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현 예방 조맹석이 교방(敎坊)의 악공들을 불러 모았다. 포천현에는 악공이 여섯이 있었다. 이들은 녹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만 머리에 복두(幞頭)가 아닌 녹색 두건을 쓰고, 허리에는 검은 오정대(烏鞓帶) 대신 붉은 두석홍정대(豆錫紅鞓帶)를 띠고 있었다. 이런 복식 차이를 떠나 그는 지팡이로 좌우를 짚어가며 사람들을 따라왔으므로 관현맹인(管絃盲人)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관현맹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으로 음악을 하는 악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현맹인 복장(출처: 『국악원논문집』 16, 부록)
조 예방이 헛기침을 한번 한 뒤에 입을 열었다.
“본래 악공들의 정기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동안 공사가 다망하여 미처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오늘 너희를 부른 것은 그 시험을 치기 위함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기 실력을 선보이면 될 것이다.”
관현맹인 고유현이 손을 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눈이었지만 갈색의 깊은 빛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정하게 수염을 정돈한 모양을 보면 그가 혼자 얼굴 단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험이라면 당악기를 봅니까, 향악기를 봅니까?”
당악기는 제례 음악을 할 때 사용하는 중국 악기이고 향악기는 조선의 고유한 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조선 악기이다.
“향악기를 볼 것이다. 그래, 말을 한 김에 관현맹인 고유현, 너부터 시작하자. 대청으로 올라오거라.”
관청 마루에 가야금이 놓여 있었다. 고유현이 올라와 가야금 앞에 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또 따님께서는 무슨 일로 함께 하시는 건가요?”
조 예방이 흠칫 놀라 숨을 들이켰다. 오달현 현감의 딸 산비는 대청 병풍 뒤에 있어서 보이지가 않았는데, 고유현이 대뜸 눈치를 챈 것이다.
“그걸… 어찌 알았나?”
“아가씨의 숨소리도 들리고 분 냄새도 나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고 하더니 정말 귀신같네 하고 조 예방은 속으로 생각했다.
“흠흠, 아가씨께서 음악에 관심이 깊으셔서 오늘 시험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특별히 모셨네. 병풍 뒤에 계시니 보이진 않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시험에 임하도록.”
“알겠습니다. 무슨 곡을 연주하면 되는지요?”
“향악기 시험에는 여민락(與民樂) 본령(本令)을 연주하면 되네만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뭐든 자신 있는 곡으로 한번 연주해보게나.”
『속악원보 지(俗樂源譜 智)』 1881년(영조 18) 작자미상의 악보로,
여민락(與民樂)과 보허자(步虛子)의 관보(管譜)와 현보(絃譜)가 수록된 악보(출처: 국립국악원)
여민락은 세종이 만든 곡으로 궁중 행사에 사용되는 것으로 매우 느리고 장중한 음악이다. 궁중 행사에 사용되는 음악인만큼 나라에 소속된 악공이라면 당연히 탈 줄 알아야 하지만,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 아니라 지방 관청 교방의 악공이 굳이 그걸 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곡 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유현은 가야금을 무릎에 얹고 자세를 잡았다.
“영산회상 중 타령을 연주하겠습니다.”
하지만 첫 음부터 약간 불안한 느낌이었다. 병풍 뒤에 있던 산비가 씩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웬 걸. 연주가 거듭될수록 안정적이 되었고, 어느 틈에 음악에 빠져들고 말았다. 영산회상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것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불교 음악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아한 높은 품격을 가진 곡이다. 본래 합주로 연주하는 것이지만 고유현의 연주는 마치 모든 악기를 거느린 듯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비도 어쩐지 놀라운 마음이 들어 저절로 눈물을 한 방울 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연주가 끝나자 조 예방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병풍 쪽을 바라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조, 좋은 연주였네. 그런데 분명히 첫 음이 이상했는데… 아니, 자네 그게 무슨 일인가!”
조 예방이 말을 하다 말고 기겁을 한 목소리를 냈다. 심상찮은 조 예방의 반응에 산비가 얼른 일어나 대청으로 나왔다.
“피가…!”
고유현의 녹색 단령(團領)에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져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야금의 앞부분, 즉 오른손으로 튕기는 쪽은 피바다라고 할 만큼 피가 흥건했다.
“빨리 의녀 행덕이를 불러주세요.”
산비가 누구라 할 것 없이 지시를 내렸다. 조 예방이 다시 통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료 악공들이 우르르 대청으로 올라와 고유현의 손가락을 살펴보고 급한대로 옷을 찢어 손가락을 동여맸다.
산비는 가야금을 살펴보았다. 피로 물든 가야금 줄 사이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다.
살짝 손을 대보니 날카로웠다. 연줄에 사금파리를 먹이듯 가야금 줄에 사금파리를 먹여놓은 것이었다. 고유현이 아니었다면, 눈이 보이는 악공이었다면 분명히 줄을 튕기기 전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서 첫 음이 불안정했구나. 바로 손가락을 베였어. 그런데 왜?’
산비는 고유현 쪽으로 몸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첫 음이 불안정했던 게 손가락을 베었기 때문이군요. 왜 연주를 멈추지 않았나요?”
고유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같은 사람은 명을 받으면 받잡을 뿐이지요. 연주를 시작한 이상 목에 칼이 들어와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시험에서 떨어지면 쫓겨날 것이고, 그러면 살아갈 방도가 없는 몸입니다. 보시다시피 앞이 보이지 않으니. 어려서부터 소리가 좋아서 관현맹인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주역을 배워 점을 치리까, 옥추경(玉樞經)을 외워 독경을 하리까? 다른 길이 없으니 죽어라 할밖에요.”
『옥추경(玉樞經)』 조선시대에는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칠 때 가장 흔히 독경되었으며, 맹인(盲人)이 외워 읊었음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몽수(朦瞍=시각장애인)의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점쟁이, 독경사 그리고 관현맹. 아니 굳이 말하자면 걸인까지 넣을 수 있겠다. 몽수가 적선을 바라 구걸을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고유현이 한숨을 한번 내쉬고 말했다.
“점은 신기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 않다면 그저 사람을 속이는 길이 아닐까 싶어 도무지 못하겠고, 독경 역시 그걸로 복이 온다고 믿기가 너무 어려워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더군요. 하지만 소리는 정직하더군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가슴 속 깊은 감정을 내뱉게 만들어줍니다. 이걸 떠나선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베어지는 게 아니라 잘라져버린다 해도 소인은 이 길에 남고 싶습니다.”
산비는 이마를 짚었다.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다. 실제로 보지도 않고 넘겨 짚어버렸던 것이다.
이 일은 산비가 놀라 깬 오늘 새벽에 시작되었다.
가랑이 사이가 척척하여 기분이 나빠 살펴보니 갈색으로 물들어있었다. 피비린내가 확 끼쳤다. 담력도 어지간한 산비였지만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무, 무슨 일이냐?”
아버지 오달현 현감이 놀라서 달려왔는데, 산비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들어오지 마세요!”
“아니,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
“의원, 아니 의녀를 불러주세요!”
“의녀? 우리 고을에 의녀가 있던가?”
오 현감이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머슴 철근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교방의 기녀 중에 허 의원 밑에서 의술을 배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애라도 불러올깝쇼?”
“어서 불러와라!”
이리하여 한밤중에 자다말고 불려온 예비 의녀 행덕은 산비보다 한 살이 어렸다. 행덕이 마당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오 현감에게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불렀으니 왔지. 어서 우리 애기 상태를 보아라.”
의녀를 불러 진찰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안채로 간 행덕은 파리한 얼굴의 산비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환자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가 안 좋으신지요?”
“피가 나왔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행덕은 이불을 젖혀 살펴보더니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뭐냐, 뭔데 그러냐? 빨리 말해라.”
“저, 저…”
행덕은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간신히 입을 떼었다.
“달거리입니다.”
“달거리? 달거리가 뭔데?”
“아, 모르셨군요.”
달거리는 생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비는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철이 든 뒤에는 집안 살림을 혼자 도맡아 했기 때문에 여자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 같은 것은 듣지 못했다. 한양에 있었다면 동무 중에 먼저 생리를 하거나 해서 알 수도 있었을 텐데, 포천에 온 후에는 그런 이야기를 할 동무가 없었다.
자신도 경험이 없는 달거리에 대해서 행덕은 우물쭈물 설명을 하고 급히 생리대인 개짐을 만들었다. 또 바로 허 의원 댁으로 뛰어가 약재 오공칠(蜈蚣七)을 가져왔다. 오공칠을 달여서 산비에게 먹였다.
“이건 무슨 약이냐?”
“피가 좀 덜 나게 하는 약입니다. 꽃잎을 달여서 만든 것이니 걱정 마시고 드십시오.”
“꽃잎? 무슨 꽃인데?”
“개불알꽃입니다.”
그 말에 산비는 먹던 탕약을 뿜을 뻔했다.
“무슨 꽃 이름이 그 모양이냐? 그런 걸 먹어도 되는 거라고?”
“생긴 모양이 좀 그렇게 생겨서…”
행덕이 꽃 이름이 자기 잘못인 양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는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이름이 뭐냐?”
“행덕이라고 합니다.”
“의녀라면 혜민서에서 공부를 하고 온 거냐?”
행덕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복을 타고난 팔자가 아니죠. 그냥 우리 고을 허 의원 댁에서 눈동냥을 하고 있습니다.”
의녀는 본래 혜민서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모든 고을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을 알만 해서 산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구나. 의녀 일을 하다보니 손이 이렇게 거칠어진 것이냐?”
행덕이 진맥을 할 때 그녀의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여럿 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손끝이 두꺼워서야 진맥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
행덕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이것은 의술 공부 때문이 아니옵고….”
“그럼 무엇 때문이냐?”
“가야금 공부 때문입니다.”
“가야금? 의녀가 가야금은 왜?”
“쇤네는 본래 기생의 딸이라 기녀 일도 배워야하기 때문에…”
기생의 가야금 연주 모습(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의녀 일은 기생이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약방기생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가야금을 배우느라 이렇게 손가락이 다 망가질 정도가 되었단 말이냐? 선생이 대체 누구냐?”
“아니… 뭐… 가야금을 배우는 게 힘들긴 하지만… 스승님 잘못은 아닙니다.”
“그래, 아니라고 하고. 대체 누구냐?”
“관현맹 고유현입니다.”
교방은 연회를 담당하는 곳으로 악공과 기녀가 모두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린 기녀들은 춤과 노래를 기본으로 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각종 기예를 배우게 된다.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다루는 것도 물론 당연히 배워야 하는 기예였다.
산비는 행덕의 손을 등잔불 곁으로 끌고 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손가락들이 다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오른손 검지는 찢어졌다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이라도 핏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한번 고유현 악공을 내가 꼭 봐야겠다.”
이렇게 착하디 착한 아이를 손가락 끝이 갈라지도록 학대하는 눈 먼 인간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뭐든 트집을 잡아 요절을 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 조 예방을 만나 계절마다 치러야 하는 악공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기회로 삼아 트집거리를 잡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비는 자책감에 가슴을 쳤다.
“부르셨습니까?”
행덕이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그래, 고 악공이 손을 다쳤다. 어서 살펴보도록 해라.”
행덕이 대청으로 올라와 고유현의 손을 살폈다. 이미 말을 들은 터라 붕대와 연고를 준비해왔기에 얼른 처치를 할 수 있었다.
“상처가 깊은 것은 아니어서 금방 아물 것입니다.”
산비가 불길이 타오르는 눈으로 행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네?”
“왜 가야금 줄에 사금파리를 먹였냐고 묻는 것이다. 이 가야금을 대청으로 가져온 것이 네가 맞으렷다!”
그 말에 행덕이 넙죽 엎드렸다.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유현이 산비 뒤에서 말했다.
“어린아이의 장난에 너무 노하지 마십시오. 기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니 저렇게 화를 푸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고유현의 말을 듣자 행덕이 울먹이며 말했다.
“줄을 한번만 튕겨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다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산비는 다시 한번 속으로 가슴을 쳤다. 선대왕(정조)이 말씀하시길 ‘몽수는 보이는 것이 없으니 반드시 사악한 생각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맞았는가 보았다. 고유현은 자기를 해치려고 한 기녀도 감쌀 줄 아는 군자였다.
“네 스승의 얼굴을 보아 너를 용서하겠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거라.”
산비의 말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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