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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한국 영웅 사전
고전 속 한국형 어벤져스의 잠재력과 세계관에 관한 시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토록 광기 넘치고 불편하게 토해낸 악당이 또 있던가. 세계는 지금 ‘조커앓이’ 중이다. 영화 <조커JOKER>는 정신질환을 앓는 한 남자가 사회적 소외와 무시를 체감하고 희대의 악당이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악의 탄생기여서일까. 아무리 포스터 카피 문구가 ‘상상 그 이상의 전율’이라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불편함을 지향한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지 못해 조롱당하던 주인공이 끝내 살인을 저지르고 악당으로 변하는 모습도 보기 불편한데, 폭력과 방화를 저지르는 군중의 모습이나 그 폭동으로 아수라장이 된 거리는 마치 지금 이 순간에 세계 어디선가 벌어지는 상황을 비추는 듯하다.


영화 ‘조커 Joker’ 2019 포스터


종종 이 영화가 기존의 영웅 사관을 불식시키는, ‘섬뜩’하면서도 ‘위험’한 작품으로 평론되는 까닭은 아마도 현실이 반영된 듯 여겨지는 일종의 기시현상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연출을 맡은 토드 필립스는 원작 속 조커의 탄생기를 여느 슈퍼 히어로의 탄생기와 다를 바가 없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판단하고, 직접 해석하여 창작했다. 이러한 사례와 비교해보자면, 한국 히어로물 또는 판타지 장르의 행보는 스토리 측면에서나 세계관 측면에서나 부진한 감이 없지 않다. 모바일 앱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플랫폼에서 소설이 연재되고 있으나 내공 있는 작품은 극소수고, 큰 투자를 받아 제작된 드라마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게임 역시 장르적 개성을 살리지 못한 양산형이 대부분이다.

한 전문 비평팀의 지적처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탓이다. 기업과 콘텐츠 제작자들은 장르 판타지의 유행을 환상성의 유행으로 잘못 이해했고, 원작자가 추구했던 ‘한국적’ 판타지가 고전적인 ‘환상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텍스트릿, 「비주류선언」, 요다, 2019, 31쪽 참고). 어설픈 환상성의 재현이나 무분별한 세계관 모방으로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은커녕 서사를 이끌어가는 캐릭터에 대한 공감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국내 판타지 장르 시장의 실태다. 영화 <신과 함께>나 드라마 <도깨비>가 호응을 얻은 가운데 한국형 판타지를 표방한 대다수의 작품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형 어벤져스의 주인공들


이 글에서는 외국의 성공 사례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우리 고전 속 영웅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각각의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한국형 어벤져스의 잠재력을 드러낼 것이다. 한 번쯤 들어본 캐릭터도 있을 것이고, 생소한 캐릭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전통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미리 말해둔다. ‘한국적≒전통적’이란 단순한 논리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이나 마블스튜디오의 영화 <토르>에서 구현된 세계관에 북유럽신화가 영향을 미쳤듯이, 익숙한 데서부터 출발하여 한국형 판타지 세계관에 관해 함께 고민해보자는 뜻이다. 말 그대로 시론試論이다.

소개된 세계관을 그대로 활용해서 우리 영웅들의 매력을 부각해도 좋고, 현대적으로 변모시켜서 새로운 한국형 히어로를 재탄생시켜도 좋다. 앞서 잘 만든 사례로 언급한 두 작품은 민속적인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정체성으로 고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망자를 구원하는 만신들의 왕, 바리공주


우리 신화 속 대표적인 힐러(healer)이자 만신萬神들의 왕이다. 오구국 왕실의 7번째 딸로 태어났으나 거푸 딸이 태어난 집에서 또 딸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러나 자신을 내쫓은 부모가 죽을병에 걸리자 남장을 하고 치병治病을 위한 약수를 구하고자 저승 여행을 떠난다. 저승으로 길을 떠난 바리공주는 그곳에 있던 망자亡者들을 구원한다. 저승에 이르러 무장승을 만난 바리공주는 공덕을 쌓고 아이들을 낳은 끝에 저승꽃과 약수를 구해서 부모를 살리게 된다. 아이들은 칠성으로 자리하고, 무장승은 시왕군웅직을 맡게 되었으며, 바리공주는 만신들의 몸주 노릇을 함으로써 섬김을 받는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길을 떠나면서 여러 망자를 만나 구원해주고, 꽃과 약수를 구해 부모를 살려 목적을 이룬다는 점에서 여성 영웅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캐릭터라 할 만하다.


‘바리데기’ 휴머니스트


용마를 부리는 미완의 영웅, 아기장수


비범한 능력을 타고났으나 부모와 이웃의 살해나 실수로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의 장수다. 겨드랑이에 난 조그만 날개로 갓 난 시절부터 날아다닐 수가 있었다. 곡식으로 병사와 말, 무기를 만드는 재주도 지녔다. 용마까지 부리며 비범한 모습을 보이던 이 아이는 장차 영웅이 될 만했으나, 예사 평민 집안에서 영웅이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 못 할 일이자 멸문지화 당할 것이 뻔할 일이었다. 아기장수 집안은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으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또는 아기장수가 절구나 베개에 압사당하며, 날개가 찢겨 죽는다.) 어느새 왕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가 관군을 이끈 장수가 아기장수를 잡으러 나섰다. 관군에 대적할 갑옷을 만들기 위해 콩 한 말을 볶기도 했으나, 배가 고팠던 어머니가 톡- 튀어 오르는 한 알을 주워 먹는 바람에 미완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섰다. 관군들은 아기장수의 늠름한 위용에 겁을 먹었으나, 결국 콩 한 알만큼 빈 틈새에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두게 된다. 인근 산자락에서는 용마가 솟아오르며 며칠 밤낮으로 구슬프게 울다가 냇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아기장수는 물속에서 환생을 꿈꾸는 미완의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아기장수 우투리’ 보리출판사


도력으로 3천 포로를 구한 의승도대장, 사명대사


조선 중기의 고승이다. 십대 때 부모를 잃고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 2천여 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는 등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일본 사신으로 건너가 전란戰亂 때 끌려간 3천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활약에 관한 일화도 여러 편 구전되고 있다. 특히 일왕日王과 담판 짓던 사명대사가 눈이 쌓인 산중에 갇히자 도술을 부려 앉은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구리로 만든 방에 불이 지펴져서 갇히자 ‘빙’자를 천장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공기를 낮췄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뛰어난 도력과 깊은 혜안으로 역사 속 위인이자 전설 속 영웅으로 활약한 것이다.


'대구동화사사명당유정진영' 문화재청


도깨비들의 우두머리, 비형랑


신라 진지왕眞智王의 혼령이 낳은 아들로 귀신 또는 도깨비를 부리는 능력을 지녔다. 비형랑의 일화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진지왕의 혼령이 생전에 연모하던 도화랑桃花娘의 집에 머무는 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비형랑이 태어날 때 천지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는 영웅의 비범한 출생을 암시한다. 소문을 들은 진평왕眞平王은 비형랑의 남다른 면모를 눈치채고 왕실로 데려와 키우며, 15세가 되던 해에 집사執事란 관직도 내렸다. 밤이 되면 비형랑은 성을 넘어 다니며 서쪽 황천荒川 기슭의 귀신들과 자주 어울렸다. 비형랑이 귀신들을 이끈단 사실을 알게 된 진평왕은 비형랑에게 귀신들을 부려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으란 명령을 내렸다. 비형랑이 부린 귀신들은 하룻밤 만에 큰 다리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그 다리를 귀신다리鬼橋라 부르기 시작했다.


'삼국유사' 문화재청


제주도를 만든 거대여신, 설문대할망


태초에 바닷속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키가 크고 힘이 아주 센 여성 신이다. 어느 날 잠자던 설문대할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귀를 뀌었더니 요동이 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떠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부지런히 나르며 한라산을 만들었다. 치마 한 폭만큼의 흙으로 한라산을 만들고, 치맛자락 새에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서 오름들이 생겼다. 설문대할망의 오줌발에 성산포 땅이 뜯겨 나가 작은 섬을 이루기도 했다. 설문대할망은 몸속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어서 제주도는 늘 풍요로울 수 있었다. 설문대할망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힘찬 오줌 줄기로부터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가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했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잠녀가 생겨났다고도 한다.


‘설문대할망’, 봄봄출판사


염라에게 인정받은 저승차사, 강림


본디 한 고을에서 도적을 잡던 아전이었으나 염라대왕의 인정을 받아 저승의 차사가 되었다. 신체가 건장하고 염라대왕에 맞서는 담력과 영리함을 지닌 사내다. 강림의 이러한 매력은 웹툰 <신과 함께>나 동명의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강림이 살던 김치고을의 과양생이가 원님께 갑작스레 세 아들 모두 잃은 사정을 하소연하니, 원님은 고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영리한 강림을 시켜 염라대왕을 잡아 오도록 지시했다. 그 명령에 따라 강림은, 아내가 만들어준 떡을 갖고 떠나서 조왕과 세 신선에게 주고, 그들의 도움으로 염라대왕을 데리고 오게 된다. 염라대왕은 즉시 연못에 수장되었던 3형제의 시신을 꺼내어 살렸다. 3형제를 집으로 돌려보낸 염라대왕은 강림의 담대함을 높이 사서 저승차사로 데려갔다.


웹툰 ‘신과 함께’


날개 달린 천궁天弓, 묵신우


경남 함안과 진주 사이에 걸쳐 자리 잡은 방어산防禦山에 깃든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근방에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니며 300근짜리 활을 쏘는 묵신우墨神祐라는 장군이 있었다고 한다. 역적이 될까 두려워한 부모나 이웃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기장수와 달리 전장에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장수將帥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묵신우는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으며, 엄청난 힘을 가져 300근이나 되는 활의 시위를 가뿐히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방어산성을 쌓고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외적과 맞서 싸웠다. 무수히 많은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도 하늘을 날며 활을 쏘는 재주로 공중전空中戰을 펼치며 백성을 지켜냈다.

이상의 일곱 캐릭터는 모두 우리 고전 속에 등장하는 민중영웅들이다. 남녀노소男女老少 또는 신분 및 직업이 고르게 대표적인 캐릭터를 소개해보았다. 아기장수(또는 우투리)가 아직 어린 미완의 영웅이라면 묵신우는 전장에서 활약하는 무관武官이고, 사명대사는 연륜이 돋보이는 노장老將이라 할 수 있다. 염라의 인정을 받은 강림의 담대한 일화가 남성의 서사라면, 망자를 구원하는 바리의 이야기는 여성 영웅의 모험기라 할 만하다. 또한 사명대사가 의승도대장으로서 일본에 맞서 활약을 한 역사적 위인인 것에 비해 비형랑은 왕의 아들임에도 도깨비의 우두머리로서 신이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민속적이고 토속적이다. 소개된 일곱 영웅은 작게는 한 고을을, 크게는 한 나라를 만들어 내거나 지켜냈다는 점에서 널리 구전될 만하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개발되기 전만 해도 뉴스를 대신해서 정보소통 구실을 했던 것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신화나 전설이었다. 유명한 인물의 일화가 일종의 평전評傳이었고, 한 지역에서 전해지는 신화나 전설이 삼라만상의 유래를 설명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자 매력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야기가 일종의 유형type이나 화소motif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기장수 이야기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것은 주인공 이름이나 구체적인 활약이 다를 뿐, 비슷한 유형을 지니고 여러 지역에서 널리 구전되는 광포설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시된 일곱 영웅의 캐릭터를 꼭 고집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현대적 인물로 변모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다만 이야기 속에 잠재된 세계관과 대중의 심리에 대한 이해 및 조합이 남은 과제다.


미국 드라마 ‘더 보이즈(The Boys 2019)’ 2019~


세계는 지금 히어로hero를 넘어 빌런villain의 시대다. DC 코믹스의 악당들을 모아 만든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Suicide Squad> 이후로 영화 <조커>가 성공을 거두었고, 최근에는 디즈니의 악당영화 <말레피센트Maleficent 2>도 기대작으로 개봉되었다. 그런가 하면 일반인들이 유명세에 취한 슈퍼히어로 집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항하는 드라마 <더 보이즈>도 있다. 포스터의 카피 문구는 오히려 ‘당신의 슈퍼히어로를 절대 만나지 마세요’다. 이런 현상에 비춰보자면 우리 판타지 또는 히어로 문화는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실패 사례를 반추反芻하여 더 탄탄한 세계관과 스토리텔링으로 차근차근 내구성을 쌓고, 대중이 원하는 바와 엮어낸다면 한국형 어벤져스 또는 판타지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글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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