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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의 가을날 지리산 유람

예나 지금이나 단풍의 명소


요즘 가을 단풍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고 있다. 지리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 중의 하나이다. 그럼 조선 시대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많이 갔을까?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았다. 산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리산은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필자가 분석한 63편의 조선 사대부 유람록 중에서 가을철(음력 7월~9월)이 33편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 여름철(4월~6월), 봄철(1월~3월), 겨울철(10~12월) 순이었다. 월별로도 역시 가을철인 음력 8월이 23편으로 가장 많았다. 사대부들도 역시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에다가 단풍까지 아름다운 가을철에 가장 많이 지리산을 찾은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지리산의 가을을 온몸으로 맞다


영남 사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42세 때인 1472년(성종 3년) 8월 14일(이하 음력)부터 8월 18일 사이에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당시 김종직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공무로 바빠 바로 앞에 있는 지리산을 눈으로만 바라보고 오르지 못함을 늘 한탄하다가 추석을 이용하여 지리산에 다녀왔다. 함양을 출발하여 엄천강과 화암사(오봉), 쑥밭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통천문과 영신봉, 백무동, 등구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도 등산가이드 비슷한 책들이 있었는데, 김종직은 등산을 준비하면서 『수친서(壽親書)』라는 책을 보고 필요한 장비를 챙겼다. 그는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지나면서 “만약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찰벼 삼 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요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모델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사에서 잠을 잤는데, 찬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두꺼운 솜이불까지 덮었다. 하인들은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다리를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때는 추석 즈음으로 초가을이었지만, 높은 산꼭대기라서 밤에는 바람도 심하고 엄청 추웠던 것이다. 그는 세석평전에서 조정에 공물로 바치기 위해 산 채로 매를 잡는 매잡이 초막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과 노고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지리산 세석평전(출처: 지리산국립공원 홈페이지)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지리산의 일출


자주(18세, 23세, 30세 때) 지리산에 올랐던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은 44세 때인 1586년(선조 19)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또다시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는 남원 운봉을 출발하여, 백장사와 군자사, 백무동과 하동바위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그는 친구 오훈중이 “인간 세상에 30년 동안이나 살면서, 천상의 세계에 날아오르지 못했네. 번뇌 많은 이 세상에 살다가 초라한 시골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속세에서 벗어나 허공에서 손을 흔들며, 뜬구름을 밟고 천지사방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조물주와 더불어 넓고 넓은 곳을 유람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부탁해서 지리산 유람에 나서게 되었다.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양대박이 1586년(선조 13년)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두류산기행록』 중 일출 감상에 대한 기록(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양대박은 풍류가 넘쳤던 모양이다. 유람 길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 부르는 기생 애춘, 아쟁 타는 수개, 피리 부는 생이 등을 데리고 갔다. 그는 백장사에 쉬면서 차와 과일을 대접받고, 애춘이 가져온 서리 맞은 복숭아도 먹고, 어린 종을 시켜 담장 밖에 무르익은 돌배를 마구 털게 하고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지암 스님으로부터는 가을 산채나물이 푸짐한 맛깔난 저녁상도 받았다. 양대박 일행은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기생들과 악공들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고 피리를 불게 하고는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질펀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지리산에 올라갈 때는 일행 모두 몸이 허약해서 그 꼴이 가관이었다. 양대박과 오춘간은 동행한 승려 일원과 각련으로 하여금 번갈아 앞에서 잡아당기게 했고, 양길보와 양광로는 하인들의 등에 업혀 올라갔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눈감아 줄 수 없는 민폐 등산객들이다. 그는 천왕봉 정상에 있었던 성모사(聖母祠)에서 시렁 위에 놓여 있는 성모상을 보았는데, 그 성모상이 지금은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이 사람들도 김종직 일행처럼 성모사에서 자면서 추운 날씨에 엄청 떨어야 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유람(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양대박은 다음날 새벽, 천왕봉 일출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참 동안 앉아 기다리니 밝은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비치자 동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려 하자 붉은 구름이 만 리에 뻗치고 서광이 천 길이나 드리웠다. 해가 불끈 솟아오르니 여섯 마리 용이 떠받들고 나오는 듯하였다.” 이렇게 멋진 천왕봉 일출을 감상한 것을 보면, 아마도 양대박은 전생에 삼대에 걸쳐서 덕을 쌓았나 보다. 이들은 천왕봉에서 제석당으로 내려오면서 철 이른 눈을 만나 옷이 다 젖어서, 제석당에 들어가 불을 지펴 옷을 말리기도 했다. 군자사에 묵을 때는 청명한 달이 봉우리에 떠올라 창가에 환히 비추어, 일행의 마음이 매우 쓸쓸해져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양대박은 이 유람에 대해 지리산 단풍을 감상하고 천왕봉 일출을 본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 시를 주고받을 수 있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웃음을 선사해주는 친구들과 함께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풍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던 박여량(1554~1611)은 57세 때인 1610년(광해 2년) 9월 2일부터 9월 8일까지 지리산에 다녀왔다. 그는 함양을 출발하여 오봉, 쑥밭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고, 제석당과 백무동, 군자사, 금대암, 용유담, 엄천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박여량 일행도 피리꾼 두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말머리에서 피리를 불게 하고 혜금(嵆琴, 거문고의 일종)도 타게 했다. 그는 산에 오르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산수유람 또한 지식을 넓히는 일이라고 했다.

일행은 군자사 앞에 흐르는 시내가 물길이 험악하여 말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산골 마을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넜으며, 군자사에서는 승려가 산에서 나는 가을 과일과 오미자차를 대접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별감 박대일이 기생과 악공들을 데리고 와서 술판을 벌여 모두 춤추고 놀기도 했다. 이들이 백무동 입구에 있는 실덕·마천·궁항 마을을 지날 때,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었고 감이 한창 무르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골짜기에는 지금도 감나무가 많아 가을에는 붉게 익어가는 감들이 볼 만하다. 박여량 일행은 지리산을 올라갈 때, 피로를 풀기 위해 두 하인에게 단풍나무를 꺾어들고 앞서가며 춤을 추게 하고, 악공들에게는 계속 피리를 불게 했다. 지금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풍류이다.


쌍계사 계곡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이들은 천왕봉에 있는 성모사에서 저녁밥을 해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자주 방문하는 사대부들의 접대에 화가 난 성모사 무녀가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솥을 숨기고 물통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버려서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천왕당(성모사)에서는 한두 순배 잔을 돌리면서 악공들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승려와 하인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춤을 추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당시 승려의 신분이 노비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행은 노란색과 흰색 국화꽃을 구경하기 위해 밤에 횃불을 들고 상류암 서쪽에 있는 작은 암자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국화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고 꽃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모습을 감상하기도 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하인들에게 지천에 널린 오미자와 산포도를 따오게 해서 먹기도 했다.


승려들과 함께 유람하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가마꾼들의 고통


요즘은 여행할 때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지리산을 유람할 때 말, 노새, 나귀, 가마, 배 등을 주로 이용했고, 너무 가파른 산길이나 계곡을 건널 때는 걸어서 다녔다. 지리산 안에서는 승려들이 들거나 메고 다니는 가마를 주로 타고 다녔는데, 이런 가마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16년(광해군 8)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은 불일암에 올라갈 때, 쌍계사 젊은 승려 10여 명이 가마 4대를 가지고 대기했다. 1651년(효종 2)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이 대성골에서 거림골로 넘어갈 때는 쌍계사와 내원암 승려들이 가마 임무를 교대했다. 1680년(숙종 6) 순창군수 송광연(宋光淵, 1638~1695)이 유람할 때는 군자사 승려들이 가마를 가지고 천왕봉에 미리 올라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나아가 1807년(순조 7) 경상도 관찰사 윤광안(尹光顔, 1757~1815)은 함양 군수와 진주 목사(晉州 牧使), 산청 현감(山淸 縣監)을 동반하여 가마를 타고 천왕봉 정상까지 올라가기 위해, 1만여 명의 관내 군사를 동원하여 의신사-대성골-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백무동까지 가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내면서 큰 민폐를 끼쳤다. 하동-화개 구간에서는 주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배 위에서 악공들이나 기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유람을 즐겼다. 하익범(河益範, 1767~1813)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가을 농사철에 들판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민초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 지방 관료들이 기생과 악공 등 수행원을 수백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풍악을 울리고 시끌벅적하게 유람 행차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하익범의 『유두류록』의 관련 기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산행, 심신수양을 위한 하나의 방법


가을철에 산을 찾아가서 즐기는 산수기행은 사대부에게는 호연지기를 기르고 심신수양을 위한 하나의 필수 덕목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어수선한 속세를 떠나, 그들이 이상향으로 여겼던 청학동을 찾아 헤매거나, 별유천지 비인간의 신선 세계를 체험하기도 했다. 어떤 선비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민초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거나, 은자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거나,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거나, 자연의 위대함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왜소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과 함께 지리산에 한번 가보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삼았고,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그 여행 경험을 유람록이나 유람기로 남겨, 우리 같은 후세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다시 산행의 계절, 가을철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지리산에 갈 때, 수백 년 전에 우리 앞에 지나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다니는 것도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다.




집필자 소개

고태규
호주 시드니산업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에서 레저관광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경영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연구 관심 분야는 여행의 역사, 여행이 인류문명에 끼친 영향 등이다. 저서로는 『여행과 문명』, 『실크로드 문명기행』 1~2, 『현대레저론』 등 20여 권이 있다.
“가을 풍경에 술 생각이 간절해지다”

추수한 작물을 타작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희문, 쇄미록, 1599-08-27

1599년 8월 27일, 오늘 오희문은 계집종 중금의 밭보리를 타작하는 일로 인아와 덕노를 데리고 옥동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하루 종일 종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늦은 오후께 아들 윤해와 함께 걸어서 말지산 뒷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는 계집종들이 거둔 보리를 묶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인아의 밭에서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인아와 함께 종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한참 일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이켜 사방을 바라보니 가을산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단풍이 들어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어 술 마시기에 안성맞춤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 병 소주도 없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웃도 없으며, 아우도 먼 곳에 있으니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비록 간절한 술 생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높은데 오르니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이웃 사람들과 아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하며 이 정취를 즐기리라. 오희문은 이렇게 다짐하며 일을 마친 종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가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김광계, 매원일기,
1638-08-19 ~ 1638-08-22

1638년 8월 19일, 가을이 깊어 풍경도 크게 변하였다.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갔다. 김령의 집에 가니 사종질 김확(金確)의 사돈인 김응조(金應祖)가 있기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났는지, 김응조과 김확, 그리고 금발(琴撥)까지 함께 말을 타고 다정하게 강가로 유람을 하러 나갔다. 말고삐는 나란하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회까지 쳐서 술에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외유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도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와 넷째 동생 김광악(金光岳)까지 합세하여 다시금 말을 타고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으로 단풍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어 그 광경이 과연 사랑할 만 하였다. 이번에는 오담(鼇潭)에 머물러 배를 띄웠다. 배 위에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배가 강물에 흘러가면 다시금 노를 저어 올라오고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이 날은 오담과 가까이 있는 역동서원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며 질리지도 않고 날이 저물 때 까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 때 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서 또 술독을 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자니 달이 이미 고개 위로 넘어와 강물에 비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으로 가서 잤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김광악이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단사협(丹砂峽)에 갔다. 단사협의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 듯했고, 그 절벽의 둘레는 몇 리나 되니 거대한 절벽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절벽의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물 위로 단풍나무가 거꾸로 비추어 보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흘간 벗들과 함께 강을 따라 가을 풍경을 즐기자니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이 유명해질수록 승려들이 더 고달파진다고?”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7 ~ 1587-08-08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는 이 날 내영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학연(學衍)이 세수를 하고 황여일에게 문안하며 말하였다.

“이 산(내영산)은 예전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동(仙童)이라는 승려가 굴집을 만들어 살았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령으로 부임한 성(姓)이 옹(邕)이라는 사람이 은사(隱士)인 체 하면서 이곳을 찾아와 도원(桃源)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동경부윤(東京府尹)인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 선생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곧장 사령운(謝靈運)의 여행을 본받아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龜巖)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이 산과 함께 이름이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는 진달래가 볼 만하고,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답다며, 내영산을 앞 다투어 칭찬하였습니다,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중앙 관료와 지방에 부임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 이에 승려는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 승려들에게는 심한 재앙입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다”

『근사록』(출처: 문화재청)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정구(鄭逑)는 이인개(李仁愷),이인제(李仁悌) 형제와 함께 사촌(沙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곽준(郭䞭)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며칠을 즐겁게 보냈다. 정구는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가야산은 이 고을과 접해있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절경을 자랑한다네. 나는 한번 유람한 적이 있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으니 아쉽지 않은가? 이맘때라면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일 것이고, 구름이나 안개도 끼지 않는 시절이니 우리 함께 가야산을 두루 돌아보고 정상에 올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보니 마침 정인홍(鄭仁弘)도 지금 막 영천(永川)에서 군수직을 하다가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니, 마침 함께 할 좋은 때 일세”라고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하세”라며 동조해주었다 그 때부터 가야산 여행을 위한 여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의 일이었다. 정구는 쌀 한 주머니,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를 여행 중에 먹을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책을 준비했는데 「근사록(近思錄)」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만을 넣었다. 정말이지 단출한 짐이었기에 중국 송나라 때 심괄(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보다 간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이인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내일(12일)에 송사이(宋師頤)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면(金沔)으로부터도 15일쯤에 성사(城寺)라는 절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구 일행은 이날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더 빨리 만나자고 답신을 보냈다. 정구는 이인제, 곽준과 길을 늦게 떠났다. 여우 고개(狐嶺)를 넘을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가 진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이 있어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묘소 쪽으로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 지역에 도착하자 어시헌(於是軒)이라는 건물에 올라 옷고름을 느슨하게 하게 잠시 쉬었다. 경치를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달빛은 맑았고 그 빛에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바위는 더 희게 보였고 소리로만 들리는 개울물은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여행의 첫날이었지만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가슴 속이 편해지고 세상의 복잡한 일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잡고 그날의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 소장되어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에서 「운곡기(雲谷記)」 부분을 한 번 읽은 뒤에 짐 속에 넣었다. 이 날은 매우 피곤하였기에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가야산에서 옛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만운, 가야동유기, 1786-08-22 ~

1786년 중추(仲秋:음력 8월) 이만운(李萬運)과 친척, 동료들이 성주의 가야산 아래에 모였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이었다. 이만운으로서는 1772년 가야산을 유람한 이래 15년 만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감회가 깊었다.

8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말을 타고 회연(檜淵)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이성민(李聖民), 정휘조(鄭輝祖)와 함께 길을 나서서 환선도(喚仙島)에서 밥을 먹고서 날이 저물어 쌍계(雙溪)에서 묶었다. 밥을 먹은 뒤에 정구(鄭逑)가 머물던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구가 모은 책들이 소장된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었다. 정구의 지팡이와 신발, 책을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무흘정사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인사에 들러 하루를 머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만운은 15년 전의 여행 경험을 떠올렸다. 풍경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었다. 그의 인상에 남았던 멋진 폭포의 전경은 물살에 깎여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만운은 이를 아쉬워했다. 다만 무흘정사는 몇 년 사이에 위치를 옮겼는데 도리어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전의 자태를 잃지 않은 듯 했다. 월연(月淵)이라는 연못의 경치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경치였으며 해인사의 단풍의 붉은 비단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좋은 벗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이만운은 이 즐거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한 사람들의 성과 자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가졌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시절,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이 종이를 펴보고 위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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