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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순간의 선택이 영웅을 만든다!

꽤 많은 작가들이 ‘한국 히어로물은 안 먹힌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무슨 무슨 맨> 종류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어른들이 즐겨 보았거나 보고 있는 한국의 히어로물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일단 히어로물은 할리우드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사실 단순한 선입견이라기엔, 할리우드의 히어로물 쏠림 현상은 너무도 분명하다. 특히 제작비의 비중에 있어서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잘 만든 SF물로 일컬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 제작비가 110억 원 정도인 데 비해, <스파이더맨3> 제작비는 우리 돈으로 3,500억이 넘는다. 한국영화 1년 제작비보다 많다니....


영화 <괴물> 2006 포스터                                        영화 <스파이더맨3> 2007 포스터


할리우드가 이렇게 히어로물에 자본을 쏟아붓는 이유는 간단하다. 흥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상황이 이러하니, 그들의 히어로물에 눈높이가 맞춰진 우리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한국 히어로물을 만든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 2019 포스터


한국형 히어로물이 잘 먹히지 않는 또 다른 이유를 혹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으로 설명한다. 사실 ‘다문화’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만큼, 우리나라는 ‘단일문화’를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다. 사실 사람들의 생김새도 코가 높냐 낮냐 눈이 조금 더 찢어졌냐 덜 찢어졌냐, 피부가 거무튀튀하냐 누르딩딩하냐, 머리털이 곱실거리냐 찍 뻗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누르스름한 피부로 비슷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병’이라 부를 정도로.

그런데 기실 모든 문화는 다른 것이 정상이다. 나와 자식이 다르고, 남편과 아내가 다르고, 하물며 쌍둥이도 다르다, 달라야 한다. 같은 게 비정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선 너와 내가 같아야 하고, 우리는 남이 아니어야 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일 수밖에 없다. 그냥 “아, 다르구나.”가 되지 않는다. “왜 달라야 하지?” 의문을 갖는다. 튀는 존재는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다. 할리우드처럼 유전자 돌연변이들이 모여 영웅놀음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라면 그들은 한 곳에 몰아넣어져 흠씬 두들겨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에는 잘난 척하는 자들은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유독 크다는 것이다.

글쎄.... 이 말들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서구의 히어로와 한국의 그것에 분명 다른 지점이 존재하는 건 확실하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차이점은 출발선이다.

서구의 히어로가 플러스( )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네 히어로들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서구 히어로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우월하거나 혹은 평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우월한 능력으로 활약하고 칭송받고 발전한다. 그러다 크나큰 장애물이나 거대 악과 직면해 그들의 우월성에 손상을 입고 위축된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그들의 능력이 보통 사람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휘하는 것이 인격적인 장점, 인간관계의 소중함이다. 인내와 사랑, 우정 같은 것들을 화력으로 악인 혹은 위기를 훌륭히 극복해내고 찬란히 빛나는 성공을 이루어내는 것이 서구의 히어로들이다.

이에 반해 우리의 히어로들은 대부분 열등한 존재로 시작한다. 천민이거나 서얼이거나 흉한 모습이거나 누군가에게 핍박당해 죽을 지경이거나. 우리 시청자들은 주인공에 측은지심이 동하지 않으면 도무지 공감하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평소에도 어딘가 억울하고 섭섭한 게 많은 모양이다. 그냥 발랄하고 쿨한 평범한 고등학생의 손에 어느 날 가시가 돋치고 끈끈이가 뿜어져 나오는 건, 재미는 있는데 그렇다고 ‘스파이더맨’의 탄생이 내 마음에 쑤욱 하고 들어올 상황은 아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하다 돌아가시고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형은 일제 경찰들에게 고문받아 바보가 되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일본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만 늘 음해를 당하고... 이 정도는 돼야 ‘각시탈’의 탄생이 내 마음에 쑤욱 들어온다. 서양의 히어로가 ‘특수성’과 ‘우월성’으로 흥행한다면 우리네 히어로는 ‘동질성’과 ‘보편성’으로 점수를 딴다고나 할까.


KBS드라마 <각시탈> 2012 포스터


2012년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 <각시탈>에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주인공이 각시탈을 체포하기 위해 시장에서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사내의 멱살을 잡고 “각시탈이 누구야! 넌 알지?” 소리치는 장면이 있다. 이에 대한 사내의 대답은 한국형 히어로에 대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내고 있다.


KBS드라마 <각시탈> 2012 장면


“시장 바닥에 가면 말이다, 왜놈 똥개 새끼한테 짓밟히는 이씨 김씨 박씨가 있거든. 그게 각시탈이야.“

그렇다. 각시탈은 너인 동시에 나다. 한국의 히어로는 ‘나’란 존재가 필히 감정이입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박씨만 공감해선 안 된다. 이씨도 김씨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너무 잘난 존재도, 너무 고결해 보이는 존재도 우리는 별로다.

MBC의 <무한도전>은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잠시 동안의 파업기간을 제외하면) 햇수로 무려 13년이나 롱런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무한도전이 내세운 기치는 ‘평균 이하 여섯 남자들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출연자들의 면면도 친근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늘 코미디배우 혹은 개그맨들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 믿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똑똑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자라고 허점이 많은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왔었다. 비록 예능프로그램이지만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대부분 작은 영웅일지 모른다. 그들의 성공은 물론이고, 실패와 성장과정에 대중들은 울고 웃었고 사랑을 보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바보 어벤저스’ 콘셉트로 대중문화를 제패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이를 리메이크한 드라마 <왕이 된 남자>에 더욱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진정 백성을 위하는 왕다운 왕은 사실 천한 광대 출신일 수밖에 없다는.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포스터                  TVN드라마<왕이 된 남자> 2019 대표 이미지          


한편으론 울적하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묻고 싶다.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잘난 사람, 고결한 영웅을 원치 않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에도 분명 원인이 있을 터. 무엇이 한국사회를 그렇게 만든 걸까.

지금은 모두 20대가 되었지만, 두 딸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 역시 아이들과의 관계가 힘들었고, 내 딸과 같은 수많은 청소년들이 무서웠었다. 아들만 둘 가진 내 친구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그저 파충류의 뇌를 가진 존재일 뿐이라며,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조언까지 했었다.

아이들이 친구와 통화하는 것을 슬쩍 듣노라면, 욕이 섞여 있는 건 물론이고, 그중에 부모와 선생님에 대한 욕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렇다 치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라곤 한 푼 어치도 없구나, 한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딸과 친구의 대화를 듣다 뭔가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어, 김XX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거야.”

어라? ‘께서’, ‘~시었다’라는 존칭 조사와 어미라? 저 아이들은 모든 선생님들을 비하하고 존경하지 않는 무뢰한이 아니었던가? 통화가 끝난 아이에게 가서 어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냐 물었다. 아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며, 사회 분야에 대한 지식과 역사에 대한 관점 역시 훌륭해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고. 물론 꼬박꼬박 극존칭을 써가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사춘기 아이들은 무차별적으로 질풍노도의 길을 내달리는 파충류가 아니었던 거다. 그들은 누구보다 고상한 도덕적 기준과 예리한 비판의식을 지녔을 뿐, 훌륭한 것에 대해선 훌륭하다 인정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선 아름답다고 감탄할 줄 안다. 오히려 세상의 거짓과 수준 낮음에 대한 절망을 분노로 표출할 수밖에 없음을,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할 뿐.

어쩌면 우리가 우월한 히어로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우월함’이 ‘도덕성’과 연결되는 좋은 경험을 많이 갖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백마 탄 초인 기다리지 말고 그냥 우리가 작은 영웅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런 작은 영웅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간적 결함과 아픔, 때로는 도덕적인 문제까지 가진 인물이 조금씩 성장해 가며 자신이 가진 장점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 이야기 말이다.

<대장금>은 약점이 거의 없는 여성이었지만 <마녀의 법정>의 마이듬은 속물에 성격까지 까칠한 여성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세고 정의감이 남달랐던 <홍길동>이 있는가 하면, 남의 돈 먹는 데 이골이 난 <김과장> 같은 이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그들 모두 약자를 돕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웅됨은 그들의 타고난 ‘자질’에 있는 게 아니라 ‘선택’에 있었음을 말하고 싶다.


MBC 드라마 ‘대장금’ 2003~2004                                 KBS 드라마 ‘마녀의 법정’ 2017




이 돈을 먹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진실을 밝힐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위협에 웃을 것인가 화를 낼 것인가.
귀찮은 저 인간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범인(凡人)과 영웅은 선택의 차이다. 낙지를 먹을 것인가 피자를 먹을 것인가 같은 행복한 선택 말고, 어쩐지 거시기한 선택 때문에 고민이 된다면, 오늘만큼은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선택해보자.




글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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