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원익(1547, 명종 2∼1634, 인조 12)에 대해 쓰면서 ‘시대를 나누는 인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꼭 이원익만 그런 인물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쟁쟁한 인물이 많이 있지만, 유독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공정왕(恭定王 정종)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현손.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보물 1435호 〈이원익 영정〉(출처: 충현박물관)
오리 이원익 하면, 대동법이 떠오른다. 임진왜란 이후, 가장 급선무는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라 재정도 유지되고 국방도 가능했다. 그 핵심에 공납제 개혁이 있었다. 이원익과 대동법의 인연은 율곡 이이에 닿아 있을 것이다. 1574년(선조 7) 율곡은 황해 감사로 나갔는데, 도내 행정의 폐해를 바로잡으려고 이원익을 발탁해 정무를 맡겼다. 둘은 생원시 동방이기도 했다. 종사관이었던 이원익이 만든 황해도 군적(軍籍)이 전국의 군적 중에서 가장 정확했다고 한다. 대동법, 정확히 말하면 경기 선혜법은 율곡이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바꾸자고 주장했던 취지를 이원익이 이어받은 셈이다.
이원익은 1687년(선조 20) 남들이 꺼리는 평안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 안주는 국경 요충지였지만 잇따른 재해와 기근이 들어 피폐해졌다. 조정에서는 명망 있는 문신을 선임하여 지방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는 단기(單騎)로 부임했다. 조곡(糶穀) 1만 석을 감사(監司)에게 청하여 백성들에게 종자를 주어 경작을 권하였더니 가을에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고 한다. 원래 안주 사람들은 누에치기에 힘쓰지 않았다. 오리가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했더니, 사람들이 이 뽕나무들을 ‘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고 불렀다. 늘 근면하고 청렴했으니, 나중에 정승의 명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숙종어제잠직도(肅宗御題蠶織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실록에는 이원익에 대한 사관(史官)들의 촌평 몇 가지가 남아 있다. 둘 다 영의정이었을 때의 평가이다. ①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론(和議論)을 주장했다고 비난받자, 이원익이 그것은 매도라고 변론했을 때의 일이니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②는 일반적으로 이원익을 평가하는 사관의 말이다.
① 이원익은 젊었을 때는 물욕이 없어 세상이 되어가는 대로 따라 움직여 별달리 건의하는 일이 없다가 임진년 봄에 이르러 평안도 백성을 진무(鎭撫)하여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았다. 다만 아깝게도 국량이 좁아 조정에서의 의논이 공정하지 않았으며, 한갓 류성룡을 옹호할 뿐이었다.(『선조실록』, 32년 2월 6일)
② 이원익은 본래 강직하고 명철하다고 일컬어진 사람으로 처신을 근신하게 하고 국사에 심력을 다하였으니 어진 재상이라 하겠다.(『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4월 1일)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이 편찬을 주도하면서 인물과 사실에 대한 왜곡이 많아 인조~효종 연간에 수정되었다.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아마도 그 왜곡은 이원익도 피하지 못했던 듯하다.
『선조수정실록』(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광해군 즉위와 함께 유영경(柳永慶)이 쫓겨나고 뒤를 이어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62세였다. 이원익은 이미 1595년(선조 28) 우의정에 올랐고, 1598년 좌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중에 원수부(元帥府)를 겸하여 군사를 지휘하고, 도제찰사를 맡아 민심을 안정시켰던 그의 공로는 당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가 영의정을 맡았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광해군조차 기대가 컸다. “경은 왕실 친척인 대신(大臣)이니, 사생(死生),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 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5월 7일,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이원익의 발의가 있었다.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또는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경기[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별도로 하나의 관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둬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서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차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해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公事) 비용으로 삼게 하십시오.”
선혜청 터 표지석(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했다. 그래야 나라 재정도 유지되고 국방도 가능했다. 그 핵심에 공납제 개혁이 있었다. 광해군은 2월 2일에 즉위했다. 선혜청 설치는 5월 7일. 선조의 졸곡제는 6월 25일에 있었다. 선조 후반에 이미 대동법 실시에 대한 논의가 끝났던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부터 내내 현안은 임해군 역모사건의 처리였다.
아무튼 선혜청 도제조는 영의정 이원익이었고, 부제조인 호조판서는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0, 명종 15~1617, 광해군 9)이었다. 그러나 방납배들의 교란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2월 19일에 좌의정에 임명된 기자헌(奇自獻)이 방납 커넥션의 핵심이었다. 왕실도 방납 주체였다. 반동이 거세었다.
논의 끝에 1609년 가을까지 가까스로 대동법 혁파가 유보되었다. 김상용(金尙容)은 경기도민의 연명(連名) 정장(呈狀)을 통하여 대동법을 계속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고, 1610년(광해군 2) 9월,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조정 신하들도 여러 번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요구하였다. 백성들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공량(柳公亮) 등 북인들의 대동법 반대 의견이 제출되었다. 광해군도 거기에 동조했다. 광해군은 기존의 공납제, 즉 임토작공(任土作貢 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배정한다)는 관례에 기초한 현물납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으로 생각하였다. 이래서는 개혁이 불가능했다. 조정에서 힘을 합쳐 추진해도 지난한 정책인데, 임금부터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원익은 사직서를 내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경기 선혜법조차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지금 만약 단지 반년만 시험해 보고 곧장 그만둘 경우 민간의 부역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아 각사(各司)의 모리배가 뒤섞어서 징수할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혁파를 반대하여 가까스로 유예시켰으나, 이미 이원익은 대동법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선혜청 제조를 맡고 있던 황신은 대동법의 유야무야와 호조 재정 업무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광해군 3년 3월에 호조판서를 사직했으나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곧 황신은 궁궐 공사에 진력하던 이충(李沖)에게 호조판서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대동법은 흐지부지되어 갔다.
이원익의 처신은 대동법과 함께 임해군의 옥사와 맞물려 있었다. 임해군의 옥사는 선조 승하 보름 만에 임해군이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이원익, 이항복(李恒福)·심희수(沈喜壽) 등은 모두 임해군에 대한 형제로서의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시론(時論)에 배척당하여 집에 있으면서 관직에 나오지 않았다. 시론이란 홍문관 등을 장악한 정인홍, 이이첨 등이 주도한 여론이었다. 이들은 임해군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로서의 은혜를 베풀라는 이원익을 논핵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의 우려는 더 깊은 데 있었다. 바로 광해군의 무사안일이었다. 광해군 3년, 오랜만에 열린 어느 날 경연에서 그는 광해군에게 이렇게 간청하였다.
“선조에서는 경연뿐만 아니라 공사(公事)에 대해서도 부지런히 재결하였는데, 비록 밤이 깊은 때라도 출납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시급한 일은 의당 그럴 것이겠지만 급하지 않은 일도 입계하면 곧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사가 지체되고 있으니, 이것은 비록 상께서 건강이 약해서 그렇기는 하지만, 근심하고 걱정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쌓이고 또 쌓이면 재결할 때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광해군일기』[중초본], 3년 10월 14일)
이후로 이원익은 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이름만 걸고 있던 영의정조차 내려놓은 뒤, 그는 두문불출하였다. 대북(大北) 정권의 무고로 일어난 계축옥사의 와중에서도 칩거만 거듭하였다. 하긴 조정에 나온들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던 그가 폐모론이 일자 차자를 올렸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장차 대비(大妃)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다.’ 합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과 윤리가 지극히 크고 중합니다.”(『광해군일기』[중초본], 7년 2월 5일)
상소가 올라가자 광해군도 당황하였다. “내가 평소 완평(完平)을 몹시도 후하게 대접하는데, 완평이 까닭 없이 차자를 올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니 너무 놀랍다.” 삼사(三司)의 탄핵이 빗발쳤다. 결국 이원익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생원 홍무적(洪茂績), 정택뢰(鄭澤雷) 같은 학자들이 이원익의 충정을 변론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찬바람이 돌았다. 6월, 이원익을 홍천(洪川)에 부처(付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12월, 진사 윤선도(尹善道)는 상소를 올려 ‘이원익은 우리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라고 했다. 윤선도의 말 이전부터 이원익은 ‘조선의 사마광’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다.
홍천 유배 시절에 지었던 〈봄비[春雨]〉라는 시가 전해진다. 봄비가 내리자 기뻐 덩실덩실 노래하고 춤추는 백성들을 보면서도 그들의 고달픔을 함께 보았던 오리 이원익. 그 마음을 닮고 싶어 덩달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지난해 봄 가뭄에 보리 없어 걱정했거늘 去年春旱憂無麥
올해는 응당 크게 풍년 들 것 알겠도다 今歲應知大有年
단 비 아침에 내려 이랑 채우며 흐르니 甘雨朝來流滿陌
고달팠던 백성 덩실덩실 다투어 김 매네 疲氓歌舞竸鋤田
1619년(광해군 11) 5월, 이원익은 유배에서 풀려나 금천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인조반정을 맞고, 1623년 영의정으로 복귀하였다. 그도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삼도(三道) 대동청을 설치하여 대동법을 다시 추진하였다. 이는 흉년, 두 차례의 전란으로 미루어졌지만, 차츰 대동법은 대세가 되어갔다. 이렇게 그의 삶 속에는 ‘민생’, ‘나라’가 함께 하였다. 88세로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그의 말년을 이렇게 기억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0호 관감당(觀感堂)(출처: 충현박물관) 1630년(인조 8) 인조가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으로 관감당의 뜻은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신하와 백성들이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이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12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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