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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선인들의 일기장에서 최고의 스토리를 찾아라!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처럼 흥미진진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기에서 찾아낸 흥미로운 스토리들로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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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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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20년만에 만난 관기 몽접,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하다 1618년 5월 5일, 남도일대를 유람중이던 양경우가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 왕세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문안케 하다 1592년 12월 29일, 왕세자 광해군은 임진년 마지막 날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평안북도 영변(寧邊)으로 왔다. 왕세자가 오늘 길에는 이미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왕세자는 오는 길에 명나라 군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 현재 왕세자가 비록 모든 군무(軍務)를 임시로 맡고 있지만, 아직 명나라로부터 왕세자의 품봉(稟封)을 받지 못하여 명나라 장수와의 접견이 관례상 어색하고도 예에 합당하지 않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1593년 1월 3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왔다. 일국의 왕세자이자 군무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서 온 제독 이여송을 맞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세자는 할 수 없이 좌찬성 정탁(鄭琢)에게 제독 이여송을 문안하라고 하였다. 이날 정탁은 왕세자의 명을 받고 안주로 곧장 출발하였다. 이 길에는 정탁의 아들 정윤목(鄭允穆)이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한밤중에 안주에 도착하였다. 1월 4일 아침 정탁은 역관 진효남(秦孝男)을 통해 이여송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제독께서는 명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아 우리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러 오시니 우리 신하들과 백성들이 감읍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왕세자께서는 군사의 일을 임시로 총괄하시며 여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영변에 와 머무르시고 계십니다. 지금 제독께서 우리 경내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절히 제독이 오시는 길가에서 영접을 하려 하셨지만, 지금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아직 조선의 세자로서 품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의 사정이 합당하지 않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소신(小臣)을 보내시어 문안을 드립니다.” 그러자 제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중신(重臣)을 보내시어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정탁은 이날 유성룡(柳成龍)과 이여송이 평양 탈환 작전을 계획하는 일을 지켜볼 수 있었다.

  •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오늘의 일기

상경한 지방 수험생들의 숙소, 그리고 그 숙소의 주인 - 반주인

http://www.ugyo.net/yk/ilki/imageViewer/imageViewer.jsp?B_SUJI_ID=KSAC_M_D00500831&B_BOOK_ID=KSAC_T_D00500831_001&B_KWON_ID=&B_STYLE_ID=&B_KISA_ID= 서찬규(徐贊奎), 임재일기(林齋日記) 1846-01-18 ~ 1858-12-29

1846년 1월 18일, 서찬규는 아침에 반주인 홍종하의 집에 당도하였다. 7월 26일, 덕우가 왔다. 이날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반주인에게 진 빚을 갚았다.1847년 3월 11일, 반주인이 그의 딸 혼인 때문에 번잡하고 소란하여 시끄러움을 피해 이웃집으로 옮겼다. 3월 28일, 세 사람이 막 떠나려는데, 반주인집에서 술과 안주를 차려 전별해주었다. 진사 안중과 치황씨도 멀리까지 나가 전송해 주었다. 여러 달을 함께 고생하였으니, 그 서운한 마음을 알 만하다. 강을 건너서 어영곡점에서 잤다.1850년 9월 25일, 반궁에 들어갔다. 반궁의 주인 홍종하가 그의 아내의 신상을 당하였다. 학재 아래의 끝 방에 들어가 도기하였다.1851년 9월 14일, 반주인집에 들어갔다가 매우 어지러워 다시 여사로 나왔다. 고단한 여행길에 괴롭고 기운도 매우 건강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며 밤을 보내었다.1857년 4월 4일, 남문에서 내려와 20리를 가서 송파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러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이른바 ‘한비(汗碑)’라고 하는 것을 가서 보니 받침대와 기초는 모두 무너져서 제멋대로 황량하게 묻혀 있었다. 날아갈 듯한 용마루와 단청한 기둥이 겹겹이더니 대체 그 무슨 의미인가? 한 번 고개를 돌리고 나니 차마 두 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다시 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동대문에 들어가 반(泮) 주인 홍종하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 때 과거 보러 온 유생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서 뒤늦게 도착한 사람은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동행한 이십여 명이 일단 함께 잤다.1858년 11월 1일, 반주인인 홍종하가 와서 인사하였다. 11월 15일, 반주인이 떠나갔다. 12월 29일, 서울에 들어가서 반주인의 집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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