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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코드로서의 토끼 상징

달의 정령


2023년은 간지상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로 세간에서는 검은 토끼의 해라 불린다. 이는 동양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담은 표현으로 계묘(癸卯)년의 계(癸)는 물[水]을 뜻하여 검정색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묘(卯)는 토끼라는 동물을 뜻하는 바는 봄의 지극한 양기(陽氣)로 무성히 자라나기 시작하는 나무[木]의 모습을 상징한다. 토끼는 동서양 공히 다산과 풍요, 부활의 상징을 가지는데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달의 정령으로 불로장생을 의미를 담으며 도교적 신선 사상과 직결된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토끼는 먹이 피라미드의 최하위 포유류로서 다른 포식자들을 피해 늘 긴장하며 도망 다니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러나 토끼는 두 개의 자궁과 30일이라는 짧은 임신 기간으로 무소불위의 번식력을 가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종족을 무성히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포유류로 굳건히 자리한다. 이러한 생태적 특성은 고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비적 대상으로 여성의 속성과 연계된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토끼의 임신 기간과 달의 주기, 여성의 생리 주기와의 유사성 그리고 밤을 밝히는 달은 음(陰)적 요소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생존이 관건이던 고대에 강한 생식력을 가진 동물들은 포악한 힘을 가진 포식 동물들에 대한 공포심만큼이나 인간에게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토끼에 대한 많은 서사 자료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수궁가」의 기본 골격이 되는 ‘구토지설(龜兎之說)’은 인도의 본생설화(本生說話)가 종교적으로 한국으로 전파되어 성립되었다. 석가모니의 전생을 그린 『본생경(本生經)』에는 노인으로 변신한 제석천(帝釋天)이 원숭이, 여우, 토끼가 있는 곳에 와서 먹을 것을 청하여 원숭이와 여우는 먹을 것을 구해왔으나 토끼는 구하지 못해 대신 스스로 노인의 먹거리가 되기 위해 불 속에 몸을 던졌다는 내용으로, 이 의로운 토끼의 행위를 귀하게 여겨 영원히 달 속에 토끼를 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불도를 행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기리는 이야기로 이후 토끼의 도상을 만들어 기리는 풍습이 생겼고 토끼가 들어있는 월상문(月像紋)은 불교 전파와 밀접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달의 상징, 토끼(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토끼이야기』, 2011, p.29)



한국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수궁가」이다. 「수궁가」의 기본 구조는 ‘구토지설’을 바탕으로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에 기록된 설화이다.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김춘추가 죽령과 서북지방을 돌려 달라는 보장왕의 요구에 대해 거절하였다가 옥에 갇혀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고구려로 가는 길에 뇌물로 두사지(頭斯支)에게 청포(靑布) 300보를 받았던 보장왕의 신하인 선도해(先道解)가 옥중으로 김춘추를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들려주었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수궁가」에서 토끼의 간은 만병통치약이라고 나오는데, 토끼는 묘방(卯方)인 동쪽을 맡은 방위신으로 양(陽)의 세계인 해에서 양기를 받아먹고, 음(陰)의 세계인 달에서 장생약인 음약(陰藥)을 받아먹음으로써 그 음양 기운이 간(肝)에 들어 눈이 밝은 동물로 여겨 토끼의 간은 불로장생의 영약(靈藥)이라는 등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끼는 장수의 상징이자 달의 정령으로 여겨진다.

토끼와 그 공간으로 작용하는 달과 관련된 중국설화로는 10개의 태양 중 9개 태양을 활로 쏘아서 백성들을 구했던 고대 궁신(弓神)인 예(羿)의 아내이자 선녀였던 항아가 서왕모가 준 불사약을 먹고 달을 지키는 월신이 되었다는 ‘항아분월(嫦娥奔月)’ 신화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夏)나라의 전설적인 궁수이자 천신(天神)이었던 예(羿)와 항아는 3천 년 걸려 만든 불사약을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받아 왔으나 항아는 불사약을 혼자 먹어버리고 지상을 날더니 월궁(月宮)까지 달아나게 되었고, 이후 달에서 신선이 되어 광한궁(廣寒宮)에서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에 토끼는 장수의 존재, 불로장생의 존재로 상징되었다. 이 설화에서 항아가 사는 곳을 월궁전(月宮殿) 혹은 항궁(恒宮)이라 부르며 월상(月象)에는 두꺼비라 표현된 것이 있는가 하면 두꺼비와 함께 토끼가 등장하는 것이 있다. 이 같은 내용의 신화는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유포되어 현대에도 흔히 옥토끼와 두꺼비가 있는 달 풍경의 전형적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장르 속 토끼의 형상


서사적 장르에서 동물을 통한 의인법은 비인간인 동물 혹은 사물을 환상적 설정을 통해 인간에게 동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러한 우화 형식은 당시 양반 중심사회에서 제시되기 어려운 풍자와 유머를 표현할 수 있는 풍성한 스토리텔링을 창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가장 새로운 문화코드는 판소리의 출현으로 구전되던 이러한 민간설화들 일부는 스토리텔링과 음악이 공존하는 판소리 형태로 표현되었다.

「수궁가」의 원전인 「토끼전」을 비롯한 토끼와 별주부의 서사를 담은 다른 작가들의 버전이 존재하는데 토끼와 별주부의 대립적 입장은 고대의 육지-용궁, 강자-약자의 대립구조 사회양상은 봉건국가-개인의 문제, 혁신-보수의 이념이 충돌하는 궤적을 담고 있으며 작품의 갈등을 심화시켜 긴장을 강화함으로써 풍자와 해학이라는 미의식을 구현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서민 의식의 성장과 함께 봉건제도와 유교 이념을 부정, 비판하는 한편에서 충(忠)에 대한 찬양, 봉건 지배층의 무능과 위선에 대한 풍자에 각종 용궁설화, 중국 전등신화(剪燈新話), 쟁장설화 (爭長說話)등의 영향이 녹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 약자들의 이미지는 토끼와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생성한다. 토끼는 약한 듯하지만, 꾀 많고 재치 있는 민중을 상징하게 되었다.

도상적 측면에서 토끼는 인도의 본생경 설화에서 희생적인 제석천의 모습으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 들어와 처음에는 구전설화의 형태로 단순히 교훈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불경이 흡수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초기에는 원숭이와 악어의 대립 형태를 띠다가 중국의 한역 경전에서 자라와 원숭이, 용과 원숭이로 변형되다가 한국에서는 자라와 토끼로 등장한다. 달 속에서 중생의 구원을 밝히는 본보기가 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이나 항아 설화에서는 불로불사의 약방아를 찧는 도교적 도상으로 변이되어 있다.

고대 신성시된 동물상징은 자신들이 염원하는 바를 실현해주도록 도와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족의 안락함과 개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 특정한 동물의 형상을 그림으로 또는 조각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그 신성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시시대 토우부터 시작해 도자기에도 그 간절한 염원들을 담아 새겨놓았고 건축물로는 궁궐과 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림으로는 벽화묘와 절에 그려진 벽화부터 조선 시대 민화 등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에는 토끼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조선 여성들의 생활공간으로 월궁(月宮), 영생의 생활공간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달 속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신선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선계에 대한 염원은 현실 공간의 토끼 도상으로 상징화되었다. 민화, 벽화, 와전, 벼루 등에 등장하는 토끼는 대부분 달과 관련되어 달 속 토끼로서의 불로장생의 바람을 담고 있다. 토끼는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긴 생태적 속성 때문에 도상으로는 장수의 길상적 상징으로 조선 시대 십장생도 또는 십장생도 유형의 민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유교의 핵심 윤리를 요약한 여덟 자를 소재로 그린 문자화인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중 마지막 글자인 치(恥)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돌이켜 보며 부끄러워할 줄 알라는 의미이다.


김유신묘 십이지 호석 묘상 탁본(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순천 선암사 궁창의 방아 찧는 토끼(필자제공)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의 토끼(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토끼, 과거와 현재를 잇다


현대 미디어콘텐츠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불자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보다는 동물 세계에서 비록 그 지위는 미약하더라도 지혜로 위기를 돌파하는 상징하는 캐릭터로 회자되며 거북은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도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처음에는 다소 둔하고 느리지만 종당에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은근과 끈기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지난 2020년 한국관광공사의 새로운 시도로 국내외 일반적 MZ세대를 대상으로 제작한 한국 홍보영상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의 서울 편에는 「수궁가」의 한 대목에 ‘이날치 밴드’ 라는 퓨전 국악 밴드의 음악과 춤으로 유튜브 통계로만 4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5억 뷰를 달성한바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 기억 속에 언제나 친근한 호랑이와 자라, 토끼와 자라의 코믹스러운 이야기와 대화들을 ‘수궁가 코드’에 숨겨놓았다. 강릉 편에는 영상 한쪽에서 자라 인형 옷을 입은 쓴 모델이 바다를 보고 있고 목포 편에서는 토끼 인형 옷을 입은 쓴 모델이 케이블카를 타고 우스꽝스럽게 도망치는 장면을 보여 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지속적인 궁금증과 관심을 자아냈다. 시청자들은 강릉 편에 ‘거북아 목포 편에 토끼가 도망간다’라는 댓글로 소통하였고, 반복을 통해 함께 즐기는 상호작용인 폭발적인 밈(Meme)행위로 재미의 요소를 확산시키고 공유하였다.


도망가는 토끼(출처: 유튜브_Imagine Your Korea, Feel the Rhythm of KOREA: MOKPO)



동물의 신성화된 상징성은 고대에는 신수(神獸)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외경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도상과 이야기에 담겨 대중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위로하였다. 점차 주인공들은 신성을 잃고 의인화되어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모든 기능을 구비한 인격으로서 자유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캐릭터의 확장성을 가지고 인간과 인간사회를 표현하는 서사에서 대중의 의식을 대변하였다. 전통문화의 원형이 되는 신화와 설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신이기도 했고 인간의 조상이기도 되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상징은 현실 세계와 관념 체계의 모순을 조정하고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가지며 현대 미디어콘텐츠에서도 그러한 상징은 면면히 재현되고 있다.

현대에도 우리는 동물들의 역사적 이미지를 공유하며 같은 한국인, 한민족임을 자각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 개인들은 자신이 속해 살고 있는 세계의 가치, 상징, 의미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형성한다. 문화정체성을 이루는 전통문화의 상징이 가진 기억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집필자 소개

김이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복식미학 전공으로 석사, 건국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으로 동양철학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론, 음양오행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한·중·일 메가이벤트에 나타난 색채콘텐츠에 관한 연구」, 「한국 문화코드로서의 동물상징 확산 현상 연구」 등이 있다. 동아시아 문화콘텐츠를 중심으로 그 속에 재현되고 있는 문화정체성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을미년 새해가 밝다”

오희문, 쇄미록, 1595-01-01 ~

1595년 1월 1일, 날이 밝자 일어나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락 위에 올라가 아버님 신주 앞에 절을 하였다. 아울러 차례를 올렸는데, 겨우 만두를 넣은 떡국, 군고기 한 그릇, 탕 한 그릇에 잔을 올린 게 전부였다. 가난해서 제대로 차례상도 차리지 못하였으니,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이곳 임천 고을에 와 있은지가 이제 3년인데, 달리 갈 곳이 없고 궁색함은 날로 심해지니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내년 설에도 궁색하게나마 무사히 차례를 올릴 수 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해를 만났건만 아우와 두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니, 슬픈 감회가 밀려들었다. 또 큰 아들 윤해가 선조들의 묘를 찾아뵙기 위해 지난해 말 길을 나섰는데, 오늘 늦지 않게 도착하여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변변히 노자도 챙기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옷 한 벌이 전부였는데, 아들이 떠난 이후 왜 그리 눈은 많이 오는지... 오희문은 눈 밭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큰아들이 보이는 듯하여 심란한 새해 아침을 보내었다.

“환갑 새해를 맞이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5-01-01~

1765년 1월 1일. 날이 바뀌는 자시부터 바람이 그치고 춥지 않으면서 구름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길한 날씨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어지럼증을 호소하셨으나, 다행히 일어나 앉아 말씀을 나누실 정도는 되시니 매우 다행이었다. 날이 바뀌는 자시 무렵 어머니께 선성벽온단을 올렸다. 돌림병을 막아주는 약이었는데, 올해도 부디 평온하게 한 해를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늘은 최흥원의 60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 아침이었다. 사촌 일초가 와서 밤새 최흥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수세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이 되니, 문득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그 감회가 백배나 새로웠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에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전에는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지사방에 의탁할 곳이라고는 없는 궁색하고 외로운 신세였다. 살아오면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척들의 질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육십 해를 보내왔으니, 그간 쌓인 감회가 오늘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나마 동생들과 조카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친지들이 잊지 않고 최흥원의 회갑을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과 친지들을 보살피며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었다. 최흥원은 이런 생각으로 설날 하루를 보냈다.

“형제끼리 의지하는 쓸쓸한 객지의 새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노상추 곁에 있는 가족이라고는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온 동생 노억 뿐이었다. 고단한 관직살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도성에서 쓸쓸한 새해를 맞는 것은 비단 노상추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은 청교(淸橋)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영남 출신 무관들을 불러 모아 술과 떡, 안주를 대접하였다. 비록 가족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익숙한 말씨의 고향 사람들끼리 새해 첫날을 보내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술기운에 고향집 생각을 하자, 어른 없이 홀로 차례를 지냈을 큰조카가 떠올라 안쓰럽고 서글퍼졌다. 노상추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여관에서 묵으며 이러한 쓸쓸한 심사를 나누었다. 노억은 그러한 형님을 위로하며 설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방문하며 새로운 기분을 내 보자고 제안했다. 노상추도 이에 응하여 며칠 동안 이리저리 많은 친지를 방문하였다. 매일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술자리가 이어졌고,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휴가를 써서 고향에 내려가 그리운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친지들과 새해인사를 나누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596년 1월 1일, 금난수는 풍기 숙모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금난수의 삼촌 금희(琴憙)가 돌아가시고 나서 숙모가 10년간 혼자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찾아뵈어 적적함을 달래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후 금난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라 그런지 낮부터 새해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로 금난수의 집이 붐볐다. 금응각(琴應角), 구백수(具伯綏), 손행원(孫行源), 류의(柳誼)가 찾아온 것이다. 금난수는 여러 친척들과 세 아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더없이 기뻤다.

1월 4일에는 조금 뒤늦게 금난수의 외조카인 권산기(權山起)와 금난수의 사위인 이광욱(李光郁)이 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새해 초이니 올해는 서로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나눈 것이었다.

1월 5일에는 금난수는 이미 일정을 정해놓은 대로 사람들과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역동서원(易東書院) 두 곳의 사당에서 참배하였다. 그 수는 20여 명으로 모두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참배를 끝마칠 무렵에서야 이시(李蒔), 이립(李苙), 이강(李茳) 삼형제가 사당에 왔다. 금난수는 가까운 사람들과 새해인사 및 덕담을 나누고 사당에 새해를 맞아 참배하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해 첫날, 아내의 건강과 행복한 여생을 바라다”

오희문, 쇄미록, 1599-01-01

1599년 1월 1일, 동녘이 틀 무렵 다례를 지냈다. 왜적이 모두 물러가고 맞는 새해였다. 지난 임진년부터 작년까지 꼬박 여덟 해 동안 왜적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니, 올해의 첫 날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올해는 왜적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으니, 식구들이 모두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고 집을 옮길 생각이었다.

새해 첫날인데, 집사람이 지난밤부터 병이 있어 새벽까지 신음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보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며칠 전에는 점차 차도가 있어서 온 집안이 기뻐했더니, 오늘은 또 이와 같으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이 때문에 간단히 다례만 지내고,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술도 대접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기해년이니 오희문의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 보니, 앞길이 얼마 남지 않아 슬프고 탄식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거기에 집사람의 병세가 위태로워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어 40년 동안 같이 늙은 내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다니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희문은 새해 첫날 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동안 아프거나 고생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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