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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바다 거인의 보살핌


“무슨 잔치가 있나 봐?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나네?”

목금이 코를 벌름거리며 백이에게 말했다.

“먹을 복이 있으셔. 오늘 삼촌 오신다고 지지미에 너비아니에 난리 났다, 뭐.”

백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 진사네 둘째인 정삼환은 무관으로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있었다.

“한양 삼촌이 여기까지 온다고? 웬일이래?”


〈성종 때, 박종원(朴宗元)을 삼봉도 경차관으로 임명하고 저포 철릭과 마피화 등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번에 직속 상관인 훈련원 판관 나리가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이 되셨다지. 그래서 따라갔다가 고향도 가까우니 들렀다 오라고 말미를 받아서 오신다는 거야.”

“삼봉도 경차관이라면 저기 울릉도 살펴보는 일을 맡았다는 거지? 거기 정말 멀다고 하던데.”

“그건 잘 몰라. 울릉도 살펴보는데 왜 삼봉도라고 해?”

“울릉도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세 개 있대. 그래서 옛날에 삼봉도라고 불렀대. 아마 옛날 명칭이 좀 더 근사하게 들려서 그렇게 부르는 거겠지.”

목금의 설명에 백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허세들은 대단해.”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오시는데 어떻게 알고 잔치 준비를 하는 거야?”

“그야 미리 병사가 와서 알려줬지. 어제 소식이 왔어.”

그때 대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삼촌 왔나 보다.”


〈아산시에서 진행한 2021년 한복문화주간아산 한복풍류 무관복식〉 더보기


백이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목금도 백이 뒤를 따라 나갔다. 과연 정삼환이 막 대문을 통과한 참이었다. 참상관 무관답게 붉은 전복에 환도를 차고 동개에 꽂힌 화살의 깃털마저 화려했다. 신은 무관들이 신는 수피화로 윗부분에 짙은 녹색 천을 덧댄 가죽신이었는데,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이고, 우리 백이 조카, 잘 있었어?”

삼환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카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목금이 인사를 올렸다.

“아, 네가 그 세책방 집 딸이지? 많이 컸구나.”

“삼촌, 난 안 컸고?”

백이가 부러 샐쭉한 척 말하자 삼환이 당황한 척 말했다.

“백이도 많이 컸네. 이제 시집가도 되겠구나.”

“뭐야! 그게! 시집 같은 거 안 가!”

백이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그래. 시집가지 말고 삼촌네 와서 살자.”

“어? 그래도 돼?”

“그럼! 한양에서 살고 싶지 않냐?”

“살고야 싶지.”

될 리는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한양 가서 살지 않겠냐는 말은 솔깃한 말이었다. 백이는 헛된 꿈을 털어내는 양 도리질을 쳤다.

“쓰잘데 없는 말은 그만하고 울릉도까지 갔다 왔는데 무슨 선물 없어?”

“귀여운 조카한테 줄 선물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지!”

삼환은 소맷자락을 흔들었는데 뭔가 들어있는 듯 묵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먼저 형님께 문안은 올려야지. 좀 기다리면 네 방으로 가마.”

금방 올 것처럼 말한 삼환은 좀처럼 오질 않았다. 저녁 식사까지 먹은 목금이 그만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백이야, 삼촌 왔다.”

백이가 목금의 소매를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뭐야, 이렇게 늦게 오기 있어?”

문이 드르륵 열렸다.

“하하, 미안, 미안. 형님이 놓아주질 않아서 늦었다.”

삼환은 한잔 거나하게 들이킨 모양으로 얼굴이 불콰했다.

“아유, 술 냄새!”

“하하, 그것도 미안. 그럼 먼저 선물부터 볼까?”

삼환이 소맷자락에서 비단 주머니를 쑥 꺼냈다.

“열어보려무나.”

비단 주머니 안에는 예쁜 조개껍데기, 소라고둥이 수북이 들어있었다. 바다 냄새가 확 느껴졌다. 백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와, 너무 예쁘다.”

조개의 무늬도 아름다웠지만 백이의 눈길을 끈 건 커다란 소라고둥이었다.

“이건 뭐야?”

“소라고둥이지. 그거 귀에 대면 바닷소리가 들린다?”

“에이, 거짓말.”

하지만 백이는 그러면서 소라고둥을 얼른 귀에 갖다 댔다.

“정말! 정말! 신기한 소리가 들리네. 너도 들어봐.”

백이는 목금에게 소라고둥을 건네주었다. 소라고둥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목금의 얼굴이 갑자기 파랗게 질렸다.

“울릉도 다녀오시면서 별일 없으셨어요?”

목금이 소라고둥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별일이라. 별일이 있었지. 그 이야기도 해주려고 했다.”

삼환이 굳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

〈《용왕도》와 《용태부인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용왕도는 사해(四海)를 관장하는 용왕을,
용태부인도는 용의 부인이자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여신을 그린 그림이다.


울진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지. 어촌 사람들이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야 무사하다고 주장하는 거야. 보통 그렇게 해서 이것저것 관원들에게 뜯어내려는 수작인 거지만 바닷가 선원들에게는 워낙 미신이 많은 데다가 그걸 다 무시하면 뒤탈이 나도 늘 그 핑계를 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지.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제사를 지내려니 졸려서 죽을 판이었어. 제사 지내야 할 신도 많았지. 대해신(大海神), 용왕신(龍王神), 소성신(小星神)의 세 신에게 제사를 지냈지. 소성신이 뭐냐고? 나도 몰라. 나중에 보니까 바다에서는 밤에 별을 보며 방향을 잡는다고 하더군. 그러니 별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야. 그런데 왜 작을 소(小)자를 쓰냐고? 대해신에 비해서 별신은 작은 존재라 그런 것 같아. 이 소성신에게는 바람을 주관하는 비렴(飛廉)이라는 신하가 있어서 순풍을 불게 해달라고 빌더군.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도 제사를 지냈어. 행여 원혼이 해코지 할까 두려워 그런 모양이야. 그리고 배에 오른 뒤에는 또 배의 신인 선신(船神)에게 제사를 지내더군.

이렇게 철저히 신의 보호를 기원하면서 출항했지. 그런데 제사 지낸 것도 소용없었는지 엄청난 풍랑을 만났지 뭐야. 빗줄기가 무슨 장대 같아서 맞으면 얼굴이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파도는 또 어떻고. 파도가 마치 벽처럼 일어서서 배를 덮치더라고.

선원들이 모두 미친 것처럼 배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 신한테 기원하는 것 말고도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고. 그런데 나야 뭐 배를 다룰 줄은 모르니 밀려드는 파도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지. 그때였어. 그 폭풍우 속에서 이상한 짐승을 본 거야. 새 같은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반점이 있는 몸뚱이에 날개가 붙어있더라고. 아, 그뿐이 아니었어. 몸을 돌릴 때 보니까 네 발에는 발굽이 달려있고 뱀 같은 꼬리가 달려있었지.

뭐? 그게 바로 비렴이라고? 바람을 부리는 신? 목금이 넌 별걸 다 알고 있구나. 아무튼 비렴이 날뛰는데 갑자기 바닷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 불쑥 솟아올랐어. 비렴을 냅다 후려치더구나. 비렴이 날쌔게 피해서 맞지는 않았는데 겁을 먹었는지 물러나더구나. 그러자 비바람도 그쳤어. 그 거인은 비바람이 물러나면서 다시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지. 세상에, 그 모든 걸 본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니 말이 되나.

울릉도에 도착한 뒤에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제수를 갖춰서 용왕신께 제사를 지냈지. 출항할 때는 해도 그런 제사는 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 아니더라고. 뱃사람들도 용감했지. 그 사람들이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출항 전에 진심으로 제사를 지냈으니 신들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 풍랑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아, 그렇지. 소성신한테도 제사를 지냈는데, 소성신의 부하인 비렴이 왜 풍랑을 일으켰냐고? 글쎄 그게 말이지. 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거든.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울릉도 지도〉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울릉도에 간 이유는, 그곳에서 몰래 무기를 만든다는 소문이 있어서였어. 역모를 꾀하는 역도 무리가 울릉도에서 병장기를 만든다는 첩보가 있었거든. 우리는 섬을 샅샅이 수색했지. 섬에 도망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 그중에 대머리 한 명이 있었어. 머리에만 털이 없는 게 아니라 눈썹도 수염도 없었지. 온몸에 털이라곤 없더라고.

‘너는 어찌 이런 몰골이 된 것이냐?’라고 묻자 넙죽 엎드리며 대답하더군. 먼 바다로 나갔다가 커다란 물고기를 만났는데 그놈이 배를 통째로 삼켜버렸다고. 괴물의 입에서 배는 부서졌고 물고기의 뱃속에 굴러떨어졌는데, 동료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뱃속을 난도질하자 괴물이 토하는 바람에 살아났다고. 하지만 토해질 때 위액이 온몸을 녹여서 그런 몰골이 되어버렸다고 하더군. 이후 간신히 울릉도를 발견해서 살아남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어. 『장자』에 보면 배를 삼키는 ‘탄주어(呑舟魚)’라는 물고기가 나오는데, 바로 그놈을 만난 것 같아.

그래서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 물었더니 얼마 안 된 일이라고 하더라고. 우리도 곧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니 걱정이 되었지. 울릉도에 무기를 만드는 사람은 없었어. 부역을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만 있었지. 그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태웠어. 배는 다시는 안 타겠다는 대머리도 억지로 배에 태우고 울릉도를 떠났어.

그런데 이번에는 또 희한한 괴물을 만났지 뭐야. 새벽녘에 속이 안 좋아서 뱃전으로 나왔다가 그걸 봤지. 바다 위에 말이 한 마리 우뚝 서 있는 거야. 웃지 마. 니가 못 봐서 그래. 갈기와 꼬리는 눈처럼 희고 몸은 바다색 같은 청색이었어. 말은 파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우리 배를 쳐다보는 듯이 가만히 서 있었어.

그때였지. 하늘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나더라고. 비렴이 나타난 거였어. 비렴은 미친듯이 날개짓하며 용마를 향해 곧바로 떨어져 내렸어. 용마도 눈치를 챘지. 용마는 파도 위를 평지처럼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하더군.

비렴은 수면에 내리꽂힐 듯이 내려왔다가 수면 가까이에서 날개를 크게 펼치면서 날갯짓을 했지. 그러자 파도가 엄청나게 밀려왔어. 그 파도는 지난번에 비할 바가 아니었어. 하늘까지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지.

이젠 죽었구나 싶었어. 아무 조짐도 없었기 때문에 뱃사람들도 다 잠이 들어있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이런 큰 파도가 배를 덮치면 이건 뭐 그냥 끝장이겠지.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어.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나타나서 짓쳐오던 파도를 먹어버린 거야. 꿀꺽!

그 물고기가 바로 대머리를 삼켰던 탄주어라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용마는 그 사이에 갑자기 날아올랐어. 어디에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눈처럼 흰 날개를 펼쳐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거야. 그러자 비렴도 용마를 쫓아 하늘 위로 올라갔어. 나는 이제 탄주어가 우리 배를 삼켜 버릴까 걱정하며 벌벌 떨고 있었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 탄주어는 다시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지. 그러더니 다시 물이 솟구치면서 바다 거인이 나타났어. 바다 거인은 얼굴만 물 위로 내밀더니 나한테 말을 걸었어.

‘주부 나리,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다 거인이 예의바르게 말해서 더 놀랐지 뭐야.

‘그대는 누구요?’

내가 묻자 거인이 대답했어.


〈탈해왕릉〉 (출처: 경주시청)


‘소인은 용성국을 지키는 거인입니다.’

‘용성국이라면 저 옛날 신라국의 왕이 된 탈해 임금이 태어난 나라 아니오?’

‘맞습니다. 용성국은 28명의 용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무슨 일로 조선국 동해에 온 것이오?’

‘용왕님께서 아끼는 용마가 도망쳐서 잡으러 온 것입니다. 용마는 재빨라서 비렴이 아니면 잡을 수가 없어제가 비렴과 함께 왔는데, 본의 아니게 비렴이 풍랑을 일으키게 되어 폐를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울릉도 올 때 거인이 비렴을 후려치려 한 건 아니었어. 비렴을 말린 걸 내가 그렇게 본 거였지.

‘사람이 상하거나 죽지 않았으니 괜찮소.’

‘너그러운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용왕신께 제를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저희가 폐를 끼쳤으니 뭔가 보답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바다의 궁벽한 곳에 사는 몸이라 딱히 가진 것은 없으나 이걸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해녀지(海女紙)〉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녀들이 용왕제를 지낼 때 용왕에게 바치는 제물로 한지에 쌀을 넣고 포장한 후 겉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적고 안전한 조업과 식구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바다 거인이 그러면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어. 조개 담아온 그 주머니냐고? 그래, 맞아 그 주머니야. 조개와 소라고둥도 그 안에 들어있던 거야.

나는 얼른 그 주머니를 소맷자락에 넣었지. 그리곤 긴장이 풀려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 선원들이 뱃전에 쓰러져 있는 날 발견했다고 하더라고. 내가 본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들 바다에선 그런 신기루를 보기도 한다면서 아무도 내 말을 믿질 않더라.

*

삼환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백이가 삼촌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삼촌, 난 삼촌 말 다 믿어. 이 주머니 내가 잘 간직할게. 이 귀한 걸 내게 줘서 고마워.”

삼환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래야 내 착한 조카지.”

왠지 울컥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조카가 다 알아들었으리라 믿어버리기로 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유구국도(琉球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11월 3일~11월 9일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년 5월 4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풍랑을 만나 정신이 아득해지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8월 17일

1632년 8월 17일, 홍호(洪鎬)는 명나라로 향하는 배안에 있었다. 새벽에 광록도를 출발하여 용당을 지날 때였다. 정사의 배와 여타 사행단의 배 두 척도 홍호의 배 뒤를 따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줄기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더니, 새까만 구름이 마치 물에 먹을 풀어놓은 듯하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참혹하고 맹렬해서 홍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뱃사람이 바쁘게 중앙의 돛대에서 돛을 내리고는 뱃머리의 거적을 걷으려는데, 바람이 바다를 말아 올려서 놀란 파도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성난 바람소리가 땅이 꺼지는 소리보다 장렬하게 울렸다. 배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신속히 대척하여 경우 풍랑을 피해 배를 지켜내고 다른 탈은 없었다.

배를 돌려 바람을 따라 30리쯤 가니, 비가 그치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바람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돛을 올리고 다시 길을 가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곧장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삼계도, 해성도란 섬 사이에서 바라보니, 사행단의 두 배는 이미 목적지인 평도에 정박하였고, 뒤따라오던 배들 중 하나도 인근 삼계도에 닻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호는 제수를 준비하여 앞서 거우도와 장산도에서처럼 바다의 용왕에게 제를 올렸다. 애초 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못난 이들의 무식한 처사라 여겼는데, 직접 바다의 풍랑을 겪어보고는 허겁지겁 재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밥이 될 뻔하였단 생각이 들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났다.

“출항하기 전 배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7월 16일

1632년 7월 16일, 홍호(洪鎬)가 탄 배가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출항을 시작하였다.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이에 대한 시호를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홍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신단은 모두 6개의 배에 나누어 탔는데, 홍호는 3호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제 거친 바다를 헤치고 명나라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를 출발하기 전 밤중에 항해 개시를 고하며 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제는 바다의 신과 용왕님에게 제를 올렸다. 제문은 사신단의 일행에 속한 이장배란 자가 지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강과 하천이 돌아가는 곳으로
제사 받는 순번에서도 으뜸에 있으시네
정성으로 현황(玄黃)을 받들어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니
충성과 신뢰에 의지하여
밝은 신에게 이로써 기원하노니
영험한 복을 밝히시어
파도를 거두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가는 길에 편안토록 하소서
시종일관 도와주시길
보잘것없는 제물과 술을 올리니
밝게 임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드넓은 바다는
용왕님의 댁일지니
오가는 배들은
모두 용왕님의 도움을 입은 것
나라님의 예물을 보호하여 가나니
음으로 양으로 도우시길 비옵니다
상어와 악어를 물리쳐 주옵시고
수코래 암코래를 쫓아 주옵소서
아득하고 드넓은 바닷길을 건너가노니
하루도 안돼 천리를 가게끔 하옵소서
감히 조촐한 상을 마련하였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홍호는 제를 지내는 동안 과연 바다신과 용왕님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는 뱃사람들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그가 수십년 동안 공부한 학문에서는 용왕님이나 대해신(大海神) 같은 존재는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다. 바닷길로 사행을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제에 불쑥 끼어들게 되니 다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호보다 상관인 정사나 부사 역시 아무말 없이 제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무사히 사행을 갔다 올 수 있다면 까짓 근본이 없는 믿음이나마 제 한번 지내는 것이 어디 어렵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 제를 지내고 출발해서인지 항해 첫날 날씨는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렀다. 홍호는 처음 만날 명나라의 문물과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하다”

남연군의 묘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渚上日月)』, 미상

1868년 4월, 박득녕은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서양인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였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군기와 양곡을 약취하여 갔다고 한다. 서로 전쟁하는 사이어도 적장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들은 과연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 듯하였다.

이후에 이들 오랑캐들이 운현궁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당신이 산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 무덤을 파려고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뒷날을 기약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서한을 본 대원군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영종도 순찰사가 남연군 도굴단에 참가했던 괴수 두 명을 붙잡아서 참살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큰 경사라 칭찬하였는데, 도굴단의 대표는 서양 오랑캐이거늘 하수인 한 둘을 참살했다 하여 경사라 칭하다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윤 5월이 되자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번에 일어난 덕산군의 참변은 비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 해적을 섬멸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등용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원군의 조치였다. 박득녕은 과연 이러한 전교가 저들 서양 오랑캐를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 서양인들이 점점 조선에서 방종하는 것은 참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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