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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선인들의 일기장에서 최고의 스토리를 찾아라!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처럼 흥미진진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기에서 찾아낸 흥미로운 스토리들로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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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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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 지역 관리에게 아들 장례에 쓰일 인력과 물품을 요청하다 1617년 2월 27일, 김택룡은 큰아들 김숙이 안동[화산(花山)]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정리의 제 집으로 간다하기에 그 편에 관찰사와 안동 부사에게 보낼 편지를 주어 보냈다. 편지를 보낸 것은 죽은 아들 김적의 장례를 도울 일꾼과 곽판(槨板)[槨板, 관을 만드는 널빤지] 마련에 관련된 것이었다. 3일 후 2월 30일, 큰아들 김숙이 안동에서 돌아와 안동부사[화백(花伯)]의 답장편지를 김택룡에게 전했다. 안동부사가 부조로 재산(才山)의 콩과 조 각 1섬, 그리고 번회군[燔灰軍, 상여를 매거나 등을 드는 등 호송하는 등의 일을 돕는 사람] 40명을 첩(帖)으로 보조해주었다. 그러나 관곽으로 쓸 나무는 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백성들의 힘이 약해 감당하지 못하므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3월 2일, 김택룡의 큰아들 김숙이 안동부사가 지급한 적의 장례의 번회군(燔灰軍)을 마련하는 일 때문에 임하 북면 사찰관(司察官)의 처소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3월 3일, 권태청이 술을 가지고 방문하였기에, 김태룡은 아침부터 이자정 · 황유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들 김숙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사찰관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피우[전염병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피해있는 것]하고 있어서,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찾는데 힘과 시간을 꽤 낭비하였습니다. 사찰관을 찾아서 만났지만 결국 해가 저물어 사월천(沙月川)에서 자고 오느라 더 늦었습니다. 그리고 번회군(燔灰軍)은 70여 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선천과 곽산 사이 기름진 곡식, 청에 바치는 공물로 쓰이다 곽산(郭山)서부터는 산이 낮고 나무가 없으며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사람 얼굴의 사마귀 같다. 선천(宣川)과 곽산 사이에는 땅이 비옥하고 곡식이 기름져 연경(燕京 : 북경)에의 공물로 바치던 쌀은 반드시 이곳에서 취한다. 또 몇 고을의 주민 가운데는 본래부터 부호가 많다고 알려져 왔다.구곡령(九曲嶺)을 통과하자 한 굽이 바다 빛이 신미도(薪彌島) 남쪽에 은은하게 나타나는데, 마치 100여 필 비단이 편평한 평지에 깔려, 가벼운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뒤흔들리곤 하여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능한산성(凌漢山城)은 고려 때에 쌓은 것으로 지금은 별장(別將)이 그곳을 관할한다. 읍 사람의 말에 의하면 땅이 좁아서 많은 군사를 수용하기 어렵고, 또 산중에는 수원(水源)이 아주 적어, 만약에 병란이 생기면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곽산(郭山) 땅에 들어가니 높은 산과 가느다란 성벽이 멀리서 시야에 들어온다.저녁에 선천(宣川)의 관아(官衙)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곧 어목헌(禦牧軒)이었다. 의검정(倚劍亭)은 어목헌 동쪽에 있는데 웅장하고 활짝 트여 역시 서도(西道) 고을의 명승이라고 하겠으나, 시야가 그리 넓지 못하고 단지 나지막한 산, 토막난 산기슭이 있을 뿐, 자그마한 물조차도 없다. 밤에 이 정자에서 기악(妓樂)을 차렸다.

오늘의 일기

논어, 맹자를 훔치는 책 도둑에서 금은보화를 가득 쌓아둔 조직 도둑의 우두머리까지

http://www.ugyo.net/yk/ilki/imageViewer/imageViewer.jsp?B_SUJI_ID=KSAC_M_D00501100&B_BOOK_ID=KSAC_T_D00501100_001&B_KWON_ID=001&B_STYLE_ID=001&B_KISA_ID=00000 김령(金坽), 계암일록(溪巖日錄) 1613-09-25 ~ 1617-10-06

1613년 9월 25일, 김령은 이번에는 책 도둑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랐다. 자개가 근래에 내성(奈城)에 갔는데, 그의 서당에 도둑이 들어 그의 책 《논어》.《맹자》.《중용》세 질(帙)을 훔쳐갔다고 했다.1614년 2월 18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저녁에 음죽에 도착해서 잤다. 도둑이 심한 탓에 충주 위쪽은 곳곳마다 도직이 매우 엄격하여 공문(公文)이 아니면, 여행하는 사람들은 통과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3월 3일, 변성지가 공소(公所)에서 퇴근하는 길에 김령에게 들러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필선 정온을 잡아 가두었는데, 주상이 ‘역적 온[賊蘊]’이라고 했고, 정항은 상소하여 대변했다. 경상도 감사가 비밀 장계를 올려 성주의 도직이 또 역적을 잡았다고 하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웠다.김덕룡이란 자가 거사로 살다가 성주에서 잡혔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정여립의 노비였는데, 몰래 달아나 숨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아무개 아무개와 함께 역모를 꾀했다.”라고 말해서 감사가 황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라고 했다. 1617년 10월 6일, 지난 6월에 영천 관아 창고에 도둑이 들어 세포(稅布) 오륙백 필을 훔쳐갔는데, 군수 조찬한이 군졸을 풀어 대인현에서 도둑을 잡았다 한다. 도둑은 아내를 셋이나 거느리고 보물이 그 집에 가득 채워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극악한 우두머리이다.이보다 앞서 풍기의 승지 황시와 풍산의 이약도 모두 도둑을 맞아 수없이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었는데, 이 물건들이 모두 이 도둑의 집에 있어서 진기한 보물과 물건들을 대부분 찾았다고 했다.도둑을 감옥에 가두고 장을 치며 신문했는데, 지난달 그믐날 밤에 그의 무리 백여 명이 말을 타고 세 갈래에서 나타났다. 그들이 북과 징을 치며 “이 행수는 어디 있소?”라고 하니, 잡혀 있던 도둑이, “너희들은 어찌 이리도 늦게 왔느냐?”라고 하고는 결국 탈출해 버리고 말았다. 군의 모든 사람들은 두렵고 놀라 아무도 어찌하지 못했다.다음날 조찬한은 군관을 보내 도둑떼를 추적하도록 했다. 군관이 예천에 이르렀을 때, 예천 군수 홍서룡은 전에 조찬한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제때 응하지 않아 도둑을 놓쳐버리고 말았다.조찬한은 급히 안동으로 달려가 감사 윤훤에게 이를 호소했고, 윤훤은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어 사방으로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도둑떼는 이미 ‘월악산을 넘어 호서(湖西) 경계로 들어갔으므로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이 일로 인해 도로에는 기찰(譏察)을 몰래 풀었는데, 행인들 중에는 풍문으로 혹 도적의 입에서 언급되었다고 하여 시도 때도 없이 체포당하거나 간혹 뜻밖의 횡액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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