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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해로(偕老), 같이 늙어간다는 것,
서로에게 물들어간다는 것

집 안에 일가친척들이 가득 모여 있고, 그 집 마당 한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랑과 신부가 대례상을 두고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 댁 노부부께서 혼인하신 지 예순 돌이 되는 회혼(回婚)을 축하하는 잔치 자리입니다. 이 장면을 담은 회혼례도(回婚禮圖)를 보고 있노라면 그 잔치 자리에 동석한 양 흥겹다가도 노부부의 표정을 살피게 됩니다. 조선이란 사회에서 이토록 오랜 세월을 같이 한 노부부의 마음이, 그 삶이 궁금해집니다.

해로연(偕老宴)을 앞 둔 노부부의 마음과 삶을, 박지애 선생님의 “2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전해진 부부의 지혜, 〈노부탄(老婦歎)〉과 〈답부사(答婦詞)〉로 들여다 본 조선시대 부부의 삶”이란 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회갑을 맞이한 아내가 부부의 삶을 반추하며 남편에게 지어 건넨 가사(歌詞)와 이에 화답한 남편의 가사에서, 굴곡진 삶 속에서도 해로한 노부부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조선이란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 사회가 만들어 낸 관계에 종속되어 관계에 억눌려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이들은 “목소리를 내어 설득하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조율하여 부부관계를 얽어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의 모습은 홍윤정 작가님이 말씀하신 ‘조율메이트’라 할 만합니다. “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조율메이트”에서는,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과 〈공주의 남자〉 속 부부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홍심이와 원득이, 경혜공주와 정종은 서로를 채 알기도 전에 혼인부터 합니다. 혼인 후 여러 사건을 ‘같이’ 해결하고,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면서 그들은 ‘진짜 부부’가 되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진짜 부부’라 할 만하지만 실은 이 모습은 ‘현실 부부’이기도 합니다. 홍작가님은 경험담을 통해 작품 속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그들이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 속에서 그들에겐 ‘동지애’가 싹텄다고 하십니다. 부부는 ‘소울메이트’라기 보다는 이렇게 ‘같이하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율메이트’인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부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박영서 작가님의 “공처가 김 생원의 콧바람 든 날”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부가 기생을 두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이야기입니다. 믿지 못해 벌어진 소동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잘 해결이 된 것을 보면 김 생원 부부에게서 서로를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 했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김 생원 부부는 서로의 소중함을 작은 소동으로 유쾌하게 깨우쳤지만, 〈매원일기〉 속 김광계처럼 아내의 부재라는 슬픔 속에서,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속에서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서은경 작가님은 “스토리 웹툰-생일 제사”에 애절한 부부의 사랑을 담아 주셨습니다. 제사상에 커피를 올린 웹툰 속 아버지의 모습에서 故김광석 님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란 노래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 〈UP〉의 주인공인 칼(Carl) 할아버지가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부부의 시간을 거꾸로 헤아려 보면 그 끝에, 그들의 시작인 혼례가 있습니다. “정생의 혼례일기”에서 마을 사람의 혼례를 앞두고 있던 정생은 꿈속에서 “가야국 허황후의 혼례”를 겪게 됩니다. 회혼례도 속 혼례, 칼할아버지의 결혼식, 정생 마을의 혼례, 정생의 꿈 속 허황후의 혼례 등등, 시대마다 나라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르기 때문에 모두 모양새가 다르지만, ‘해로(偕老), 같이 늙어가자’는 약속은 모두 같습니다.

“이달의 편액-진충보국(盡忠報國)의 길 위에 선 화목(和睦), 칠인정(七印亭)”에서 칠인정과 그곳의 편액을 소개합니다. 이곳에는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의 유신으로 은둔생활을 했던 장표(張彪)와 조선에 출사했던 그의 아들과 사위에 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장표는 마지막까지 고려의 유신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켰지만 자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에서 열어주었습니다. 앞서 박지애 선생님이 말씀하신 “관계에 종속되어 관계에 억눌려 살지 않았던 지혜”를 장표와 그 가족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관계에 계속 억눌려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해로한 부부들에게서 배운 “존중과 신뢰”라는 지혜로,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관계들을 다시 돌아 봐야겠습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역적”, “왕이 된 남자”, “장영실”, “징비록”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방석과 병풍을 빌려주시오 - 혼례 용품을 돌아가며 사용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1 ~ 1617-02-27

1612년 1월 11일, 김택룡이 듣자니 좌수(座首) 권담(權湛)이 자신의 아들 김숙에게 편지를 보내 방석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결혼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아들에게 이르길, “권덕성(權德成)의 집에서 직접 가져다 쓰라고 권담에게 전하거라. 권덕성이 예전에 가지고 갔었는데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구나.”라고 하였다.

2월 13일, 박성백(朴成栢)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택룡은 아들 김숙을 시켜 음식접대를 하도록 했다. 택룡이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아들에게 전해 들으니, 박성백의 아재인 박흡(朴洽)의 아들이 권응명(權應明)의 사위가 되기 때문에 혼구용품을 빌리러 왔다고 하였다.

1617년 2월 17일, 심인 아재와 남민경(南敏卿)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남민경이 24일 사위를 맞이한다고 병풍과 방석을 구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었다. 2월 20일, 남민경이 택룡의 집에 와서 병풍과 방석을 빌려서 갔다.

2월 27일, 이전승이 그믐날에 사위를 맞이하므로 택룡에게 사람을 보내 병풍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택룡이 이전승에게 답장을 보냈다.

“현구고례 - 딸의 혼례식 다음날, 새 사위에게 인사를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3-28 ~ 1616-03-29

1616년 3월 28일, 김택룡의 둘째 딸이 혼례식을 올린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새 사위 권근오가 현구고례(現舅姑禮)를 행했다. 첨지의 정실(正室)과 소실(小室), 구고(九臯)의 대평 어미, 박진사(朴進士)의 소실(小室)도 함께 뵈었다. 술 한 잔을 나누고 끝냈다.

다음 날 29일, 비가 세차게 내려 사위 권근오가 돌아가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에 권근오가 침실로 들어가 택룡의 소실 신위(神位)에 절했다. 잠시 뒤 생원 권준신이 택룡의 집으로 하인을 보내 아들 권근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그가 내일 아침 일찍 아들을 보고 나서 대룡산(大龍山)에서 있을 황언주(黃彦柱)의 생신 잔치에 갈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사위가 내일 아침 갈 것이라고 하인에게 전하도록 했다.

“김지의 딸은 초례를 치르고, 김기의 아들은 장가를 가고”

김광계, 매원일기,
1608-01-24 ~ 1608-01-25

1608년 1월 24일, 이 날은 잔치가 겹친 날이다. 김지(金址) 재종숙의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고, 몇 년 전 돌아가신 김기(金圻) 재종숙의 아들인 광업(光業) 형이 장가를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덕유형은 봉화의 류씨 댁으로 장가를 가는데, 김광계는 김령 재종숙 등 집안 어른들과 함께 송석대까지 가서 전송해주었다. 송석대에서 돌아와서 밥을 먹은 뒤에 이번엔 곧바로 김지 재종숙 댁으로 갔다. 김령 재종숙은 오시쯤에 홀기(笏記)를 썼고, 이율은 찬자(贊者)를 맡았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 덧 저녁이 되어 신랑과 요객이 도착했다.

신랑은 월천 조목 선생과 학봉 김성일선생의 문인인 권익창(權益昌)의 아들 권규(權圭)이다. 요객(繞客)으로는 이의흥(李義興), 류덕기(柳德驥), 권인보(權仁甫)가 왔다. 김지 재종숙네 숙모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다음 날에도 동네 친족들을 불러 연일 잔치를 열었다. 김광계도 이틀 내내 가서 친족들과 흥겹게 먹고 마셨다

며칠 후에는 덕유 형이 봉화 처가에서 돌아오면서 술과 안주를 잔뜩 싣고 왔다. 동네 친족들이 또 모여 함께 먹었다.

“초간정(草澗亭) 연못에 하늘로 간 아내를 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02-24 ~ 1582-08-24

1582년 7월 15일,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지내는 날이었다. 그러나 권문해는 지난 6월 21일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상(喪)중이었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내가 떠나고 조문객을 받고 장례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권문해는 가족들이 가묘에서 차례를 지내는 동안 홀로 초간정을 찾았다.

초간정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연못을 보는데, 물고기 중 큰 놈들은 수통(水桶)을 통하여 다 나가고 작은 물고기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어찌하여 작은 물구멍을 따라 큰 물고기들은 연못을 떠나고 작은 물고기들은 남게 된 것일까?

초간정을 지을 때도 연못 만드는데 많은 공을 많이 들였던 권문해였다. 지난 2월(1582년 2월 24일)에 초간정을 한참 지을 무렵 초간정의 동쪽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을 보고, 연못을 만들게 하고 사람 어깨 높이만큼 물을 채웠다.

그런데 연못이 잘 못 쌓아져 물이 새는 곳이 보이자 2월 25일 다시 사람들을 모아 돌을 넓고 튼튼하게 쌓고 물이 새지 않도록 수통(水桶)을 두었을 만큼 연못을 정성껏 만들었었다. 그런데 권문해의 곁을 떠난 아내처럼 물고기들이 수통을 통해 연못을 떠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권문해는 텅 빈 연못을 못 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외관(外棺)을 만들어야 하고 상여도 준비해야 하는 등 할 일들이 많았기에 연못을 바로 고치지 못하였다. 텅 빈 연못을 보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권문해는 연못을 더 넓고 깊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8월 22일 연못을 새로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연못을 보고 무언가 모자란 듯 사람 50여 명을 얻어 밥을 먹이고 더 깊이 못을 파게 하였다. 그 깊이가 1장(丈)이나 되어 넓고 커다란 연못이 만들어져 큰 물고기도 답답하지 않게 노닐 수 있게 되었다. 해가 짧아져 연못을 다 만들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초간정에 나아가 연못 만들기를 하였고 드디어 작은 배를 띄울 만큼 큰 연못이 탄생했다.

“죽은 아내의 생일에 술을 올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4-12-01 ~ 1644-12-16

1644년 8월 18일, 김광계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김광계는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발인과 하관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삼우제(三虞祭)를 지내야 했다. 12월 1일은 재우제(再虞祭)였고, 다음날 삼우제, 그리고 12월 4일에 더 이상 곡을 하지 않겠다고 망자에게 알리는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삼우제가 끝나면 그간 장례를 함께 해 주었던 모든 친지, 지인들이 떠나가기 마련이었다. 김광계는 혼자 남았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6일, 아내의 생일이 되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위해 술, 과일, 떡, 국수 등 아내가 좋아할만한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아내의 궤연에 올렸다. 모든 장례가 끝난 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다시금 아내의 부재를 떠올리니 더욱 비통하고 애달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졸곡제에서 아내에게 더 이상 곡하지 않겠다고 알렸으니 이제는 망자와 자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더 이상 곡을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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