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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웹툰 독(獨)선생전


조선시대 난방


해마다 겨울이 되면 전력 및 가스의 공급과 비용 때문에 난방문제가 심각해진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절약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지 별별 궁리를 다해낸다. 기능성 보온의류부터 연탄난로까지... 난방기술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지금도 그런데 온돌에만 의지하던 옛날은 어떠했겠는가? 좀 산다는 양반집에서도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니, 일반 백성들은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날씨가 어지간히도 추웠나 보다. 김택룡이 입이 얼어 말을 못 할 지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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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으로 이사하다


1593년 10월 2일, 오희문 일가는 다시금 집을 옮겼다. 이 집은 임천 고을에서 5리쯤 떨어진 서쪽 변두리 검암리란 곳에 있었다. 본래 집주인은 덕림이란 백성이었는데, 덕림은 이미 죽은 지가 오래이다. 그리하여 그 외손자인 김화동이 지금 집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웃에서 머물면서 이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을 꺼려 하였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세를 들어 산 지가 몇 년인데, 최근 집주인이 그 사람을 내보내고 오희문 일가에게 이 집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어제 아들 윤해가 종 둘을 데리고 가서 새 집 청소를 하고, 창도 발라두었다. 또 나무를 헤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 두었다. 그런데 이 집은 좋지 않은 점이 네 가지가 있었는데, 오래도록 불을 때지 않은 방이어서 땔감 한두 다발로는 방이 여간해서 더워지지 않았다. 둘째는 나무할 곳이 몹시 멀어서 수시로 땔감을 해오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로는 우물이 너무 멀어서 물을 사용하기가 몹시 불편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굴뚝을 잘못 설치하였는지, 아궁이에 불을 때면 온 집안에 연기가 가득해서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란 점이었다.

그렇지만 집의 모양이 제법 갖추어져 있고, 게다가 기와를 정갈히 올린 집이었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이리하여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이 집에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게다가 집의 단점은 주로 온돌과 아궁이 때문이었는데, 근래 양식거리가 모두 떨어져서 밥 지을 일도 뜸하니, 이로 인해서 불평할 일도 많지 않았다. 밥 지을 양식이 없는 차에 아궁이와 온돌이 부실한 집에 들어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오희문은 이런 객쩍은 생각을 하며 저녁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마음이 답답해졌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93-10-02 ~
장소 : 전라북도 장수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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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세를 올려 받으려 수작부리는 집주인


주동(鑄洞)에 있는 허 생원의 집으로 이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지인의 인척이라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화근이었다. 본디 노상추가 세낸 집은 허 생원의 집 중 별사랑이었다. 노상추는 27관(貫)을 내고 이 집을 사용하기로 계약하였다. 그런데 지금 허 생원이 승지 허질(許晊)이란 사람에게 40금(金)을 받을 욕심으로 노상추를 쫓아내고 허질에게 집을 내주려고 하는 수작을 부렸다. 염치도 없지!

노상추는 그럼 이미 낸 세전 27관을 돌려주면 집을 비워주겠다고 허 생원에게 말했다. 허 생원은 허질에게 40금을 받아 놓았으나 그 돈을 모조리 써 버렸기 때문에 노상추에게 내줄 세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허 생원은 노상추에게 3관을 더 내면 그대로 살게 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노상추는 3관을 더 내고 그대로 이 집에 눌러살기로 마음먹었다. 허 생원이 하는 짓거리가 괘씸하기는 하나 다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며칠 뒤, 허 생원이 다시 찾아와 “며칠 전에 사당 안에 있는 사랑에 온돌을 놓았으니 허질 승지와 서로 방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노상추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꾹 참고 “차라리 이사할지언정 방을 서로 바꾸지는 않겠소.”라고 답하였다. 허 생원은 지지 않고 “그렇다면 계약을 무르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맞섰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노상추가 세전 30냥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니, 허 생원은 “돈은 이미 다 써서 10냥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거라도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노상추는 결국 화를 냈다. “사람 대하는 일을 아이들 놀이같이 하는 거요?” 허 생원은 결국 노상추에게 사과하고는, 사당 안에 있는 온돌 깐 사랑을 다른 이에게 세 주어 30냥을 마련하여 내놓았다. 노상추는 두고두고 허 생원의 짓거리를 욕하면서 이사 준비를 했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96-04-10 ~ 1796-04-21
장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허림, 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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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은하수 사이를 날아가는 매를 잡기 위해 가난한 백성을 고생시키다니,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다”

김종직, 유두류록, 1472-08-17 ~

1472년 8월 17일, 청량산을 유람 중이던 김종직은 산중 초막을 보았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치고 온돌〔土炕〕도 놓았다. 이것은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잡는 막사였다. 김종직이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곳에 이르는 동안, 언덕과 산 곳곳에 설치해 놓은 매잡이 도구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보아왔다. 아직은 가을이 깊지 않아 매 잡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은하수〔雲漢〕사이를 날아간다는 매가 어찌 이 빼어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두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노끈에 매이게 되니, 이것으로도 사람을 경계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바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재미있는 놀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밤낮으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니, 어진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새 집으로 이사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3-10-02 ~

1593년 10월 2일, 오희문 일가는 다시금 집을 옮겼다. 이 집은 임천 고을에서 5리쯤 떨어진 서쪽 변두리 검암리란 곳에 있었다. 본래 집주인은 덕림이란 백성이었는데, 덕림은 이미 죽은 지가 오래이다. 그리하여 그 외손자인 김화동이 지금 집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웃에서 머물면서 이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을 꺼려 하였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세를 들어 산 지가 몇 년인데, 최근 집주인이 그 사람을 내보내고 오희문 일가에게 이 집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어제 아들 윤해가 종 둘을 데리고 가서 새 집 청소를 하고, 창도 발라두었다. 또 나무를 헤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 두었다. 그런데 이 집은 좋지 않은 점이 네 가지가 있었는데, 오래도록 불을 때지 않은 방이어서 땔감 한두 다발로는 방이 여간해서 더워지지 않았다. 둘째는 나무할 곳이 몹시 멀어서 수시로 땔감을 해오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로는 우물이 너무 멀어서 물을 사용하기가 몹시 불편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굴뚝을 잘못 설치하였는지, 아궁이에 불을 때면 온 집안에 연기가 가득해서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란 점이었다.

그렇지만 집의 모양이 제법 갖추어져 있고, 게다가 기와를 정갈히 올린 집이었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이리하여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이 집에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게다가 집의 단점은 주로 온돌과 아궁이 때문이었는데, 근래 양식거리가 모두 떨어져서 밥 지을 일도 뜸하니, 이로 인해서 불평할 일도 많지 않았다. 밥 지을 양식이 없는 차에 아궁이와 온돌이 부실한 집에 들어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오희문은 이런 객쩍은 생각을 하며 저녁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마음이 답답해졌다.

“새 집을 수리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24 ~

1597년 4월 24일, 오늘 오희문은 새로 이사한 집을 수리하였다. 언신을 시켜서 변소를 만들게 하였고, 원각사에서 중을 불러다가 방에 온돌을 깔도록 하였다. 앞으로 이 집에 얼마나 머물지는 알 수 없으나, 머무는 동안은 불편함이 없도록 이것저것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새로 변소를 만들고, 방바닥에 온돌을 깔면 당분간은 식구들이 지내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이었다.

저녁 무렵에는 고을의 무쇠장인 조언희란 자가 솥 두 개와 농기 2벌을 가지고 왔다. 오희문은 주문한 기억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평강현령인 아들 윤겸이 무쇠장에게 명령하여 만들어 온 것이었다. 아궁이에 커다란 솥 두 개를 걸고, 농기구 역시 갖추어 놓으니 한결 집이 그럴듯해 보였다.

이렇게 집의 수리를 마쳐 놓고는, 저녁 무렵 이웃의 전업과, 그 사위인 박언수가 천어 60여 마리를 가져다주었다. 오희문은 큰 놈은 골라서 소금에 말려 두고, 작은 놈들은 국을 끓여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는 새로 수리한 집에서 가족들이 무탈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빌었다.

“금군(禁軍)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4-10-02 ~ 1784-10-19

날이 추워지자 노상추는 매일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노상추에게 도성의 추위는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물며 실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 군관에게는 겨울이 더욱 힘든 계절이었다. 가을에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가을에는 국왕이 친림하는 행사가 많았기에 오랜 시간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또 가을이라고 해서 안 추운 것도 아니었다.

춘당대에서 왕세자 책례(冊禮)와 과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이 열릴 때도 노상추가 속한 금군(禁軍) 전원이 나가서 종일 시위해야 했으며,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문신 전강(殿講)을 행할 때도 시위에 참여해야 했다. 연일 밖에 서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번을 설 때 머무는 금군청의 생활도 힘들었다. 금군청은 마루가 깔려 있을 뿐 온돌이 깔려 있지 않았기에 추운 날씨에 밖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와도 몸을 녹일 곳이 없었다. 겨울에는 사흘씩 금군청에 머무는 일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뼈에 스미는 늦가을의 추위가 노상추의 마음을 슬프고 비통하게 했다. 평생 앓게 될 병이 금군청에서 시작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노상추는 고된 금군 생활을 자조하였다.

“추위와 배고픔에 길을 내는 역군들을 측은해하다”

이중하, 백두산일기, 1885-10-16 ~

1885년 10월 16일, 토문감계사 이중하 일행은 비로소 산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어른들이 모두 전송하여 수서(水西)에 도착하였다. 읍리 안창준(安昌俊)이 식량과 마초를 짊어졌는데, 말에 싣고 민간의 장정 수십 명을 징발하여 먼저 출발하였다.

일행과 그들이 한 길에 이어졌다. 출발 초기에는 비록 간솔하였지만, 인마가 오히려 70이 되었다. 산 입구에서부터 물을 따라 갔다. 길이 모두 평탄하고 아주 높거나 험한 곳이 없었다.

간간이 수전(水田)을 새로 경작한 지역이 있었다. 나무는 모두 삼나무와 자작나무였다. 자생하기도 하고 저절로 말라 죽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것은 백선차(白鮮茶)였다. 그런데 본초(本草) 가운데 이것이 어느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차 맛은 매우 좋았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이는 풀과 나무도 세상 사람들과 잘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40리를 가서 직동(直洞)에 도착하였는데, 머물러 쉬는 막사가 있었다. 사냥꾼들이 자는 곳이다. 그 집의 구조는 양 기둥에 서까래를 걸고 지붕이 없어서 바로 바깥으로 통한다. 앉아서도 하늘을 볼 수 있고 비와 이슬이 흘러 내렸다. 대개는 사냥꾼이 와서 자는데, 불을 때서 추위를 막았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연기와 불꽃이 통하지 않는다.

막사는 몇 곳이 있었다. 온돌은 하나만 있는데 서너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중하와 진영, 가원계가 함께 묵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숙하면서 불을 때고 혹은 앉고 혹은 졸았다. 마부와 역에 동원된 장정들은 바깥에서 나무를 잘라 불을 때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듣자하니 이 사람들은 길을 내는 역군으로 전에 입산하여 이처럼 지낸지가 한 달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배고프고 추운 고생이 사람으로 하여금 측은하게 하였다. 이들은 오히려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산골짜기 백성의 순박함과 윗사람을 섬겨 일에 종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이날 밤 그들과 함께 거처하니,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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