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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길 위에 선 화목(和睦),


칠인정(七印亭)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외로운 어느 날 꺼내 본 사진 속 / 아빠를 닮아있네

SG워너비의 멤버, 김진호의 〈가족사진〉입니다. 그의 개인사가 닮긴 노랫말에 나의 이야기가 더해져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고 아빠는 처음부터 아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나 같은 시절이 있었다고 감히 상상도 못했지요. 그들 역시 이루고 싶은 꿈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지금의 내 나이를 살았던 부모님의 고단한 삶이 혹여 나 때문일까 봐 가슴 한편이 아려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족을 사랑하지만 나와 그들의 생각이 다를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특히 가족과 나의 정치적 견해가 다를 때 날 선 말들을 주고받으며 다투곤 합니다. 지지하는 정당과 대통령 후보가 달라, 가족과 언성을 높인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3월,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가족 단톡방은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설전이 오갔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만이 옳고 나머지 후보들은 대통령 자질이 없다는 식의 카톡이 난무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지 지금보다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정도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급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정치적 신념은 그 사람이 살아온 수많은 환경 등에 의해 종합적으로 형성되기에 쉽게 바꿀 수가 없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만약 나의 정치적 신념이 가족의 안위를 위태롭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1392년은 고려의 시대가 저물고 조선의 시대가 열리던 때입니다. 새 시대의 도래에 춤을 추며 반겼을 이가 있는가 하면 두문동으로 숨어들어가 고려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살아내며 정치적 고뇌에 힘들었을 장표(張彪, 1349~?)는 영남의 두문동이라 일컫는 흥해로 가서 은둔 생활을 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409년, 장표의 수연(壽宴) 날에 그의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모두 출사하여 정자 앞 회화나무에 인수(印綬)를 걸었습니다. 분명 고려에 충절을 지키려 은둔생활을 한 장표인데, 그의 자식은 조선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며 동시에 집안의 화목(和睦)을 이끈, 정치적 격동기를 슬기롭게 살아낸 장표와 칠인정(七印亭) 편액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망국지한(亡國之恨)에 흘린 눈물



장표(張彪)는 고려 말의 무신으로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된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입니다. 장표는 고려조에 출사하여 흥의위(興義衛)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역임했습니다. 흥의위(興義衛)는 고려 6위(衛)의 하나로 보승(保勝) 7領(령)과 정용(精勇) 5령(領)으로 조직 되었으며 낭장(郎將)은 정6품입니다.

조선의 태조가 왕이 되자 전 왕조에 대한 충절을 저버릴 수 없었던 선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고려에 그들이 얼마나 허망해 했을지 감히 짐작도 하기 힘듭니다. 그 시대의 왕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온 세상이 뒤집히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두문동 혹은 벽란진으로 흩어져 산 속에서 나물을 캐 먹고, 농사짓고 소 키우며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들처럼 장표 또한 지금의 경북 포항의 흥해로 가서 초막을 짓고 농사지으며 숨어 살았습니다. 그는 고려의 국기일(國忌日)이 되면 산에 올라가 통곡을 하고 개성 쪽을 바라보며 네 번 절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곡강[曲江,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에서 낚시를 하다가 몰라보게 바뀐 세상에 눈물을 흘리며 죽는 날까지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의 세계는 가고 너의 세계가 오다.



장표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동시에 자식들의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고려에 대한 충심(忠心)을 다한 그였지만 차마 자식들의 출사(出仕)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네 사람(을제, 을하, 을해, 을포)은 모두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조의 신하로서 받은 녹봉으로 고려조의 유신이었던 아버지를 봉양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고려와 조선 사이에서 장표는 심한 내적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장표의 생신날, 그의 아들 넷과 사위 셋이 인끈을 차고 모두 모여 그의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렸을 때입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내가 태어난 때는 고려시대였는데, 지금 나라는 멸망하고 임금은 돌아가셨다. 왕촉[王蠋, 전국 제나라 사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며 죽음을 택함.]의 죽음을 본받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오늘의 비통한 마음은 어버이가 돌아가시던 날보다 곱절은 더한데, 무엇하러 축수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옷깃을 적시니,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 모두 감개하고 슬퍼했습니다.

장표는 임종을 앞두고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었습니다. 그는 자손들에게,

“우리 가문은 10세를 고려에 벼슬하며 국은을 두텁게 입었다. 불행하게도 지금에 와서 서리[黍離, 주나라의 대부(大夫)가 이미 망한 주나라의 옛 서울에 갔다가 종묘와 궁전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슬퍼 부른 노래]의 감회를 느끼게 되었으니, 나는 옛 복장으로 지하에서 선왕을 알현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미 새 왕조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니 임금을 섬기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선조께서 고려를 섬기던 마음으로 마음을 먹어,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칠인정(七印亭)을 지키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후세 사람들은 그가 살던 곳을 초막동(草幕洞)이라 하고, 그 마을을 사일촌(士逸村)이라 불렀습니다. 지금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를 ‘사일촌’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골짜기가 안전한 은거지로써 장표가 이 마을 동북쪽 초막골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칠인정을 찾아 가는 길, 솔향기 가득한 ‘사일마을 숲’이 먼저 반겨줍니다. 어쩌면 이곳은 차마 조선의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암담한 심정으로 고향을 떠난 장표를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고 위로해준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도로개설 등으로 몇 그루의 소나무만이 남아있습니다.


〈사일마을 숲〉


사일마을 숲에서 칠인정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은 나뭇가지들이 보입니다. 여기에 칠인정이 있으니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정자 앞에 다다르면, 작은 연못이 있는데, 7~8월이 되면 백련과 수련을 볼 수 있답니다. 그리고 연못 둘레에 300년이 훌쩍 넘은 배롱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역시 8월 한여름이 되면 진분홍색의 꽃들을 볼 수 있답니다.


〈연못〉


〈배롱나무〉


칠인정 담장 밖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선비의 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는 주나라 때 ‘사(士)’의 무덤에 심은 까닭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렀습니다. 중국의 과거 시험 중 진사 시험을 ‘괴추(槐秋)’라 부른 것도 시험 시기가 음력 7월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시기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삼괴(三槐)는 조정(朝廷)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이 이것을 향하여 앉았다는 데서 온 말로 삼공(三公)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리학의 상징수인 회화나무는 출세의 시작인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칠인정을 처음 지었을 당시 장표의 자식들이 인수를 걸었던 나무가 지금의 느티나무가 아니라 회화나무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회화나무〉


〈회화나무〉


칠인정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동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오래된 느티나무의 위엄찬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칠인정 초건 당시 심었던 회화나무는 337년의 수명을 다하고 1745년(영조 21) 태풍에 쓰러져 고사했습니다. 그 후 다시 심은 나무가 수령 490년 정도 된 지금의 느티나무입니다. 두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나라에 큰 우환이 닥칠 때면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칠인정을 쌍괴정(雙槐亭)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장표의 충절을 느티나무도 아는 걸까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느티나무의 호성(呼聲)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들리지 않는다고 하니, 신령한 나무도 개발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음에 숙연해집니다.


〈느티나무〉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 안내문〉



일곱 개의 인수(印綬), 칠인정



칠인정 주위의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마치 칠인정의 호위 무사인 듯 보입니다. 구릉 위에 지어진 칠인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2층 누정 형태로 건축된 칠인정이 있습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에 마루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앞과 양쪽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각 난간을 둘렀습니다.


〈칠인정〉


〈칠인정〉


〈칠인정〉


칠인정의 정면 가운데에 ‘칠인정(七印亭)’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칠인정의 칠인(七印)은 일곱 개의 인수(印綬)를 뜻합니다. 관직에 나아가면 국왕으로부터 인수를 하사 받습니다. 그래서 ‘인수를 허리에 찬다’라는 말은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칠인이 정자의 이름이 된 데는 앞서 이야기한 장표의 수연 때, 네 아들과 세 사위가 모두 출사하여 정자 앞 쌍괴수에 인수를 걸게 된 것을 기념하여 불렀다는데서 연유합니다. 칠인정 편액의 글씨는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습니다.


〈칠인정 편액〉


쌍괴수 그늘에 서서 정자를 바라보면 좌측방은 ‘효우재(孝友齋)’편액, 우측방은 ‘경수당(慶壽堂)’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이 편액은 칠인정 건립 당시 붙인 이름이 아니라, 1797년(정조 21) 칠인정을 중수했을 때 명명한 것입니다.

‘효우(孝友)’는 『시경』 「소아·유월」에 “누가 이 자리에 있는가. 효도와 우애로 이름난 장중이 있네.”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또한 ‘경수(慶壽)’는 『주역』 「곤계·문언」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고 한데서 ‘경(慶)’자를, 『서경』 「홍범」의 “오복의 첫째는 장수함이다.”라고 한데서 ‘수(壽)’자를 취했습니다. 두 편액 모두 후손들에게 부모와 조상에 효도하고 형제애를 돈독히 하라는 당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자 마루에는 ‘칠인정기(七印亭記)’, ‘칠인정중수기(七印亭重修記)’ 등이 걸려 있습니다.


〈효우재 편액〉


〈경수당 편액〉


〈칠인정기〉


〈칠인정중수기〉


그날의 가족사진



고려 말의 무관이었던 장표는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에 대한 충심을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흥해 초곡리로 낙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자식들에게 전하되 현실적인 대안도 함께 마련하여 세대 간 갈등 없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장표의 외손, 이조판서 충장공 이보흠[李甫欽, ?~1457,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과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됨]은 금성대군을 위해 순절했습니다. 또한 장표의 손자, 장윤문(張允文)은 윗사람을 따라 해구를 토벌하고 제주 대정현의 수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표의 유훈이 가학으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칠인정 정자에 올라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바라보니, 600년 전의 그날이 보이는 듯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의 출세는 분명 기쁜 일입니다. 게다가 생일날 7남매의 자식들이 모두 모여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일이지요. 만약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회화나무 아래 장표와 그의 온 가족을 불러 모아 가족사진을 찍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만은 고려에 대한 애끊는 마음 잠시 내려두고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시라 전하고 싶습니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20.
2.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사이트 더보기
3. 장심학 저, 박미경 역, 『강해문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
4. 노재현·한상엽·김정문·정푸름, 「포항 칠인정원림의 조영특성과 괴목 식재의 문화변용」,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5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7
5. 강판권, 『회화나무와 선비문화』, 문학동네, 2016
6. 강판권, 「중국과 한국의 수목인식과 문화변용-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118호, 대구사학회, 2015.
김광수 저, 이정섭 역, 『국역(國譯) 송은선생문집』, 안동김씨 도평의공파문중(都評 議公派門中), 2017.
“방석과 병풍을 빌려주시오 - 혼례 용품을 돌아가며 사용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1 ~ 1617-02-27

1612년 1월 11일, 김택룡이 듣자니 좌수(座首) 권담(權湛)이 자신의 아들 김숙에게 편지를 보내 방석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결혼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아들에게 이르길, “권덕성(權德成)의 집에서 직접 가져다 쓰라고 권담에게 전하거라. 권덕성이 예전에 가지고 갔었는데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구나.”라고 하였다.

2월 13일, 박성백(朴成栢)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택룡은 아들 김숙을 시켜 음식접대를 하도록 했다. 택룡이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아들에게 전해 들으니, 박성백의 아재인 박흡(朴洽)의 아들이 권응명(權應明)의 사위가 되기 때문에 혼구용품을 빌리러 왔다고 하였다.

1617년 2월 17일, 심인 아재와 남민경(南敏卿)이 김택룡의 집을 방문하였다. 남민경이 24일 사위를 맞이한다고 병풍과 방석을 구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었다. 2월 20일, 남민경이 택룡의 집에 와서 병풍과 방석을 빌려서 갔다.

2월 27일, 이전승이 그믐날에 사위를 맞이하므로 택룡에게 사람을 보내 병풍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택룡이 이전승에게 답장을 보냈다.

“현구고례 - 딸의 혼례식 다음날, 새 사위에게 인사를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3-28 ~ 1616-03-29

1616년 3월 28일, 김택룡의 둘째 딸이 혼례식을 올린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새 사위 권근오가 현구고례(現舅姑禮)를 행했다. 첨지의 정실(正室)과 소실(小室), 구고(九臯)의 대평 어미, 박진사(朴進士)의 소실(小室)도 함께 뵈었다. 술 한 잔을 나누고 끝냈다.

다음 날 29일, 비가 세차게 내려 사위 권근오가 돌아가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에 권근오가 침실로 들어가 택룡의 소실 신위(神位)에 절했다. 잠시 뒤 생원 권준신이 택룡의 집으로 하인을 보내 아들 권근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그가 내일 아침 일찍 아들을 보고 나서 대룡산(大龍山)에서 있을 황언주(黃彦柱)의 생신 잔치에 갈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사위가 내일 아침 갈 것이라고 하인에게 전하도록 했다.

“김지의 딸은 초례를 치르고, 김기의 아들은 장가를 가고”

김광계, 매원일기,
1608-01-24 ~ 1608-01-25

1608년 1월 24일, 이 날은 잔치가 겹친 날이다. 김지(金址) 재종숙의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고, 몇 년 전 돌아가신 김기(金圻) 재종숙의 아들인 광업(光業) 형이 장가를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덕유형은 봉화의 류씨 댁으로 장가를 가는데, 김광계는 김령 재종숙 등 집안 어른들과 함께 송석대까지 가서 전송해주었다. 송석대에서 돌아와서 밥을 먹은 뒤에 이번엔 곧바로 김지 재종숙 댁으로 갔다. 김령 재종숙은 오시쯤에 홀기(笏記)를 썼고, 이율은 찬자(贊者)를 맡았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 덧 저녁이 되어 신랑과 요객이 도착했다.

신랑은 월천 조목 선생과 학봉 김성일선생의 문인인 권익창(權益昌)의 아들 권규(權圭)이다. 요객(繞客)으로는 이의흥(李義興), 류덕기(柳德驥), 권인보(權仁甫)가 왔다. 김지 재종숙네 숙모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다음 날에도 동네 친족들을 불러 연일 잔치를 열었다. 김광계도 이틀 내내 가서 친족들과 흥겹게 먹고 마셨다

며칠 후에는 덕유 형이 봉화 처가에서 돌아오면서 술과 안주를 잔뜩 싣고 왔다. 동네 친족들이 또 모여 함께 먹었다.

“초간정(草澗亭) 연못에 하늘로 간 아내를 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02-24 ~ 1582-08-24

1582년 7월 15일,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지내는 날이었다. 그러나 권문해는 지난 6월 21일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상(喪)중이었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내가 떠나고 조문객을 받고 장례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권문해는 가족들이 가묘에서 차례를 지내는 동안 홀로 초간정을 찾았다.

초간정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연못을 보는데, 물고기 중 큰 놈들은 수통(水桶)을 통하여 다 나가고 작은 물고기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어찌하여 작은 물구멍을 따라 큰 물고기들은 연못을 떠나고 작은 물고기들은 남게 된 것일까?

초간정을 지을 때도 연못 만드는데 많은 공을 많이 들였던 권문해였다. 지난 2월(1582년 2월 24일)에 초간정을 한참 지을 무렵 초간정의 동쪽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을 보고, 연못을 만들게 하고 사람 어깨 높이만큼 물을 채웠다.

그런데 연못이 잘 못 쌓아져 물이 새는 곳이 보이자 2월 25일 다시 사람들을 모아 돌을 넓고 튼튼하게 쌓고 물이 새지 않도록 수통(水桶)을 두었을 만큼 연못을 정성껏 만들었었다. 그런데 권문해의 곁을 떠난 아내처럼 물고기들이 수통을 통해 연못을 떠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권문해는 텅 빈 연못을 못 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외관(外棺)을 만들어야 하고 상여도 준비해야 하는 등 할 일들이 많았기에 연못을 바로 고치지 못하였다. 텅 빈 연못을 보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권문해는 연못을 더 넓고 깊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8월 22일 연못을 새로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연못을 보고 무언가 모자란 듯 사람 50여 명을 얻어 밥을 먹이고 더 깊이 못을 파게 하였다. 그 깊이가 1장(丈)이나 되어 넓고 커다란 연못이 만들어져 큰 물고기도 답답하지 않게 노닐 수 있게 되었다. 해가 짧아져 연못을 다 만들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초간정에 나아가 연못 만들기를 하였고 드디어 작은 배를 띄울 만큼 큰 연못이 탄생했다.

“죽은 아내의 생일에 술을 올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4-12-01 ~ 1644-12-16

1644년 8월 18일, 김광계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김광계는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발인과 하관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삼우제(三虞祭)를 지내야 했다. 12월 1일은 재우제(再虞祭)였고, 다음날 삼우제, 그리고 12월 4일에 더 이상 곡을 하지 않겠다고 망자에게 알리는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삼우제가 끝나면 그간 장례를 함께 해 주었던 모든 친지, 지인들이 떠나가기 마련이었다. 김광계는 혼자 남았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6일, 아내의 생일이 되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위해 술, 과일, 떡, 국수 등 아내가 좋아할만한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아내의 궤연에 올렸다. 모든 장례가 끝난 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다시금 아내의 부재를 떠올리니 더욱 비통하고 애달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졸곡제에서 아내에게 더 이상 곡하지 않겠다고 알렸으니 이제는 망자와 자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더 이상 곡을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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