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을 단풍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고 있다. 지리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 중의 하나이다. 그럼 조선 시대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많이 갔을까?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았다. 산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리산은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필자가 분석한 63편의 조선 사대부 유람록 중에서 가을철(음력 7월~9월)이 33편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 여름철(4월~6월), 봄철(1월~3월), 겨울철(10~12월) 순이었다. 월별로도 역시 가을철인 음력 8월이 23편으로 가장 많았다. 사대부들도 역시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에다가 단풍까지 아름다운 가을철에 가장 많이 지리산을 찾은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영남 사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42세 때인 1472년(성종 3년) 8월 14일(이하 음력)부터 8월 18일 사이에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당시 김종직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공무로 바빠 바로 앞에 있는 지리산을 눈으로만 바라보고 오르지 못함을 늘 한탄하다가 추석을 이용하여 지리산에 다녀왔다. 함양을 출발하여 엄천강과 화암사(오봉), 쑥밭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통천문과 영신봉, 백무동, 등구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도 등산가이드 비슷한 책들이 있었는데, 김종직은 등산을 준비하면서 『수친서(壽親書)』라는 책을 보고 필요한 장비를 챙겼다. 그는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지나면서 “만약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찰벼 삼 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요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모델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사에서 잠을 잤는데, 찬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두꺼운 솜이불까지 덮었다. 하인들은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다리를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때는 추석 즈음으로 초가을이었지만, 높은 산꼭대기라서 밤에는 바람도 심하고 엄청 추웠던 것이다. 그는 세석평전에서 조정에 공물로 바치기 위해 산 채로 매를 잡는 매잡이 초막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과 노고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지리산 세석평전(출처: 지리산국립공원 홈페이지)
자주(18세, 23세, 30세 때) 지리산에 올랐던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은 44세 때인 1586년(선조 19)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또다시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는 남원 운봉을 출발하여, 백장사와 군자사, 백무동과 하동바위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그는 친구 오훈중이 “인간 세상에 30년 동안이나 살면서, 천상의 세계에 날아오르지 못했네. 번뇌 많은 이 세상에 살다가 초라한 시골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어떻게 이 속세에서 벗어나 허공에서 손을 흔들며, 뜬구름을 밟고 천지사방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조물주와 더불어 넓고 넓은 곳을 유람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부탁해서 지리산 유람에 나서게 되었다.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양대박이 1586년(선조 13년)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두류산기행록』 중 일출 감상에 대한 기록(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양대박은 풍류가 넘쳤던 모양이다. 유람 길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 부르는 기생 애춘, 아쟁 타는 수개, 피리 부는 생이 등을 데리고 갔다. 그는 백장사에 쉬면서 차와 과일을 대접받고, 애춘이 가져온 서리 맞은 복숭아도 먹고, 어린 종을 시켜 담장 밖에 무르익은 돌배를 마구 털게 하고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지암 스님으로부터는 가을 산채나물이 푸짐한 맛깔난 저녁상도 받았다. 양대박 일행은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기생들과 악공들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고 피리를 불게 하고는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질펀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지리산에 올라갈 때는 일행 모두 몸이 허약해서 그 꼴이 가관이었다. 양대박과 오춘간은 동행한 승려 일원과 각련으로 하여금 번갈아 앞에서 잡아당기게 했고, 양길보와 양광로는 하인들의 등에 업혀 올라갔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눈감아 줄 수 없는 민폐 등산객들이다. 그는 천왕봉 정상에 있었던 성모사(聖母祠)에서 시렁 위에 놓여 있는 성모상을 보았는데, 그 성모상이 지금은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이 사람들도 김종직 일행처럼 성모사에서 자면서 추운 날씨에 엄청 떨어야 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유람(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양대박은 다음날 새벽, 천왕봉 일출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참 동안 앉아 기다리니 밝은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비치자 동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려 하자 붉은 구름이 만 리에 뻗치고 서광이 천 길이나 드리웠다. 해가 불끈 솟아오르니 여섯 마리 용이 떠받들고 나오는 듯하였다.” 이렇게 멋진 천왕봉 일출을 감상한 것을 보면, 아마도 양대박은 전생에 삼대에 걸쳐서 덕을 쌓았나 보다. 이들은 천왕봉에서 제석당으로 내려오면서 철 이른 눈을 만나 옷이 다 젖어서, 제석당에 들어가 불을 지펴 옷을 말리기도 했다. 군자사에 묵을 때는 청명한 달이 봉우리에 떠올라 창가에 환히 비추어, 일행의 마음이 매우 쓸쓸해져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양대박은 이 유람에 대해 지리산 단풍을 감상하고 천왕봉 일출을 본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 시를 주고받을 수 있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웃음을 선사해주는 친구들과 함께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던 박여량(1554~1611)은 57세 때인 1610년(광해 2년) 9월 2일부터 9월 8일까지 지리산에 다녀왔다. 그는 함양을 출발하여 오봉, 쑥밭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고, 제석당과 백무동, 군자사, 금대암, 용유담, 엄천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박여량 일행도 피리꾼 두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말머리에서 피리를 불게 하고 혜금(嵆琴, 거문고의 일종)도 타게 했다. 그는 산에 오르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산수유람 또한 지식을 넓히는 일이라고 했다.
일행은 군자사 앞에 흐르는 시내가 물길이 험악하여 말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산골 마을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넜으며, 군자사에서는 승려가 산에서 나는 가을 과일과 오미자차를 대접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별감 박대일이 기생과 악공들을 데리고 와서 술판을 벌여 모두 춤추고 놀기도 했다. 이들이 백무동 입구에 있는 실덕·마천·궁항 마을을 지날 때,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었고 감이 한창 무르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골짜기에는 지금도 감나무가 많아 가을에는 붉게 익어가는 감들이 볼 만하다. 박여량 일행은 지리산을 올라갈 때, 피로를 풀기 위해 두 하인에게 단풍나무를 꺾어들고 앞서가며 춤을 추게 하고, 악공들에게는 계속 피리를 불게 했다. 지금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풍류이다.
쌍계사 계곡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이들은 천왕봉에 있는 성모사에서 저녁밥을 해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자주 방문하는 사대부들의 접대에 화가 난 성모사 무녀가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솥을 숨기고 물통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버려서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천왕당(성모사)에서는 한두 순배 잔을 돌리면서 악공들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승려와 하인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춤을 추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당시 승려의 신분이 노비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행은 노란색과 흰색 국화꽃을 구경하기 위해 밤에 횃불을 들고 상류암 서쪽에 있는 작은 암자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국화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고 꽃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모습을 감상하기도 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하인들에게 지천에 널린 오미자와 산포도를 따오게 해서 먹기도 했다.
승려들과 함께 유람하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요즘은 여행할 때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지리산을 유람할 때 말, 노새, 나귀, 가마, 배 등을 주로 이용했고, 너무 가파른 산길이나 계곡을 건널 때는 걸어서 다녔다. 지리산 안에서는 승려들이 들거나 메고 다니는 가마를 주로 타고 다녔는데, 이런 가마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16년(광해군 8)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은 불일암에 올라갈 때, 쌍계사 젊은 승려 10여 명이 가마 4대를 가지고 대기했다. 1651년(효종 2)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이 대성골에서 거림골로 넘어갈 때는 쌍계사와 내원암 승려들이 가마 임무를 교대했다. 1680년(숙종 6) 순창군수 송광연(宋光淵, 1638~1695)이 유람할 때는 군자사 승려들이 가마를 가지고 천왕봉에 미리 올라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나아가 1807년(순조 7) 경상도 관찰사 윤광안(尹光顔, 1757~1815)은 함양 군수와 진주 목사(晉州 牧使), 산청 현감(山淸 縣監)을 동반하여 가마를 타고 천왕봉 정상까지 올라가기 위해, 1만여 명의 관내 군사를 동원하여 의신사-대성골-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백무동까지 가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내면서 큰 민폐를 끼쳤다. 하동-화개 구간에서는 주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배 위에서 악공들이나 기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유람을 즐겼다. 하익범(河益範, 1767~1813)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가을 농사철에 들판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민초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 지방 관료들이 기생과 악공 등 수행원을 수백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풍악을 울리고 시끌벅적하게 유람 행차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하익범의 『유두류록』의 관련 기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가을철에 산을 찾아가서 즐기는 산수기행은 사대부에게는 호연지기를 기르고 심신수양을 위한 하나의 필수 덕목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어수선한 속세를 떠나, 그들이 이상향으로 여겼던 청학동을 찾아 헤매거나, 별유천지 비인간의 신선 세계를 체험하기도 했다. 어떤 선비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민초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거나, 은자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거나,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거나, 자연의 위대함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왜소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과 함께 지리산에 한번 가보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삼았고,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그 여행 경험을 유람록이나 유람기로 남겨, 우리 같은 후세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다시 산행의 계절, 가을철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지리산에 갈 때, 수백 년 전에 우리 앞에 지나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다니는 것도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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