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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일기장에서 최고의 스토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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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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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말을 사서 사냥에 참여한 의주기생 운향 명의 조정에 가서 이듬해의 책력을 받아오는 관원의 역관이 강을 건너왔다. 수본(手本)이 있었으니, 그것은 연경에 들어가서 견문한 일이었다. 그 대략은, “농내국(農耐國)은 본래 안남국(安南國)의 속국이었는데 그 군장(君長)인 원복영(院福映)이 안남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합병한 뒤 사신을 보내서 월남국(越南國 베트남)으로 봉해 주기를 청했다. 또 하남(河南)과 산동(山東)은 9월의 큰비로 황하(黃河)의 둑 여러 군데가 무너졌고 황하에 근접한 수십 개의 주현(州縣)은 거의 산과 언덕이 수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월 이후 수세가 좀 누그러졌는데도 평지의 물의 높이가 아직도 한두 자나 된다. 이부 상서(吏部尙書) 유권지(劉權之)와 병부 시랑(兵部侍郞) 나언보(那彦寶)를 특파하여 급히 달려 그곳에 가서 황하 복구 공사를 해내도록 하였다.”는 것이었다.우리 사신일행이 열흘 동안 의주에 지체한 것은 오로지 짐이 갖춰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 방물(方物)은 고쳐 싸고 상품도 다 모였기 때문에 내일 압록강을 건너가기로 정한 것이다. 일행은 침착하기를 약속하고 장비와 복장을 고쳤으나 와글와글 시끄러울 뿐 마음을 안정시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의주 기생으로 이름이 운향(雲香)이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용모와 자태가 풍만하고 훤칠하여 장부의 기상이 있다. 듣건대, 앞서 의주 부윤이 여러 기생들을 데리고 위화도(威化島)에서 사냥을 하려고 하였는데 운향은 개연히 말을 빌릴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더니 가진 재산을 다 털어서 돈 100냥을 내어 좋은 말 한 필을 사 가지고 타고 달려 나갔다. 모든 부중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혀를 차며 대단하게 여겼다. 경암(絅菴)추양(秋陽)이 다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었다.

  • 밭을 갈던 여인, 알고 보니 딸이로다! - 타향에서 포로로 잡혀간 딸과의 극적 상봉 1645년 4월 13일, 사신단 일행은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였는데, 만주인 40명이 호위하였다. 산 뒤의 지름길로 가서 봉수대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는 길에 송점(松店)을 지났는데, 오랑캐 여자들이 모여서 구경하였다. 그 중 바위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이 슬프게 바라보았다. 옹후(甕後) 고개 2개를 넘자 여인들이 밭에서 파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왔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너는 조선 여자 아니냐?” 하고 물으니 “온양사람입니다.” 라고 답했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라고 다시 물으니 “돌아가고는 싶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강을 8번 건넜는데, 7번째 건넌 곳이 옹후하(甕後河)였다. 저녁에 7번째 강가에서 노숙하였다. 배꽃이 만발하고 두견화도 아직 남아 있었다. 대군(인평대군)이 두견화로 전을 부쳐 나누어주었으니, 풍토와 절기가 이같이 달랐다. 봉황(鳳凰) 이후 4〜5리 사이에는 모두 봉수대가 있었다.14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였다. 통보(通堡)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일명 진이(鎭夷)라고도 한다. 들판에 성이 하나 있는데 명(明)나라 때 건축한 것이고, 산에 성이 하나 있는데 만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장두리(庄頭里)에서 돼지와 거위, 그리고 말여물 등을 참공(站供)으로 보냈다. 하마구(蝦蟆狗)를 끌고 가던 오랑캐 아이 하나가 앞에 와서 앉고는 발을 들고 손을 쳐들었는데, 마치 거지가 구걸하는 형상이었다. 대나무를 주니 곧 일어서서 갔다. 하마(蝦蟆)는 개의 별종으로, 가장 작은 것은 큰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커다란 개를 대적할 수 있다고 한다. 오랑캐 여자 수십 명이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중 한 아이가 매우 예쁘고 눈매가 또렷하여 나이를 물으니 손가락으로 열넷을 꼽았다. 부사(副使)가 과자와 차를 주었다. 그들은 모두 옷깃을 여민 뒤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오른손으로 오른쪽 귀밑머리를 만지며 일어났다. 이는 오랑캐 여자들이 답례하는 모습이다. 출발하여 논동(論洞)에 도착한 뒤 부사와 성이성은 봉수대를 지키는 사람의 집에서 잠시 쉬었다. 집주인은 한족으로, 성명은 증정춘(曾正春)인데 자녀가 7명이라고 하였다. 역관을 시켜 “복 받은 분이네요.” 하니 대답하기를 “이 몸이 오랑캐가 되어 봉수대를 지키며 사는데 무슨 복이 있나요?” 하였다. 나장탑(羅將塔)에 도착하니 의주 군관(義州軍官) 홍지남(洪地南)이 북쪽에서 달려와서는 봉림대군이 이미 초6일에 산 쪽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길가에 3명의 오랑캐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흙을 부수던 여인이 바로 서울사람 예남(禮男)의 딸이었다. 예남이 마침 일행 중에 있어 홀연 서로 만나 얼싸안고 통곡했다. 돈을 주고 데려오려 해도 그럴 수 없고 그냥 떠나자니 그러기도 어려워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館)에 묵었는데, 사방 10리가 안 되는 곳으로 지명이 풍시령(風時嶺)이다. 연일 안개가 끼어 기운이 매우 불안정한데다 사신 행렬이 연속 2번 지나가며 세금 징수가 있어서 부사와 성이성은 봉수대로 갔다. 막 자려는데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날은 70여 리를 갔다.4월 18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여 석문령(石門嶺)을 넘어 냉정촌(冷井村)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물물이 솟아 나오는데 물이 아주 차고 맑았다. 마을 이름은 이것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어린 아이 하나가 장막 앞에 와 서서는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는 종실 계양령(桂陽令)의 자손으로 나이는 10살이며 포로로 잡혀 한인 집에 팔렸는데, 지난 해 도망을 나왔다가 잡혀 곤장 100대를 맞고 지금 막 도망가려는데 그 기회를 얻었다고 하였다. 대군의 군관 이준한(李俊漢)이 그의 6촌이어서 그와 뒷날에 속환(贖還)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그 아이가 목메어 울며 차마 떠나질 못했다.4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출발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가니 새로 만든 다리에 도착하였다. 다리 공사를 끝낸 후 대단히 사치스럽고 큰 비석을 세웠는데, ‘관대하고 온화한 인성황제[仁聖皇帝]께서 영안교(永安橋)를 세우라 명하셨다.’라고 적혀 있었다.안산(安山) 사람 이수(李守)는 부사(副使)가 군수(郡守)로 있을 때 통인(通引)이었는데, 오랑캐에 잡혀 심양(瀋陽)에 있다가 부사와 만났다. 부사에 대한 정성이 매우 지극하여 이날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배를 많이 가지고 와 말을 타고 갈 때의 갈증을 풀게 해주어 양 2마리를 선물로 주었다.5월 1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여 오리포(五里鋪)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리포 안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서흥(瑞興) 검수(劍水) 사람이었다. 황해도 지역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와 인사하고 “누가 황해도 사람인가요? 심양에 잡혀온 사람들은 혹 고향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너무나 먼 곳에 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해요. 지금 근처의 사람을 만나니 가족을 만난 듯 하네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술을 가지고 와 마시게 했다. 성이성이 듣고는 불러서 그 뜻을 불쌍히 여겨 과일과 담배를 주었다. 여자가 받고는 먹지 않으며 말했다. “이것은 조선 물건이네요.” 하면서 그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린 뒤 말했다. “돌아가실 때도 이 길로 가시나요?” 여자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술을 빚어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 은어(銀魚)를 진상하라 1587년 8월 1일, 대구부사 권문해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공납(貢納)해야 할 진상품을 챙기느라 바쁘다. 1584년 대구부사로 부임한 이후 올해로 4년째 매년 해오는 일이지만 공납일이 다가오면 늘 걱정과 근심이 생긴다. 특히 공납품 중에 하나인 ‘은어(銀魚)’를 챙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은어가 한 마리도 없고 민간에서도 거두지 못하여 진상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상주에서 올라온 은어(銀魚)와 식염(食鹽) 그리고 목면과 필을 겨우 챙겨 진상할 수 있었다.1588년 6월 9일, 올해도 역시 은어가 문제였다. 진상할 은어(銀魚)를 잡지 못하였다. 마음이 급해진 권문해는 밀양, 청도 등으로 절간(折簡)을 보내었고 어렵게 구하였다. 매년 권문해에게 은어를 진상하는 일은 걱정과 근심거리가 되었다.

오늘의 일기

배 안에 둘러앉아 파도 치는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하고, 여색에 취하다

http://www.ugyo.net/yk/ilki/imageViewer/imageViewer.jsp?B_SUJI_ID=KSAC_M_D00500748&B_BOOK_ID=KSAC_T_D00500748_001&B_KWON_ID=&B_STYLE_ID=&B_KISA_ID= 배삼익(裵三益), 조천록(朝天錄) 1584-03-24 ~ 1584-03-28

1584년 3월 24일, 우리(배삼익, 유훈, 심원하 등)는 식사 후에 출발하여 재송정(栽松亭, 대동강 부근의 정자)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대동강(大同江)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기백(箕伯) 유훈(柳塤)과 도사 심원하(沈源河) 등이 배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배 안에 빙 둘러 앉아 서로 술에 취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파도가 배에 부딪히는 지도 알지 못하였다. 서윤(庶尹) 윤안성(尹安性), 찰방(察訪) 홍세공(洪世恭), 판관(判官) 정응소(鄭應韶) 등도 참석하였다. 이전에 술을 경계하던 것을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었다. 나는 여색 두려워하기를 호랑이 같이 하고 술을 약같이 보는 것으로 평소 처신하였다. 게다가 지금은 멀리 떠나와 있고 바람마저 차가운 이곳에서 어떻게 몸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처음 술을 접하게 되고 다소 술에 취하게 되면 어느 누가 여색 밝히는 마음을 벗어버릴 수 있겠는가? 다만 오늘은 나라의 제사가 있는 날이므로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대동관(大同館)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25일에는 기백(箕伯) 등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패강(浿江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浮碧樓)를 걸어 다녔다. 밤에 배를 타고 내려오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횃불들이 성위에 빙 둘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횃불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볼거리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듯이 보였다. 26일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랐는데, 이곳은 최고의 강산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27일에는 정오에 쾌재정(快哉亭)에 올랐다. 그곳에는 어제 함께 거닐었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다만 서윤(庶尹)은 집안의 제사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28일 아침 식사 후에 풍월루(風月樓)에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 기백(箕伯)에게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기백이 벌써 길가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수레를 타고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하여 전별연을 받았다.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부산원(斧山院)에서 쉬었다가 안정관(安定館)에서 유숙하였다. 고을 수령 유격(柳格)과 가찰방(假察訪) 황윤검(黃允儉) 등과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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