 생원이 대문으로 들어서자, 걸노가 고했다.
“나리마님, 서신 왔습니다.”
“그러냐. 어디 한번 보자.”
‘다음 모임은 다음 달 보름이니,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김 생원은 씩 웃으며 답신을 썼다. 불참자의 변명을 빌려오는 제 모습이 퍽 우습기는 했다.
‘저는 아무래도 아내의 잔소리가 너무 심하여 모임에 참석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결례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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