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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포로가 된 고려 사람, 돌아가지 못하고 요동에 묻혀 고려총을 이루다 왕보대(王寶臺) 40리를 가서 진씨(陳氏) 성의 민가에서 점심을 먹고 영수사(迎水寺) 30리를 가서 기하(旗下)의 주씨(朱氏) 성의 집에서 묵었다.마천령(摩天嶺)은 낭자산(狼子山) 북쪽에 있는데, 높이가 하나의 산언덕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름과 실제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마천령 서쪽에 주필산(駐蹕山)과 마제산(馬蹄山)이 있는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동을 정벌할 때 지나간 길이다.앞으로 30여 리를 가면 큰 물이 셋 있다. 이것을 삼류하(三流河)라고 부른다. 삼강(三江) 이북은 강물이 크거가 작거나 다 하(河)라고 부른다.왕상령(王祥嶺)은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진(晉) 나라의 태부(太傅) 왕상(王祥)이 살던 땅으로 영 아래의 물이 곧 얼음을 깨고 잉어를 얻은 곳이라고 하는데, 진실로 허황된 말이다.석문령(石門嶺) 마루터기의 석벽이 딱 벌리고 있는 것이 문짝을 훤하게 열어 놓은 것과 같았다. 고개에 올라와 앞을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둘러서 있는 것은 전연 보이지 않고, 다만 흙무더기와 돌덩어리가 아득하게 둘러막고 있을 뿐이다.왕보대(王寶臺)는 바윗돌이 층지어 걸려 있는 것이 돌 축대를 쌓은 것 같은데, 석문령(石門嶺)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보(王寶)는 곧 왕팔(王八)로써, 중국어의 발음이 비슷하다. 속칭 왕팔(王八)은 자라이다. 이곳에 별봉(鱉峯)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 냉정(冷井)이 길 곁에 있는데 호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고려총(高麗叢)은 다른 한 명칭은 고려총(高麗塚)이다. 고려 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가지 않은 자들이 죽어서 이곳에 묻힌 것 같다. 길 왼쪽에 10여 개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 앞에 간혹 비석을 세우고 돌 향로를 마련한 것도 있다. 혹시 그것들이 고려총일까. 왕보대(王寶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요(遼)는 조선의 옛 땅이다. 진(秦) 나라 때는 요동(遼東)이라고 하였고, 한(漢) 나라 때는 양평 요양(襄平遼陽)이라고 하였고, 당(唐) 나라 때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고 하였고, 요(遼) 나라 때는 동평 학야(東平鶴野)라고 하였고 또 남평(南平)이라 하였다가 동경(東京)이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원(元) 나라 때는 요양로(遼陽路) 관할의 개(蓋)ㆍ의(懿) 두 주(州)였으며, 명(明) 나라 때에는 정료위(定遼衛)와 동녕위(東寧衛)라고 하였다. 청(淸) 나라 때에는 성경(盛京)에 예속하였다가 숭덕(崇德) 연간에 태자하(太子河) 동쪽에다 요성을 옮겨다 설치하였다. 이것을 신료성(新遼城)이라고 하는데 구성(舊城)에서는 10리 되는 지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말 위에서 벽돌을 전해 주어 하룻밤 사이에 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마상성(馬上城)이라 한다.’고 하였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 정조 8)에 와서 인구와 물산이 늘지 않아 다시 옛 요(遼)에다 성을 옮겼다. 이곳이 바로 그것이다. 성 북쪽에 흙 언덕이 구릉같이 둘러 있는데 바로 구성(舊城)의 기초이다. 성의 둘레는 20리 높이가 5, 6장(丈)인데, 밖에는 감시용 내장(內障)성가퀴가 설치되어 있다. 성 위에 넓은 길이 열려 있는데 다섯 필의 말이 떼지어 갈 수 있다. 성 밖에는 호(壕)가 있는데 태자하(太子河)의 물을 끌어 넣었다. 성의 4개의 문은 수원(綏遠)ㆍ풍락(豐樂)ㆍ순안(順安)ㆍ공극(拱極)이라고 한다. 문에는 여초(麗譙)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에도 문이 있으나 문에는 문을 달지 않았다. 성 현판에다 문 이름을 썼고 그 곁에다 만주 글자로 번역을 달았다.성안에는 도독(都督)ㆍ수위(守尉)ㆍ역승(譯丞)의 관원이 있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니 길 좌우에 늘어선 가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온갖 상품이 치쌓여 있으며 각기 깃발과 방(榜)을 세우고 있는데 군데군데 금으로 글씨를 메웠다. 옛 시에 이른바, ‘깃발 세운 정자 백이나 모여 새 시장을 열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영안사(永安寺)는 성안의 북쪽 거리에 있다. 앞뒤에 불전(佛殿)이 마련되어 있는데 불전 가운데는 100여 개의 보살이 놓여 있다. 불전 앞에 비석을 세우고 기록했는데, 이 절은 회순제(懷順帝)가 창건한 것이다. 약국이 뒤에 있는데 안에 층진 궤에 약품을 저장하고 종이를 붙여 이름을 써 붙인 것이 우리나라 약국의 예와 같다. 상에는 갑에 넣은 여러 가지 책이 있는데 그것들은 의서이다. 주인은 화편(和扁)을 아는 사람 같다.성의 서쪽 문으로 나가면 쌍교(雙橋)가 그 남쪽에 있는데 그 다리에는 중수비(重修碑)가 세워져 있다. 다리 북쪽에 관제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아주 크고 웅장하였다. 홍살문 좌우에 종과 북의 누각을 세웠는데 왼쪽의 것을 용음루(龍吟樓)라 하고, 바른쪽의 것을 호명루(虎鳴樓)라고 했다. 본전의 소상(塑像)은 거의 3장(丈) 남짓 되고 현판에는 관성인(關聖人)을 찬양한 글귀가 많다. 장비(張飛)조운(趙雲)이 동서의 곁채에 배향(配享)되어 있고 앞에는 소상 하나가 결박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역사(力士)가 칼로 겨누는데도 그 사람은 얼굴을 쳐들고 장비를 보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 같았다. 이는 촉(蜀) 나라의 장수 엄안(嚴顔)이다. 밖에 한 쌍의 장대가 세워져 있고 높이는 10장 가량인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장대 끝에 기를 꽂고 두 누각의 종과 북을 치고 반드시 향을 피운다는 것이다.순안(順安) 밖에서 비스듬히 북쪽으로 2리를 가면 백탑이 치솟아 있다. 탑은 8각에 13층으로 높이가 36장, 둘레가 17, 8칸이다. 탑면에 전에 파넣었던 동비(銅碑)에 기록된 것이 그러하다. 그 밑에 돌로 네모나게 쌓았는데 네 모퉁이가 똑같이 가지런하고 평지보다 한 자 남짓 높다. 아래에 일곱 층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탑신(塔身)을 앉혀 놓았는데, 여덟 면에는 면마다 나한(羅漢) 하나와 신장(神將) 둘이 새겨져 있어 위아래를 모두 합하면 104가 된다. 또 중간 층에 나무 서까래를 얹어서 소슬처마를 만들었는데, 한 면이 각기 35개 씩의 서까래이고 한 면마다 쇠 풍경을 달아 놓아 바람이 한번 그것들을 흔들면 동댕거리는 소리가 구름 밖까지 어지럽게 흩어져 나간다. 꼭대기에는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줄기에 마디를 지워 5층으로 만들었고 철사로 매어 놓았다. 탑 위 넷째 층에 ‘벽한유광(碧漢流光)’ 네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는데 날이 맑을 때 천리경(千里鏡 : 망원경)으로 볼 것 같으면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곁에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구문석(龜文石)이다. 귀부(龜趺)로 받치고 있는데 반들거리고 글자의 흔적이 없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당 나라 군대가 원정할 때 태종(太宗)이 울지공(尉遲恭)에게 명해 이것을 세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성량(李成樑)이 만든 것이다.’고도 하고, 또 ‘동한(東漢) 이래로 이미 이 탑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다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화표주(華表柱)라고 하는 것은 더욱 망녕된 말이다. 옛사람이 전하는 기록에는 ‘화표(華表)로 성문의 기둥을 만들어, 전에는 성안의 한 민가에 그것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장소를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탑 뒤에 큰 전각(殿閣)이 있는데 부처 3구를 모시고 있다. 어떤 사람은 광우사(廣祐寺)라 부르기도 한다. 절 마당에 철기(鐵器)가 있는데 그 형상은 말구유 같아 10여 섬이 들어갈 것 같다. 절 안의 옛 물건이다.태자하(太子河)는 일명은 연수(衍水)다. 역사책에 ‘연 태자 단(燕太子丹)이 진(秦)을 피해 연수로 들어갔다.’고 한 것이 이곳이다.

  • 트인 산이 강 옆으로 치솟아 있는 교통의 요충지, 임진강에 도착하다 1803년 10월 23일, 나(이해응)와 일행은 임진강에 당도했다. 임진은 파주(坡州)의 교통 요충지이다. 산이 트여 강에 다가서서 양쪽이 급히 치솟아 있다. 산을 따라 성이 있는데 성문을 진서문(鎭西門)이라고 한다. 성문 안에는 별장(別將)의 관아가 있다. 강 동쪽엔 석벽이 물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을 적벽(赤壁)이라고 한다. 적벽 동쪽에는 또 내소정(來蘇亭)이 있다. 임진을 지나니 동파역(東坡驛)이 있고, 또 10리를 가서 장단의 임단관(臨湍館)에 당도했는데 임단관 남쪽에는 월륙시(月六市)가 열렸다. 향사당(鄕射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 과거시험을 앞둔 아들과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다 - 입시생을 둔 부모의 마음 1612년 4월 6일 저녁 무렵이었다. 김창남(金昌男)이 감시[監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시험]를 보러 봉화로 가는 길에 김택룡의 집에 들렀다. 택룡은 자신의 생질 정득과 아들 대생, 그리고 사위 김광찬에게 보내는 편지를 각각 써서 김창남에게 주며, 편지를 전해주길 부탁했다. 그들도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봉화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일 뒤 4월 9일, 사위 김광찬의 노비가 봉화 시험장으로부터 와서 사위와 딸의 편지를 택룡에게 전해주었다. 택룡은 돌아가는 노비 편에 술과 안주거리를 싸서 답장과 함께 보내주었다. 그리고 소식이 감감한 생질 정득과 아들 대생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틀이 지났다. 4월 11일 이 날은 봉화에서 행해지는 과거시험의 마지막 날[종장(終場)]이다. 백운동 서원의 하인이 와서 택룡에게 고하기를, 김행득(金幸得)이 봉화의 시험장으로부터 돌아와 택룡을 만나 뵙고 시험에 대해 물어보고자 한다고 했다. 김행득에게 듣자하니, 봉화 시험장의 시관(試官)은 송광조(宋光祚)와 성주목사 조희보(趙希輔) 그리고 선산부사 한회(韓懷)가 담당했으며, 녹명관(錄名官)은 예안현감이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의 문제 가운데 시제(詩題)는 ‘차마 영원히 헤어지지 못하겠네[不忍便永訣]’였고, 부제(賦題)는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다[尋屍還鄕]’였다고 한다. 김행득은 또 택룡의 아들 대생을 과거 시험장에서 보았다고 택룡에게 말해주었다. 다음 날, 택룡의 아들 대생이 봉화에서 돌아왔다. 생질 정득은 편지만 보내고 오지 않았지만, 택룡은 그의 편지를 읽으며 과거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택룡은 아들 대생이와 서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택룡은 대화 도중 문득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생이의 얼굴이 부쩍 피곤해 보이는 데다 며칠 못 본 새 비쩍 말라있었다. 아마도 돌아오는 길에 예안 오천의 누이에게 들러 하어 민물생선[하어(河魚)]을 얻어 오느라 더욱 힘들었던 탓인 듯 했다. 4월 13일, 저녁 무렵 택룡은 봉화 현감에게 편지를 썼다. 또 시관(試官)으로 참여했던 성주 목사 조희보와 선산부사 한회에게도 편지를 쓰고, 아들 대생에게 봉투를 만들어 봉하도록 시켰다. 이틀 뒤, 15일 저녁 봉화로 보냈던 택룡의 노비 명금이가 돌아와 성주목사, 선산부사, 봉화현감 모두에게 답장을 받았다. 더불어 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낙폭(落幅)] 예닐곱 장과 합격자 명단[방목(榜目)]도 함께 받았다. 택룡은 명단을 살펴보고, 자신의 생질 정득은 낙방했지만 예안[선성(宣城)] 지역 사람 7~8명 정도가 합격했음을 알았다. 택룡이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경건의 사위 채무, 그리고 도촌의 이광계(李光啓)와 이광전(李光前) 등이었다. 택룡은 김경건에게 그 사위의 합격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이 받은 합격자 명단을 보냈다.

오늘의 일기

깊은 산 속, 부역에 시달려 숨어든 백성과 한가로이 노니는 선비들이 만나다

http://www.ugyo.net/yk/ilki/imageViewer/imageViewer.jsp?B_SUJI_ID=KSAC_M_D00500345&B_BOOK_ID=KSAC_T_D00500345_001&B_KWON_ID=&B_STYLE_ID=&B_KISA_ID= 조식(曹植), 유두류록(遊頭流錄) 1558-04-22 ~

1558년 4월 22일, 지리산 유람 중인 조식은 쌍계사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의 깊숙한 곳에 있어,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산 문턱에 걸려 있다. 그래서 인가가 드물 듯 하지만 오히려 이곳까지 관청의 부역이 미쳐, 식량을 싸들고 부역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다보니 모두 흩어져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절의 승려가 조식에게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청하였는데, 부역을 조금 줄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고할 곳 없는 사정을 가엾게 여겨 헝겊에 편지를 써서 주었다. 산에 사는 승려의 형편도 이러하니 산골 백성들의 사정은 어떻겠는가. 정사는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하니 백성들이 끝내는 거처 없이 떠돌아,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이를 염려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들의 등 뒤에서 나 몰라라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 어찌 진정한 즐거움이겠는가?인숙이 벼루를 쌌던 보자기에 시 한 수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조식은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高泿雷霆鬪(고은뇌정투) 높은 풍랑은 우레와 벼락이 다투는 듯하고 神峰日月磨(신봉일월마) 신령스런 봉우리 해와 달이 연마한 듯 高談與神宇(고담여신우) 신응사에서 함께 한 고담준론에서 所得果如何(소득과여하)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강이가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溪湧千層雲(계용천층운) 시내엔 천 층 구름과 같은 물기운이 솟구치고, 林開萬丈靑(임개만장청) 숲에는 만 길 푸른 숲이 우거졌네. 汪洋神用活(왕양신용활) 넘실대는 시내에 정신이 활기를 찾고, 卓立儼儀刑(탁립엄의형) 우뚝 선 봉우리에 몸가짐이 반듯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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