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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나의 허물을 살피고 고치며,
성건재(省愆齋)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아, 진짜…짜증나. 결국 제 책임이잖아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경비아저씨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내 구겨진 기분이 마스크를 뚫고 나와 폭발할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설날 하루 전 오후, 아파트 주차장이 차로 꽉 차있었다. 러시아워 보드게임이라도 하듯 가로로 이중주차된 SUV 차가 내 차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이중주차된 여러 차를 밀어야 겨우 내 차가 빠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 큰 차를 밀기에 역부족이었고 혹시나 차를 밀다가 다른 이중주차된 차까지 밀어버릴까봐 겁이 났다. 일단 내 차를 가로막고 있는 차에 가서 연락처를 찾았다. 전화번호가 없다. 여기서 1차로 화가 났다. 이중주차를 할 거면 연락처를 남겨야지, 너무 경우 없는 행동이 아닌가.

재활용 분리수거함에서 일하고 계시는 경비아저씨께 도움을 청했다. 나는 아저씨를 도와 이중주차된 차를 밀었다. 차를 밀었는데도 내 차가 나오기엔 공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때 경비아저씨께서 차를 뺄 수 있게 수신호를 해줄테니 운전을 하라고 하셨다. 얼핏보니 빠져 나올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도 나는 반신반의하며 머뭇거리다가 경비아저씨를 믿고 운전대를 잡았다. 정말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경비아저씨의 수신호에 따라 조금 차를 빼다가 아무래도 이중주차된 차를 박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핸들을 반대로 틀고 원위치를 했다. 그때, ‘끼이~익’ 차 긁는 소리가 났다. 아, 결국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화가 났다. 내가 왜 경비아저씨 말을 들었을까, 왜 이중주차 차주는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나의 욱하는 성질이 나와버렸다. 사실은 이중주차하고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무개념 차주에게, 그리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내 선택에 화가 난 것이었다. 설 명절에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경비아저씨께 내 분노를 잠시 쏟아놓고 나니 정신이 번쩍들었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거잖아?




과이불개(過而不改)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라는 말이 있다.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공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삶의 매 순간 자성(自省)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을 고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내 잘못을 알아차렸으나 그것을 고치지는 못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過而不改] 나는 언제나 욱하고 돌아서서 후회하길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순식간에 수직 상승하는 ‘욱지수’를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봉화군 법전면 진주강씨 도은종택에 가면 성건재(省愆齋) 편액이 있다. 성건재는 도은(陶隱) 강각(姜恪, 1620~1657)의 맏아들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 1647~1729)의 호이기도 하다. 성건재란 ‘자신의 허물을 살핀다’는 뜻으로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허물을 고친 뒤에는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강찬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증자가 날마다 세 가지로 몸을 살피며[吾日三省吾身] 자기 성찰을 한 것과 같이 강찬 역시 자기 반성 후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다짐했을 것이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과 성건재 강찬의 삶을 들여다보며 ‘성건(省愆)’의 의미를 되새기려 한다.


봉화군 법전면 도은종택 성건재(省愆齋)




영남 남인 지역에서 노론·소론으로 살아남기


퇴근 길 라디오에서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정과 구정 그리고 3월 2일, 이렇게 세 번의 설을 쇤다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3월 2일이 되니 이제야 2023년 계묘년이 시작된 것 같다. 나뭇가지마다 새싹이 움트듯, 우리의 일상에서도 새로운 뭔가가 움트는 3월이다. 입학과 취업,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업무 개편 등 무언가 시작하는 사람들로 들뜨게 되는 3월, 그래서 다들 2월에 이사를 하나보다.

이사는 익숙한 곳에서 멀어지기에 두렵고, 낯설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기에 설렌다. 입학이나 취업 등의 이유로 공간을 옮기는 것은 아마도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남고 싶은 마음 안에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경기도 파주에서 경북 봉화(당시 안동부)로 삶의 터전을 옮겨 이곳에 뿌리를 내린 집안이 있는데 바로 진주강씨 법전문중이다.

1636년(인조 14) 겨울, 병자호란 소식을 들은 잠은(潛隱) 강흡(姜恰, 1602~1671)과 강각 형제는 부친 의금부 도사 강윤조(姜胤祖, 1568~1643)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파주의 교하(交河, 지금의 김포) 야동(冶洞)을 떠난 가족은 양주, 포천, 양근, 지평과 원주, 제천을 지나 죽령을 넘어 1637년(인조 15) 1월에 안동부 춘향현 법전리(현 봉화군)에 도착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은 법전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이 진주강씨 법전문중의 시작이다.

파주는 강흡과 강각의 선대(先代) 때부터 이들의 본거지였다. 이들은 대를 거듭해 관직에 나갔으며 서울 경기 지역의 명문가와 혼맥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인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영남 지역은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남인’이라는 정치적 연대감이 강력하게 작동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고향에서의 정치적 정체성과 가풍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타향에서 정치색이 다른 지역민과 융화를 이루며 이주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처음 피난을 왔을 당시에 강흡과 강각 형제는 태백산 아래의 법전 성잠(星岑)에서 살았다. 이후 형 강흡의 후손들은 음지마을에서 노론을, 동생 강각의 후손들은 양지마을에서 소론을 표방하며 가학을 이었다. 이들이 본거지를 떠나 법전을 터전으로 삼은 배경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길 수 없다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올곧은 선비정신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봉화로 이주한 이후에도 자신들과 뜻을 함께한 한양 출신 명문 자손들과 계속 밀접한 교류를 이어갔다.


봉화군 법전면 법전천(왼쪽: 양지마을 / 오른쪽: 음지마을)



강흡은 청양군 심의겸(沈義謙)의 손자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1594~1660),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손자 포옹(抱翁) 정양(鄭瀁1600~1668), 영의정 홍섬(洪暹)의 증손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1604~1680),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의 손자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1595~1654)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불렸다. 강흡이 법전에서 터를 잡았듯, 심장세는 봉성 단파, 정양은 춘양 도심촌, 홍석은 춘양 소도리, 홍우정은 봉성 두곡에 정착했다.

강흡은 이들과 어울려 산수를 거닐고 시를 지으며 병자호란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했다. 병자호란의 패배는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에게 무력감, 패배감, 허무함, 공허함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것은 없다. 아마도 전란 후 봉화에서 만난 태백오현(太白五賢)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하고 위로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한편 이 가문은 성공적인 법전 정착을 위해 영남 남인과의 혼맥(婚脈)에 힘썼다. 강흡은 부친의 뜻을 대신해 여동생의 혼사를 주도했다. 그는 여동생과 김령의 셋째 아들이 혼인하길 바라며 김령의 집을 방문했다.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은 『계암일록(溪巖日錄)』에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침에 강흡 군이 금람과 함께 왔다. 그의 아버지는 찰방을 역임했는데 이름은 윤조이다. (중략) 그는 혼사 때문에 왔는데, 거절할 수 없어서 어렴풋이 허락하는 뜻을 보여주었다. (중략) 대체로 혼사는 막중하여 모두 하늘이 하기에 달린 것이고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관찰할 뿐이다.

『계암일록』 1638년(인조16) 3월 5일.


광산김씨와의 혼맥이 성사되고 난 후 강흡은 예안을 자주 방문해 김령과 친밀하게 지냈다. 이후 진주강씨 법전문중은 ‘안동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 전주류씨, 한양조씨’ 등의 가문과 혼인을 하며 영남 남인들 속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정착하여 자기들의 색을 지키며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에 빠져 패배자처럼 허우적 될 수만은 없다. 이들 진주강씨 법전문중은 낯선 곳에서의 살아남기에 성공하여,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박사, 교수, 문인 등의 인재를 배출한다. 작은 산골 마을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대대로 이어온 가학(家學) 덕분일 것이다. 양지마을, 강각 가문의 기틀을 정립한 강찬의 삶을 들여다보자.


봉화군 법전면 도은종택 전경(왼쪽: 도은구택 / 오른쪽: 성건재)




불천위로 모시는 강찬


1647년(인조 25) 춘향현에서 성건재 강찬이 태어났다. 진주강씨 법전문중이 법전으로 이사온지 딱 10년 된 해였다. 그의 아버지는 도은 강각, 큰아버지는 잠은 강흡이다. 강흡의 어머니는 한양조씨, 강각의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각각 어머니가 달랐으나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강각은 강찬의 나이 11살에, 강각의 부인 남양홍씨는 그의 나이 13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강흡은 일찍 요절한 동생 내외를 대신해 강각의 두 아들인 강찬과 강우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강찬 역시 동생들과 즐겁고 화목하게 지냈다. 4살 터울 동생 잠계(潛溪) 강우(姜鄅, 1651~1720)가 글을 외울 때 혹 외우지 못하면 동생의 종아리를 쳐서 가르치고 동생이 울면 함께 울었다. 손아래 누이가 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구하기 힘든 약을 백방으로 찾아내서 정성껏 치료하였고,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생질녀들을 데려다 집에서 키웠다. 강우의 자녀인 조카 재숙·재휘·재항·재룡 또한 자기 자식과 같이 돌봤다.

강찬은 어려서는 백부 강흡의 보살핌 아래 포옹 정양에게 『소학』을, 백부와 각별한 사이였던 청풍 부사 임유후에게 고문(古文)을 잠시 배웠다. 나이가 들어서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강찬은 그 감회를 시로 남겼다.

시례(詩禮)가 있는 가정이라 대대로 인물이 나서
경학에 연원을 두고 맑은 진리 귀하게 여겼네.
이제야 스승을 모실 소원을 이루었으니
온화한 기운 피어나 자리 가득한 봄이라네.

이후의 학문 교류는 주로 편지였다. 강찬은 주로 의례와 관련한 질의를 많이 했다. 강찬의 조카인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이 쓴 그의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명재 윤증 선생을 노성에서 뵙고 예학을 배우고 돌아와서 다시 서신으로 모르는 예법을 물어 배우는 것이 많았다. 명재선생은 공을 칭찬하기를, “나이가 많은데도 강문(講問)을 쉬지 않고 때때로 찾아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나의 제자 중에 훌륭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강찬은 「서시아배(書示兒輩)」에서 “독서할 때 먼저 해석을 볼 것이 아니라 본문을 반복하여 읽고, 자신의 생각으로 뜻을 깨우친 뒤에 해석을 참고하면, 경서의 본뜻을 밝게 알게 되어 다른 해석에 유혹되지 않을 것이지만, 먼저 해석을 읽으면 그 해설에 이끌려서 자신의 새로운 뜻은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후학들의 학업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강찬으로부터 시작된 윤증과의 사승관계는 조카 강재항으로, 다시 강재항의 아들 강택일(姜宅一, 1726~1808)로 이어졌다. 그는 과거 시험에 관심을 두기보다 도학을 깊이 연구하고자 1675년(숙종 1), 그의 나이 29세에 서재(書齋) ‘성건재’를 지었다. ‘자신의 허물을 살핀다’는 뜻의 성건재 해서(楷書)편액은 1683년(숙종 9)에 스승인 명재 윤증에게 청하여 처마에 걸어둔 것이다. 또한 전서(篆書) 편액은 1705년(숙종 31) 윤덕준(尹德駿, 1658~1717)이 안동부사 재임시에 강찬을 방문하여 써 준 것이다.


성건재 해서(楷書) 편액(출처: 한국의 편액)


성건재 전서(篆書) 편액(출처: 한국의 편액)


봉화군 법전면 도은종택 성건재 편액



성건재는 단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이곳은 가학의 근원이자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1791년(정조 15), ‘성건재계(省愆齋稧)’를 결성, 문중의 단결을 꾀했다. 그리고 1860년(철종 11) 후손 강명규는 성건재를 중수한 후 기문에 “선군자 강찬의 굳세고 굳센 의지가 비록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더라도, 가업을 열고 가풍을 이은 업적과 도를 지키고 덕을 떨친 공효는 전열(前烈)을 더욱 빛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강찬은 이 가문을 향촌 사회 일원으로 완전히 편입시킨 인물로 인정받아, 매년 음력 정월 중정에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고 있다.


「성건재계안(省愆齋稧案)」
(출처: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41)


봉화군 법전면 도은종택 성건재 불천지위 표지석



후손들은 성건재 서재에 소장된 많은 책을 읽으며 학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진주강씨 법전문중지』에 “급제하면 마을에 솟대를 거는 풍속이 있는데, 이곳에는 급제자가 많아 법전문중의 솟대 때문에 농사가 안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며 이곳은 보고 듣고 노는 것이 모두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학문과 더불어,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한 것은 바로 ‘허물을 살피는[省愆] 수양과 성찰’의 자세다. 남인계가 절대 다수인 지역에서 소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성건(省愆)’하고, ‘오일삼성(吾日三省)’한 삶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더 글로리〉의 박연진처럼?


안드로메다로 간 정신줄을 잡고 차를 확인했다. 내 차의 오른쪽 앞 범퍼와 이중주차된 차의 오른쪽 뒷 범퍼가 긁혀있었다. 차주를 찾는 안내방송에도 차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접촉사고에 대한 메모를 남기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차주와 대면을 했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받고 보험회사에 사건 접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불뚝불뚝 화를 낸 별난 성질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아직 나는 나의 엉뚱한 화풀이 대상이었던 경비 아저씨께 사과를 하지 못했다. 봄이 가기 전에 찾아뵙고 그땐 죄송했다고, 늘 아파트를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박연진! 뒤 돌아보지마. 해결할 방법은 뒤에 없어! 늘 앞에 있어. 인생은 그런거야.”

학교 폭력 가해자인 박연진의 엄마가 딸에게 한 조언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악행에 대해 반성 따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박연진만큼 큰 죄는 아니어도 우리는 잘못된 언행(言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산다. 그리고 우리는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혹여 그렇더라도 우리는 박연진과 그의 엄마처럼 살지는 말자. 나의 과오(過誤)에 대한 성찰과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살았으면 한다.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옳은 방향으로 삶을 운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그렇게 살다보면 내 삶의 마지막 모습이 조금은 더 영광스럽지 않을까? ‘성건재’ 편액 의미처럼 우리가 날마다 허물[愆]을 고치고 고쳐 그 허물을 벗어던진다면[脫皮] 우리도 봄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지 모른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
3.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태봉, 2019.
4. 심경호,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 강의 논어 1』, 민음사, 2013..
5. 최은주, 「潛隱 姜恰의 저술로 본 그의 삶과 교류 인맥의 특징」, 『嶺南學』 71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9.
6. 채광수, 「영남 소론계 가문의 존재와 계승 양상 -봉화 진주강씨 姜恪 가문을 중심으로-」, 『대구사학』 139호, 대구사학회, 2020.
7. 권경록, 「‘太白五賢’의 삶을 통해 본 奉化地域의 文學地理」, 『한국학연구』, 38호,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조선시대 점과 점쟁이”

예로부터 무당을 궐 안에 두고 나라의 길흉을 예언케 하였으나 점쟁이는 예언자로 전문적 직업인으로 민간에 생겼다. 점을 치는 종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사의 존망을 점치는 사주점과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운수점,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수점, 단시점(斷時占), 멸액점(滅厄占), 절초점(折草占)따위가 있다. 또한 점을 치는 것으로는 태주가 하는 신점(神占)과 주로 여자 점쟁이가 쌀을 뿌려 점치는 쌀점, 동전을 던져서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산통점(算筒占), 역점(易占), 오행점(五行占), 육효점(六爻占), 팔괘(八卦占), 구궁점(九宮)따위가 있다.

옛날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물음)이요!” 하면서 점을 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 쓴 깃발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이름 짓기와 관상, 이름, 감정 따위를 보았으며 때때로 액운을 막기 위한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中期) 때 민간에 보급된 대표적인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 저술)은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풀이해서 그 해의 운수를 달마다 보는 정초의 풍습이 되었다.

“용한 맹인 점쟁이 심군”

맹인점술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최흥원, 역중일기, 1763-01-06 ~

1763년 1월 6일. 신미년 새해가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어제는 인근에 사는 김용여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새해가 되었으니 신년 운수를 보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편지에는 맹인 점장이 심옥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평소 그가 아주 영험하고 뛰어나단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다고 한다. 엊그제 김용여가 사는 마을에 왔길래 자신도 점을 한 번 쳐보았는데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려다가 점을 한 번 쳐볼 만하니 최흥원에게도 한 번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최흥원은 이 편지를 보고는 둘째 아우를 보내어 그 심옥이란 점쟁이를 데려오게 했다.

오늘 그가 점을 쳐보니, 점괘가 아주 불길하게 나왔다. 심옥은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대뜸 아내 묘소의 이장을 권하는 것이었다. 최흥원은 예전에도 아내 묘의 풍수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심옥의 이야기를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었다. 또 그에게 아픈 아이의 사주를 적어주고 앞으로의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그는 매우 길한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흥원은 내친김에 심옥에게 집안사람들의 운명을 두루두루 물어보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운수를 점치기는 하나, 정확하게 들어맞은 적은 없었다. 막상 심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역시 특별히 용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자뿐 아니라 모두가 아내의 이장을 권하니, 그것은 한 번 고려해 볼 만한 것 같았다.

“과거를 꿰뚫어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1584년 3월, 권문해는 추운 겨울을 지나 어서 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3월 9일, 바라본 소백산에는 겨울처럼 눈이 내려온 산이 다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연일 서리가 내려 초목의 싹이 대부분 시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마음까지도 메마르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군 성주 류세무와 경상북도 선산부백(善山府伯) 류덕수(柳德粹)가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곡사(大谷寺)에 만나기를 청하였다.

3월 14일, 권문해는 집을 나서 대곡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류세무와 류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 이야기 중 경상북도 선산군의 부백 류덕수에게 자신의 고을에 맹인 점쟁이 김여추(金汝秋)에 대해서 듣게 된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그 누굴 만나도 그가 살아온 과거를 귀신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권문해와 류세무는 명경수(明鏡數) 김여추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여추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류세무는 율시 한 수를 쓰는데,
화와 복은 다 이미 정해진 것 禍福皆前定
꽃 피고 시드는 것은 각기 때가 있다네 榮枯各有時
정원의 꽃은 일찍 떨어져 버리지만 花落園中早
산골짝 옆 소나무는 오래도록 산다네 松生澗畔遲
현묘한 이치 원래 수가 있는 것이니 玄機元有數
조물주가 어찌 사사로움을 용납하리오 造物豈容私
모름지기 반계(磻溪) 늙은이를 알아야 할거니 須識磻溪叟
끝내 임금의 스승이 되었네 終爲帝者師

대곡사에 모인 권문해와 류세무, 류덕수는 앞 못 보는 맹인 점쟁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자신의 수명을 점쳤던 점괘가 생각나다”

점괘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미상

1593년 3월, 해가 바뀌자마자 100여 일을 앓았던 오희문은 최근에야 밥을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희문이 병으로 죽었단 소문도 돌았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는 위문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병이 너무나 심하여 오희문 스스로도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다시 살 수 있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희문은 양지현 농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그를 불러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때 김자순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이 54세, 그러니까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70살 넘게 살 수 있다” 그때 오희문은 재미 삼아 친 점이라 특별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임진년에 난리가 터져 거의 죽을 뻔하게 되었다. 비록 몸의 병은 해를 넘겨 생겼지만, 김자순이란 자가 이야기한 점괘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오희문은 새삼 점쟁이 맹인의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풍증(風症)걸린 덕원, 괴상한 말을 늘어놓다”

김령, 계암일록,
1623-05-05 ~ 1624-01-20

1623년 5월 5일, 이직(以直)이 안타까운 소식을 가지고 김령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덕원(李德遠)이 지난 밤 풍증(風症, 미친 증세)이 발병하여 정처없이 계상(溪上)·분천(汾川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부포(浮浦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등지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김령은 그가 가련하고 애석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김령은 이직이 돌아간 뒤 탁청정에 갔다가 제군들을 만나 냇가 길에서 모였는데, 이때 덕원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여희와 이실이 온계(溫溪)로 급히 갔다. 흥이 싹 가셔서 기쁘지 않았다. 탄식스럽고도 탄식스러웠다.

6월 2일, 비 내리는 아침, 김령은 덕원을 만나러 탁청정으로 나아갔다. 그의 언행을 보니 병은 차도가 없었다. 덕원은 괴상한 말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가련하고도 탄식스러웠다. 종종 정상인 것도 같으면서, 말하는 것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통 사람과 크게 달랐다.

덕원의 병은 나아지는가 싶더니, 1624년 1월, 다시 발병하였다. 또 이렇게 고된 병에 걸리다니 안타깝고 애석함이 모두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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