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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일기장에서 최고의 스토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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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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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연경 근처 노하에서 묵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장수를 만나 대화하다 1599년 10월 18일, 조익(趙翊)을 비롯한 사신단 일행은 저녁이 가까이 될 무렵 북경 인근의 노하(潞河)에 이르렀다. 노하에는 부교(浮橋)가 놓여 있어 일행들은 상쾌한 마음을 하천을 건널 수 있었다. 이날은 올해 들어 처음 내리던 눈이 개였다. 눈이 개이자 천지사방이 훤히 보였다. 조익은 황제가 있는 북경 근처의 풍광을 자신의 눈에 가득 넣고 있었다. 노하의 물도 올해 처음 얼었다. 하지만 배들은 노하에 줄을 지어 정박하고 있었고, 노하의 좌우에는 훌륭하고 큰 저택들이 있었다. 참으로 물산과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조익은 이 풍광을 더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날이 저물어, 대(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묵었다. 다음날인 19일, 방물(方物)과 집을 실었던 수레가 들어 왔다. 들어 온 수레에서 쌀 두 포대를 여진족에게 빼앗겼다고 하니 조익은 한탄스러웠다. 20일 조익의 사신단 일행은 계속 노하에 머물러 있었다. 10월 21일 역시 계속 노하에 머물러 있었는데, 명나라 안찰사(按察使) 양조령(梁祖齡)이 이곳의 관포(館鋪)에 와 주둔하였다. 이를 들은 조익의 사신단 일행은 역관(譯官)을 보내 배알을 청하였다. 그러나 안찰사 양조령은 일이 있어 내일이나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곳에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거주하고 있었다. 진인은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유격장이었다. 진인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조익에게 문안을 하였다. 이에 조익은 즉시 임준(林竣)을 데리고서 그를 만났다. 진인은 먼저 조선 국왕 선조(宣祖)의 안부와 조선의 한 해 농사가 잘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또 물었다. “동대문 밖에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을 조성하는 공역은 지금 다 마치셨습니까?” 조익은 대답하였다. “아직 그 공역을 다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진인은 말하였다. “국왕에게 편지를 올리고 싶은데, 날이 저물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날인 10월 22일 조익은 안찰사 양조령을 만날 수 있었다. 조익은 양조령에게 방물과 짐을 나를 말과 마부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조선에서는 세 개의 사신단을 파견하고 있었고, 이미 앞선 조선의 사신단이 말과 마부를 얻어 가서 더 이상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하여 일행은 오늘 황제가 있는 북경의 황성(皇城)으로 출발하지 못하였다.

  • 선친의 산소에 구멍을 낸 범인을 찾아라! - 덫에 걸려든 산다람쥐 1622년 2월 27일, 청명절(淸明節)이었다. 김령은 아침 일찍 외조모의 기제사를 지내고, 부모님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살펴보니, 어머니의 산소에 쥐구멍이 나있는 것이 아닌가. 김령은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쥐구멍을 발견하고는 놀랍고도 괴로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즉시 손질해서 고치려고 했지만, 날과 달의 거리낌이 고려되어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김령은 잠이 오지 않았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머니 산소의 쥐구멍 때문이었다. 김령은 비 내리는 2월 29일의 아침, 다시 산소로 찾아가 쥐덫을 놓고 잡히기를 기다렸다. 지관에게 물어보니 산소에 난 구멍은 삼월절(三月節) 안에 손대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쥐덫을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쥐덫을 놓은 지 이틀만인 3월 1일, 날이 저물 무렵, 종이 쥐덫에서 잡힌 산다람쥐를 가져왔다. 옳거니, 김령은 어머니의 산소에 구멍을 뚫은 범인이 이 녀석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뒤로도 매일 어머니의 산소에 찾아가 확인해보았는데, 더 이상 구멍 뚫리는 일이 없었다. 필시 산다람쥐로 인해 생긴 탈이었던 것이다. 김령은 일주일이나 더 확인해본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 밀양 기생 보금을 연주하다 1519년 2월 4일, 황사우는 밀양의 수산현과 금동역을 거쳐 밀성(密城)에 들어갔다. 집무를 마친 황사우는 저녁에 기녀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7월 8일, 아침 일찍 양산군을 출발하여 밀양에 이르렀다. 춘추 포폄 때문에 감사가 좌수사와 우수사와 함께 집무를 보았다. 황사우는 이들을 뵙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황사우는 밀양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기녀를 다시 불렀다. 그녀를 보자 황사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금(寶琴). 보배로운 거문고라는 뜻이었다.7월 9일, 밀양. 감사와 좌수사, 우수사가 누각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물렀다. 여러 훈도를 고강하였다. 황사우는 저물 무렵 방으로 내려와 밀양현감과 전 고령현감과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좌수사와 우수사가 감사에게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황사우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는데,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칠원현감과 영산현감에게 대전(大典)을 고강했다. 이날도 황사우는 보금을 몰래 연주하였다.

오늘의 일기

아들 윤겸의 정치를 칭송하는 소리를 듣다

오희문(吳希文), 쇄미록(𤨏尾錄) 1597-06-24 ~

1597년 6월 24일, 오늘 오희문은 아들 윤함의 득남 소식과 함께 또 한가지 즐거운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조정의 조보를 받아 보았는데, 거기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아들 오윤겸과 삼척군수 김권을 칭찬하는 내용을 보고하였다고 나와 있었다. 칭찬의 글을 보니 “정치를 함에 있어 속된 아전들이 아첨하여 백성들에게 잘 보이려는 일을 하지 않고, 명령을 내릴 때 교만하고 잘난 체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구차하게 영예를 얻기 위해 정치를 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공무를 받들어 실질적인 혜택을 백성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고 사랑하여 백가지 일이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보에는 아들 윤겸 말고도 춘천부사 서인원, 양양부사 이홍로에 대한 칭찬도 있었다. 이들 역시 정치가 아름답다고 칭찬하였고, 평해군수 윤열 역시 그 다음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으로 꼽혔다. 오희문은 전란의 와중에 수령의 자리를 얻어 어렵게나마 온 식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오씨 문중 5대 만에 과거급제의 영예를 안은 아들 윤겸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이제 수령으로 정치를 잘한다는 평판도 얻었으니, 앞으로 조정에서 더욱 승승장구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승이나 판서 자리에도 오르려나... 오희문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욕심이 지나친 듯하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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