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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소현세자의 죽음에 즈음한 여러 가지 정황 - 음식과 침, 그리고 보약 1644년 6월 21일,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심양으로 돌아오신 내용을 전하는 보고서와 다른 보고서에 다음의 내용을 언급했다. 형부(刑部)의 관리와 승지(承旨)라는 자가 정명수(鄭命壽)와 함께 객관에 와서 소현세자께서 그들을 접견했다. 이때에 보덕 서상리(徐祥履)가 모시고 있었다. 서쪽으로 돌아올 때에 청나라 사람 한 명이 소현세자 앞을 지나며 말에서 내리지 않는 죄를 지었는데, 그 사람에게 죄를 주는 일을 상의하러 온 것이다. 오후에 소현세자께서 의관 등에게 명령하시기를 “요즘 머리와 손발에 열이 있어 조금 불편하다. 약을 먹는 것은 입에 써서 좋지 않으니 몇 개의 혈자리에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하였다.22일, 재신과 의관이, 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께 문안을 드린 후. “어제 의관에게 침 맞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것은 먼 길을 말 달려오셔서 피곤이 쌓여서 그런 것이 틀림없습니다. 서둘러 약에 대해 논의하라고 명령하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소현세자께서 “알았다. 약을 먹는 일은 며칠 두고 본 뒤에 다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묘시(卯時 : 오전 5시〜7시)에 소현세자께서 대궐에 가서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하였다. 이때에 보덕 서상리와 문학 이래가 모시고 갔다.23일, 재신이, 또 세자시강원에서 소현세자께 문안을 드린 후에 “간밤에 몸이 편치 않으셨습니까?”하고 여쭈었다.소현세자께서 “평안하였다.”하시었다. 소현세자께서 저녁에 재신과 세자시강원에 개고기와 삶은 국수를 내려주셨다.24일, 흐리다가 아침 늦게 갰다. 소현세자께서 정시(正時)에 침을 맞으시고, 오전 9시에 세자시강원 관리에게 들어와 지키지 말라고 하셨다. 침을 놓는 의관 최우량(崔宇量)이 발에 있는 곤륜혈(崑崙穴)·삼리혈(三里穴), 손에 있는 후계혈(後豁穴).중저혈(中渚穴).신문혈(神門穴) 등 10곳의 혈자리에 침을 놓았다. 소현세자께서 침을 맞으신 뒤에 재신과 세자시강원에서 문안을 드리고, 전임 정승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전임 판서 김자점(金自點), 인질로 온 김식(金鉽) 등이 또한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답하셨다. 재신과 세자시강원이 소현세자께 “오늘 침을 맞으셨으니 내일 움직이시는 것은 기운이 손실될 뿐만 아니라 필시 병세를 악화시킬 것입니다. 내일 야판(野坂)에 가시는 계획을 취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세자께서“나를 호위했던 군인들에게 내가 직접 음식을 전해주고 그들을 전송하려 한다. 잠시 갔다 온다고 크게 몸이 상하기야 하겠는가?”라고 답하셨다.7월 3일, 소현세자께서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려 몸이 편찮으셔서 의관에게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재신 등이 소현세자께 문안을 드리니 병세가 대단하지는 않으니 문안하지 말라고 답하셨다.재신과 세자시강원에서 “병세에 대해 의관에게 말씀하시고 약을 지으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의관과 상의해 보니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에, 소금물에 지모(知母)를 넣어 달인 물 1전(錢), 건갈(乾葛), 편금(片炒), 볶은 향유(香薷) 각 5푼, 소엽(蘇葉) 3푼을 더해 지은 약 2〜3첩을 연달아 드시고 땀을 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약을 짓는 것에 대해 아룁니다.”라고 아뢰었다.7월 28일, 소현세자께서 감한증(感寒症)을 앓아 왼쪽 어깨가 마비되면서 통증이 있었다. 신시(申時 : 오후 3시〜5시)에 소현세자께서 침을 맞을 테니 세자시강원 관리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의관 이호검(李好儉), 정후계(鄭後啓), 최우량(崔宇量)이 들어갔다. 정후계가 소현세자의 오른손 교구혈(交溝穴)·곡지혈(曲池穴)·신문혈(神門穴)과 오른발 절골혈(折骨穴)·곤륜혈(崑崙穴) 등에 침을 놓았다.소현세자께서 침을 맞으신 뒤에 재신과 세자시강원에서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답하셨다.재신과 세자시강원에서 소현세자께 아뢰었다. “세자께서 의관에게 침을 놓으라고 하신 뒤에 의관과 상의하니, 오적산(五積散)강활(羌活) 1전(錢), 오약(烏藥) 7푼, 형개수(荊芥穗) 5푼, 자소엽(紫蘇葉) 3푼을 더해서 연달아 두세 첩을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소현세자께서 “우선 한 번 먹을 만큼만 지어서 올리라.”하셨다.

  • 포로가 된 고려 사람, 돌아가지 못하고 요동에 묻혀 고려총을 이루다 왕보대(王寶臺) 40리를 가서 진씨(陳氏) 성의 민가에서 점심을 먹고 영수사(迎水寺) 30리를 가서 기하(旗下)의 주씨(朱氏) 성의 집에서 묵었다.마천령(摩天嶺)은 낭자산(狼子山) 북쪽에 있는데, 높이가 하나의 산언덕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름과 실제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마천령 서쪽에 주필산(駐蹕山)과 마제산(馬蹄山)이 있는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동을 정벌할 때 지나간 길이다.앞으로 30여 리를 가면 큰 물이 셋 있다. 이것을 삼류하(三流河)라고 부른다. 삼강(三江) 이북은 강물이 크거가 작거나 다 하(河)라고 부른다.왕상령(王祥嶺)은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진(晉) 나라의 태부(太傅) 왕상(王祥)이 살던 땅으로 영 아래의 물이 곧 얼음을 깨고 잉어를 얻은 곳이라고 하는데, 진실로 허황된 말이다.석문령(石門嶺) 마루터기의 석벽이 딱 벌리고 있는 것이 문짝을 훤하게 열어 놓은 것과 같았다. 고개에 올라와 앞을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둘러서 있는 것은 전연 보이지 않고, 다만 흙무더기와 돌덩어리가 아득하게 둘러막고 있을 뿐이다.왕보대(王寶臺)는 바윗돌이 층지어 걸려 있는 것이 돌 축대를 쌓은 것 같은데, 석문령(石門嶺)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보(王寶)는 곧 왕팔(王八)로써, 중국어의 발음이 비슷하다. 속칭 왕팔(王八)은 자라이다. 이곳에 별봉(鱉峯)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 냉정(冷井)이 길 곁에 있는데 호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고려총(高麗叢)은 다른 한 명칭은 고려총(高麗塚)이다. 고려 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가지 않은 자들이 죽어서 이곳에 묻힌 것 같다. 길 왼쪽에 10여 개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 앞에 간혹 비석을 세우고 돌 향로를 마련한 것도 있다. 혹시 그것들이 고려총일까. 왕보대(王寶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요(遼)는 조선의 옛 땅이다. 진(秦) 나라 때는 요동(遼東)이라고 하였고, 한(漢) 나라 때는 양평 요양(襄平遼陽)이라고 하였고, 당(唐) 나라 때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고 하였고, 요(遼) 나라 때는 동평 학야(東平鶴野)라고 하였고 또 남평(南平)이라 하였다가 동경(東京)이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원(元) 나라 때는 요양로(遼陽路) 관할의 개(蓋)ㆍ의(懿) 두 주(州)였으며, 명(明) 나라 때에는 정료위(定遼衛)와 동녕위(東寧衛)라고 하였다. 청(淸) 나라 때에는 성경(盛京)에 예속하였다가 숭덕(崇德) 연간에 태자하(太子河) 동쪽에다 요성을 옮겨다 설치하였다. 이것을 신료성(新遼城)이라고 하는데 구성(舊城)에서는 10리 되는 지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말 위에서 벽돌을 전해 주어 하룻밤 사이에 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마상성(馬上城)이라 한다.’고 하였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 정조 8)에 와서 인구와 물산이 늘지 않아 다시 옛 요(遼)에다 성을 옮겼다. 이곳이 바로 그것이다. 성 북쪽에 흙 언덕이 구릉같이 둘러 있는데 바로 구성(舊城)의 기초이다. 성의 둘레는 20리 높이가 5, 6장(丈)인데, 밖에는 감시용 내장(內障)성가퀴가 설치되어 있다. 성 위에 넓은 길이 열려 있는데 다섯 필의 말이 떼지어 갈 수 있다. 성 밖에는 호(壕)가 있는데 태자하(太子河)의 물을 끌어 넣었다. 성의 4개의 문은 수원(綏遠)ㆍ풍락(豐樂)ㆍ순안(順安)ㆍ공극(拱極)이라고 한다. 문에는 여초(麗譙)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에도 문이 있으나 문에는 문을 달지 않았다. 성 현판에다 문 이름을 썼고 그 곁에다 만주 글자로 번역을 달았다.성안에는 도독(都督)ㆍ수위(守尉)ㆍ역승(譯丞)의 관원이 있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니 길 좌우에 늘어선 가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온갖 상품이 치쌓여 있으며 각기 깃발과 방(榜)을 세우고 있는데 군데군데 금으로 글씨를 메웠다. 옛 시에 이른바, ‘깃발 세운 정자 백이나 모여 새 시장을 열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영안사(永安寺)는 성안의 북쪽 거리에 있다. 앞뒤에 불전(佛殿)이 마련되어 있는데 불전 가운데는 100여 개의 보살이 놓여 있다. 불전 앞에 비석을 세우고 기록했는데, 이 절은 회순제(懷順帝)가 창건한 것이다. 약국이 뒤에 있는데 안에 층진 궤에 약품을 저장하고 종이를 붙여 이름을 써 붙인 것이 우리나라 약국의 예와 같다. 상에는 갑에 넣은 여러 가지 책이 있는데 그것들은 의서이다. 주인은 화편(和扁)을 아는 사람 같다.성의 서쪽 문으로 나가면 쌍교(雙橋)가 그 남쪽에 있는데 그 다리에는 중수비(重修碑)가 세워져 있다. 다리 북쪽에 관제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아주 크고 웅장하였다. 홍살문 좌우에 종과 북의 누각을 세웠는데 왼쪽의 것을 용음루(龍吟樓)라 하고, 바른쪽의 것을 호명루(虎鳴樓)라고 했다. 본전의 소상(塑像)은 거의 3장(丈) 남짓 되고 현판에는 관성인(關聖人)을 찬양한 글귀가 많다. 장비(張飛)조운(趙雲)이 동서의 곁채에 배향(配享)되어 있고 앞에는 소상 하나가 결박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역사(力士)가 칼로 겨누는데도 그 사람은 얼굴을 쳐들고 장비를 보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 같았다. 이는 촉(蜀) 나라의 장수 엄안(嚴顔)이다. 밖에 한 쌍의 장대가 세워져 있고 높이는 10장 가량인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장대 끝에 기를 꽂고 두 누각의 종과 북을 치고 반드시 향을 피운다는 것이다.순안(順安) 밖에서 비스듬히 북쪽으로 2리를 가면 백탑이 치솟아 있다. 탑은 8각에 13층으로 높이가 36장, 둘레가 17, 8칸이다. 탑면에 전에 파넣었던 동비(銅碑)에 기록된 것이 그러하다. 그 밑에 돌로 네모나게 쌓았는데 네 모퉁이가 똑같이 가지런하고 평지보다 한 자 남짓 높다. 아래에 일곱 층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탑신(塔身)을 앉혀 놓았는데, 여덟 면에는 면마다 나한(羅漢) 하나와 신장(神將) 둘이 새겨져 있어 위아래를 모두 합하면 104가 된다. 또 중간 층에 나무 서까래를 얹어서 소슬처마를 만들었는데, 한 면이 각기 35개 씩의 서까래이고 한 면마다 쇠 풍경을 달아 놓아 바람이 한번 그것들을 흔들면 동댕거리는 소리가 구름 밖까지 어지럽게 흩어져 나간다. 꼭대기에는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줄기에 마디를 지워 5층으로 만들었고 철사로 매어 놓았다. 탑 위 넷째 층에 ‘벽한유광(碧漢流光)’ 네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는데 날이 맑을 때 천리경(千里鏡 : 망원경)으로 볼 것 같으면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곁에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구문석(龜文石)이다. 귀부(龜趺)로 받치고 있는데 반들거리고 글자의 흔적이 없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당 나라 군대가 원정할 때 태종(太宗)이 울지공(尉遲恭)에게 명해 이것을 세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성량(李成樑)이 만든 것이다.’고도 하고, 또 ‘동한(東漢) 이래로 이미 이 탑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다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화표주(華表柱)라고 하는 것은 더욱 망녕된 말이다. 옛사람이 전하는 기록에는 ‘화표(華表)로 성문의 기둥을 만들어, 전에는 성안의 한 민가에 그것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장소를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탑 뒤에 큰 전각(殿閣)이 있는데 부처 3구를 모시고 있다. 어떤 사람은 광우사(廣祐寺)라 부르기도 한다. 절 마당에 철기(鐵器)가 있는데 그 형상은 말구유 같아 10여 섬이 들어갈 것 같다. 절 안의 옛 물건이다.태자하(太子河)는 일명은 연수(衍水)다. 역사책에 ‘연 태자 단(燕太子丹)이 진(秦)을 피해 연수로 들어갔다.’고 한 것이 이곳이다.

  • 기물을 팔아도 감당이 안 되는 세금,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다 1624년 7월 22일, 세곡을 독촉하는 관청의 명령이 매우 급박하였다. 세곡선(稅穀船)에 싣고 받은 자문[尺文]을 이달 26일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형문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어찌 된 일인가. 김령은 얼마 후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이신승(李愼承)이라는 자가 한탄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세미(稅米)를 마련할 방법은 없고, 햇벼는 아직 익지 않아 일초가 급하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제기(祭器)를 팔아 마련하려고 했는데, 선뜻 사주는 사람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다.”그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함께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다. 큰 기근이 든 해에 보릿단지도 텅 비었고, 벼는 수확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세곡을 내라고 재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거꾸로 매달린 듯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할 수 없이 방납(防納)하듯, 어떤 자는 면포를, 어떤 자는 옷가지를, 또 어떤 자는 쓸만한 기물을 가져왔고, 심지어 어망, 밀[蜂蠟], 기타 자질구레한 물건 등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덕여는 은어 몇 마리가 면포 몇 필 값이 나가는 것으로, 베 몇 자가 쌀 몇 말 값이 나가는 것으로 그 수량을 계산해서 부쳤다. 서촌의 윤동빙은 면포 10여 필에 해당하는 값의 대두(大豆)를 팔 곳이 없어 겨우 3필만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어떤 자는 청동으로 만든 큰 화로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60~70필 정도의 값어치인데도 겨우 몇 필만 주려고 하기도 하였다. 부인의 비단옷을 기생에게 팔려고 하였지만 팔 수 없는 자도 있었다. 하늘에서 굽어본다면 분명 애달플 상황이었다.

오늘의 일기

노새 한 마리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길을 떠나네 - 지리산 유람의 시작

http://diary.ugyo.net/viewer/view?#node?itemId=DY&cate=img&depth=3&upPath=&dataId=ACKS_DY_00500144_0010_000_00000 송병선(宋秉璿), 두류산기(頭流山記) 1879-07-30 ~

1879년 7월 30일, 지리산(智異山)은 우리나라의 남악〔南嶽,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다섯 명산, 즉 오악의 하나로서, 남쪽의 지리산을 말함. 오악은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을 말함〕으로 백두산(白頭山)의 지류가 흘러 이 산을 이루었기 때문에 또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송병선은 일찍이 지리산 북록(北麓)을 유람했었다. 〔[지리산북록기]가 있음〕 기묘년(己卯年, 1879년, 고종 16년) 초가을 음력 7월에 묵은 빚을 갚는 기분으로 노새 한 마리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고종사촌 동생 김성례(金聖禮)는 일이 있어서 같이 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단성(丹城)의 사인(士人) 달지(達支) 이근배(李根培)가 때마침 그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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