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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조율(調律)메이트

소울메이트(soulmate)라는 존재


작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이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윤여정 배우가 얼마 전 미국의 토크쇼에 출연했다. 진행자 켈리 클락슨이 그녀에게 물었다.

“점쟁이가 당신에게 96세에 소울메이트를 만난다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윤여정은 이렇게 답했다.

“그래요, 그 나이 되면 내가 치매에 걸리거나 아플 수도 있는데, 소울메이트를 어떻게 알아볼까 의문이에요.”


캘리 클락슨 쇼의 윤여정(출처: 유튜브_The Kelly Clarkson Show)




그녀의 답변에 진행자는 자지러지게 웃었는데, 나는 재미있기보다 120% 공감하는 쪽이었다. 만약 내게 200살까지의 수명이 보장되고 그런 ‘점괘’가 주어졌다면, 난 소울메이트를 기대하고 기다릴 것인가 아닌가. 망설일 것도 없이 답은 후자다. 기다리지 않는다.

사실 난 정해진 운명이나 인연 같은 건 믿지 않는 쪽이라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몇 백 년을 돌고 돌아 끝내 만난 인연’이라든지, ‘다시 태어나도 오직 한 사람’이라는 주제가 나오면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사람은 적절한 때에,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소울메이트가 아니면 어떤가. 그리고 대체 소울메이트란 게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존재한다고 해도 소울메이트와 반드시 행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여고시절, 내게는 두 종류의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는 늘 보고 싶고, 그 아이의 모든 시간과 감정을 소유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이를테면 소울메이트라 해도 좋을 만큼. 때문에 그 친구가 다른 아이와 있는 모습만 보아도 질투가 났고, 곧잘 다퉜다.

다른 한 친구는 하루 이틀 보지 않아도 별 상관없었다. 그저 만나면 반갑고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이 친구관계를 통해 내가 결심한 한 가지는, 만약 나중에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전자보다 후자 같은 남자를 선택할 거라는 것이었다. 너무 좋아 미칠 지경인 누군가라니... 친구관계도 힘든데 남편은 오죽하랴. 물론 이건 감정의 소비를 극히 싫어하는 게으른 평화주의자, 나 같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시간


그렇게 나와 맞는 사람(내 기준으로 인성 괜찮고, 일 할 의지 충만하며, 함께 있으면 평화로운)과 결혼해 지금까지 무난하게 살아오고 있다… 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나는 오랫동안 장동건과 고소영 같은 선남선녀 스타 커플이 결혼한다는 뉴스를 보면 일종의 통쾌함 혹은 고소함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예쁘고 잘생겨서 세상 살기 쉬웠겠지만,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맛 좀 봐라.’

고소함의 강도는 어떤 커플이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더욱 심해졌다.

‘이쁘고 잘생긴데다 돈까지 많아서 우아하게 잘도 지냈겠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이제 진짜 지옥문이 열렸거든 흐흐…’

내게 결혼이나 출산은 ‘형벌’까진 아니었어도, 겪지 않아도 될 간난신고를 겪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긴 했던가보다. 물론 혼자 살더라도, 둘이 살더라도, 백 명이 함께 살더라도 행불행은 늘상 존재하지만 나는 나의 인생에 자연히 따라오는 간난신고를 많은 부분 결혼과 남편, 아이 핑계로 돌렸을 것이다. 혹여 소울메이트였다면,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면 달랐을까 생각해보아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대 부부가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행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네. 그렇지만 대부분은 남편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이네. 여자의 성품이 고약하여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아니하면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끝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고민하는 제자 이함형에게 써준 퇴계 이황의 편지이다. 퇴계는 첫 아내를 잃고, 지적장애를 가진 두 번째 아내를 맞았다. 스승처럼 섬겨온 권질(후에 장인이 된)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이 아내를 맞고 이황은 자식교육이며 안살림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고 존중했다고 전해진다.


〈퇴계 이황 초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은 세자인 남주인공 율이 기억을 잃고 촌구석에서 촌여자 홍심이를 만나 그녀의 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기억은 잃었어도 몸에 밴 고급스러움으로 인해 매사 불평과 타박뿐인 세자를 홍심이는 더없이 한심하게 본다. 새끼도 못 꼬고, 장작도 못 패는 주제에 육전에 버섯들깨탕 같은 고급음식만 해내라 요구하는 이 짐덩어리에 누군가 ‘아쓰남(아주 쓰잘데기 없는 남정네)’이란 별명까지 붙여주고. 그래도 내 낭군이란 심정으로 홍심이는 가끔은 그의 요구도 들어주고, 그러나 대부분 주먹으로 위협을 해가면서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어라… 이 아쓰남이 점점 진정한 그녀의 낭군이 되어간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2018(출처: tvN)




사실 궁엔 어엿한 세자빈이 있었다. 후에 기억이 돌아온 세자가 눈물로 환궁하지만, 애초에 사랑 따위 없는 세자빈과는 이른바 쇼윈도 부부고, 세자빈의 뱃속에 있는 아기도 세자의 씨가 아니다. 세자의 머릿속엔 오직 촌스럽고 소박했던 그녀 홍심이 뿐이다. 단 몇 달이었지만 그들은 울고 웃고, 싸우고, 서로를 위해주는 진짜 부부로 살았던 때문이다.

쇼윈도로 냉랭하게 시작했지만 진짜 부부가 된 쪽도 있다. 2011년의 드라마 〈공주의 남자〉 속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 세령과 승유의 사랑은 드라마적 허구다. 때문에 실존인물인 경혜공주와 정종의 비극적인 삶과 애틋한 부부애가 오히려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정종에게 시집가게 된 경혜공주는 혼례식 날부터 눈물을 보이며 궁을 떠난다. 마뜩치 않은 건 정종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정종이 공주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설정이지만, 실제로 공주와 혼인한다는 것은 집안에 아내라기보다는 상전을 들이는 것과도 같았고, ‘부마’라는 허울만 있을 뿐, 실질적 권력은 가질 수도 탐낼 수도 없기에, 야망 있는 사내라면 부마되는 것을 꺼려했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 2011(출처: KBS)




그러나 그렇게 맺어진 정종과 경혜공주의 관계는 문종의 죽음, 단종의 비극을 거치며 굳고 단단해진다. 도도하고 냉랭하던 경혜공주의 마음도 정종의 진실한 사랑에 점차 녹아버린다. 드라마에서 경혜공주가 정종에게 가장 많이 하는 대사가 “부디 살아 돌아오십시오.”일만큼 두 사람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죽은 듯 엎드려 살았다면 그런대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정종은 그리 하지 않았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동생을 죽인 세조를 찾아가 굴욕을 참고 “전하.”라 부르기까지 했던 경혜공주는 이후 정종의 유배지까지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단종의 충신이었고 끝내 임신한 아내의 눈앞에서 거열형을 당해 죽는다. 경혜공주는 아기를 출산하고 승려가 된다. 후에 세조가 다시 불러올리긴 했으나 그녀는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한 많은 눈을 감는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존재


앞서 내가 결혼에 대해 꽤나 시니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요즘 조금씩 변해가나 보다. 결혼한다는 커플을 보면 때론 흐뭇하고 부러운 기분까지 드는 걸 보면.

둘째까지 대학을 졸업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요즘이라 마음의 여유가 생긴 탓일까. 아이들이 떠난 집에 남은 세 사람(병든 노모와 부쩍 여기저기 아파지기 시작한 갱년기의 나와, 허연 머리의 남편)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다보니 아이들이 생기기 전 느꼈던 신혼의 단출한 즐거움이나, 서로에 대한 소중함이 되살아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름 전투 같았던 지난 세월을 함께 보낸 이에 대한 동지애, 전우애가 싹텄다 보는 편이 가장 적합하겠다. 처음엔 이해하기 힘든 점도, 나와 다른 점도 많았던 그가 이제 정말 소울, 아니 조율메이트 정도 된 것 같다. 게다가 이제 난 남편이 불쌍하다. 등만 보아도 불쌍하고, 튀어나온 뱃살을 보아도, 앙상해지는 허벅지를 보아도 불쌍하다. 왜 어르신들이 멀쩡히 잘 노는 아이들을 보고도 그리 딱하다, 딱하다 하시는지 알 것만 같다. 사랑의 최고 표현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이 아닐까.

오늘도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딱한 존재가 곁에 있어 행복하다.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방석과 병풍을 빌려주시오 - 혼례 용품을 돌아가며 사용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1 ~ 1617-02-27

1612년 1월 11일, 김택룡이 듣자니 좌수(座首) 권담(權湛)이 자신의 아들 김숙에게 편지를 보내 방석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결혼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아들에게 이르길, “권덕성(權德成)의 집에서 직접 가져다 쓰라고 권담에게 전하거라. 권덕성이 예전에 가지고 갔었는데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구나.”라고 하였다.

2월 13일, 박성백(朴成栢)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택룡은 아들 김숙을 시켜 음식접대를 하도록 했다. 택룡이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아들에게 전해 들으니, 박성백의 아재인 박흡(朴洽)의 아들이 권응명(權應明)의 사위가 되기 때문에 혼구용품을 빌리러 왔다고 하였다.

1617년 2월 17일, 심인 아재와 남민경(南敏卿)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남민경이 24일 사위를 맞이한다고 병풍과 방석을 구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었다. 2월 20일, 남민경이 택룡의 집에 와서 병풍과 방석을 빌려서 갔다.

2월 27일, 이전승이 그믐날에 사위를 맞이하므로 택룡에게 사람을 보내 병풍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택룡이 이전승에게 답장을 보냈다.

“현구고례 - 딸의 혼례식 다음날, 새 사위에게 인사를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3-28 ~ 1616-03-29

1616년 3월 28일, 김택룡의 둘째 딸이 혼례식을 올린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새 사위 권근오가 현구고례(現舅姑禮)를 행했다. 첨지의 정실(正室)과 소실(小室), 구고(九臯)의 대평 어미, 박진사(朴進士)의 소실(小室)도 함께 뵈었다. 술 한 잔을 나누고 끝냈다.

다음 날 29일, 비가 세차게 내려 사위 권근오가 돌아가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에 권근오가 침실로 들어가 택룡의 소실 신위(神位)에 절했다. 잠시 뒤 생원 권준신이 택룡의 집으로 하인을 보내 아들 권근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그가 내일 아침 일찍 아들을 보고 나서 대룡산(大龍山)에서 있을 황언주(黃彦柱)의 생신 잔치에 갈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사위가 내일 아침 갈 것이라고 하인에게 전하도록 했다.

“김지의 딸은 초례를 치르고, 김기의 아들은 장가를 가고”

김광계, 매원일기,
1608-01-24 ~ 1608-01-25

1608년 1월 24일, 이 날은 잔치가 겹친 날이다. 김지(金址) 재종숙의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고, 몇 년 전 돌아가신 김기(金圻) 재종숙의 아들인 광업(光業) 형이 장가를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덕유형은 봉화의 류씨 댁으로 장가를 가는데, 김광계는 김령 재종숙 등 집안 어른들과 함께 송석대까지 가서 전송해주었다. 송석대에서 돌아와서 밥을 먹은 뒤에 이번엔 곧바로 김지 재종숙 댁으로 갔다. 김령 재종숙은 오시쯤에 홀기(笏記)를 썼고, 이율은 찬자(贊者)를 맡았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 덧 저녁이 되어 신랑과 요객이 도착했다.

신랑은 월천 조목 선생과 학봉 김성일선생의 문인인 권익창(權益昌)의 아들 권규(權圭)이다. 요객(繞客)으로는 이의흥(李義興), 류덕기(柳德驥), 권인보(權仁甫)가 왔다. 김지 재종숙네 숙모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다음 날에도 동네 친족들을 불러 연일 잔치를 열었다. 김광계도 이틀 내내 가서 친족들과 흥겹게 먹고 마셨다

며칠 후에는 덕유 형이 봉화 처가에서 돌아오면서 술과 안주를 잔뜩 싣고 왔다. 동네 친족들이 또 모여 함께 먹었다.

“초간정(草澗亭) 연못에 하늘로 간 아내를 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02-24 ~ 1582-08-24

1582년 7월 15일,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지내는 날이었다. 그러나 권문해는 지난 6월 21일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상(喪)중이었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내가 떠나고 조문객을 받고 장례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권문해는 가족들이 가묘에서 차례를 지내는 동안 홀로 초간정을 찾았다.

초간정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연못을 보는데, 물고기 중 큰 놈들은 수통(水桶)을 통하여 다 나가고 작은 물고기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어찌하여 작은 물구멍을 따라 큰 물고기들은 연못을 떠나고 작은 물고기들은 남게 된 것일까?

초간정을 지을 때도 연못 만드는데 많은 공을 많이 들였던 권문해였다. 지난 2월(1582년 2월 24일)에 초간정을 한참 지을 무렵 초간정의 동쪽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을 보고, 연못을 만들게 하고 사람 어깨 높이만큼 물을 채웠다.

그런데 연못이 잘 못 쌓아져 물이 새는 곳이 보이자 2월 25일 다시 사람들을 모아 돌을 넓고 튼튼하게 쌓고 물이 새지 않도록 수통(水桶)을 두었을 만큼 연못을 정성껏 만들었었다. 그런데 권문해의 곁을 떠난 아내처럼 물고기들이 수통을 통해 연못을 떠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권문해는 텅 빈 연못을 못 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외관(外棺)을 만들어야 하고 상여도 준비해야 하는 등 할 일들이 많았기에 연못을 바로 고치지 못하였다. 텅 빈 연못을 보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권문해는 연못을 더 넓고 깊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8월 22일 연못을 새로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연못을 보고 무언가 모자란 듯 사람 50여 명을 얻어 밥을 먹이고 더 깊이 못을 파게 하였다. 그 깊이가 1장(丈)이나 되어 넓고 커다란 연못이 만들어져 큰 물고기도 답답하지 않게 노닐 수 있게 되었다. 해가 짧아져 연못을 다 만들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초간정에 나아가 연못 만들기를 하였고 드디어 작은 배를 띄울 만큼 큰 연못이 탄생했다.

“죽은 아내의 생일에 술을 올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4-12-01 ~ 1644-12-16

1644년 8월 18일, 김광계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김광계는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발인과 하관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삼우제(三虞祭)를 지내야 했다. 12월 1일은 재우제(再虞祭)였고, 다음날 삼우제, 그리고 12월 4일에 더 이상 곡을 하지 않겠다고 망자에게 알리는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삼우제가 끝나면 그간 장례를 함께 해 주었던 모든 친지, 지인들이 떠나가기 마련이었다. 김광계는 혼자 남았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6일, 아내의 생일이 되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위해 술, 과일, 떡, 국수 등 아내가 좋아할만한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아내의 궤연에 올렸다. 모든 장례가 끝난 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다시금 아내의 부재를 떠올리니 더욱 비통하고 애달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졸곡제에서 아내에게 더 이상 곡하지 않겠다고 알렸으니 이제는 망자와 자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더 이상 곡을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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