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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식후에 커피 한 잔을 즐겼을까?

커피의 유입


흔히 한국에서 커피는 1910년 전후 일본으로부터 그리고 1945년 이후 미국으로부터 대중에게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커피의 전래는 이보다 더 시대가 올라간다. 커피의 유입은 조선의 천주교 전파와 함께 되었는데, 즉 186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조선 순조 대에 프랑스 신부들은 커피를 마실 여유가 없었지만 한국 천주교 전래의 상대적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철종 대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평소 몸에 배었던 프랑스식 식생활을 향유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자국에서 대중화되었던 커피를 마시면서 향수를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커피 사랑은 그들이 본국과 소통한 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리부아(N. F. Libois) 신부에게 보낸 1860년 3월 6일자 서한에서 베르뇌(Siméon-François Berneux) 신부는 이듬해 조선으로 들어올 선교사 편에 커피 40 리브르(livre) 등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뇌가 파리 신학교 장상(長上)인 루세이(Rouseille)에게 보낸 1861년 9월 7일 자 서한에도 커피 등이 반입되었음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1863년 11월 24일 베르뇌는 리부아에게 보낸 서한에서 커피 50 catis(paquet)가 또 요청되었다. 이어 1865년 12월 4일 리부아에게 편지를 보내 설탕, 커피 각 100 리브르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만약 커피가 원활히 전달되지 않았으면 이렇게 지속적으로 요청했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다.


베르뇌 주교(출처: 『한국 103위 성인들의 순교화집』)



한편 개항 이후 188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의 일부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커피 음용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 간행한 1886년 저서에 따르면 1883년 보빙사를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던 로웰은 그해 12월 노고를 치하하는 조선 왕실의 초청을 받아 겨울 동안 조선에 머물렀다. 로웰은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경기도 관찰사(김홍집으로 추정)의 초대를 받아 한강 변 별장으로 유람을 갔는데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우리는 ‘잠자는 물결’이라는 누대 위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석식 후 커피’를 마셨다”라고 기록했다. 고종(高宗) 황제도 이 무렵에 커피를 접했다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본격적으로 음용하여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고종황제(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고종황제가 사용했다는 은제 커피잔(출처: 영남일보 2019.03.08)



이렇게 본다면 커피 유입에 대한 1860년대 전래설, 1880년대 중반 유행설, 1896년 고종 음용설 등 3자의 학설이 모두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커피는 최소한 1861년에 프랑스 신부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1884년 상류층에서 유행했고 1896년 고종이 본격적으로 음용했다고 할 수 있다.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다


한국인에게 커피는 외래문화로 전래되었지만 숭늉과 차를 마시던 전통적인 음용 문화의 기반과 어우러져 결국 한국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1910년 전후에는 주로 일본에서 커피가 수입되었다. 명동을 중심으로 일본식 다방(喫茶店; 깃사텐)은 일본인들이 친목·연락장소로 사용했으며 고위 관료, 개화기 지식인, 일부 친일파도 들락거렸다. 아직 커피는 일반인이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들어와서 예술가들의 삶 속에 커피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방에 단골로 들락거리다가 직접 다방을 차린 경우도 등장했는데,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듀, 영화배우 복혜숙의 비너스, 일본 유학파 출신의 김용규·심영의 멕시코다방이 대표적이다. 1933년 종로에서 시인 이상이 기녀 금홍과 함께 차린 제비다방도 유명했다. 이 시대 경성의 다방은 미술가와 문인 등 모더니스트 예술가의 교류의 장이자 문예적 공론장이었다. 단지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장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 커피는 젊은이들에게 ‘모던’의 상징이었으며 다방은 새 사조를 이끄는 문화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20년대 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확산되던 커피 문화는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해 미국과 전면전을 벌여 설탕·커피의 수입이 막히면서 쇠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다방은 거의 폐업 수준이었던 것이다.


1910년대 남대문 인근 다방 내부 모습(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1950년 6·25 전쟁기에는 미국에서 커피가 수입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식 인스턴트커피가 유행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커피를 알지 못하다 미군의 주둔으로 커피를 처음 접한 사람이 많아졌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군용 식량에 포함되어있던 인스턴트커피(야전용 봉지커피)는 우리나라 커피 문화 유입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용돈이 부족했던 미군 장병들은 자신들이 보급 받았던 커피와 담배를 암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아치우고는 했다. 이렇게 암시장에 유입된 커피와 담배가 전쟁 당시 피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커피 대중화의 단초를 열었다. 사람들은 군용 야전 양식에 들어있는 커피 봉지를 뜯어 끓여 마시다가 쓴 한약 맛에 당황하기도 했고, 커피를 과용해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보다 늦은 19세기 말 도착한 미국·캐나다 등 북미지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커피를 마셨고 이를 한국인에게 전파하며 같이 즐겼지만 지금과 같은 미국식 커피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945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식민지 시대에 주로 유행했던 일본식 다방문화와 함께 공존하면서 일종의 잡탕식 문화를 이루었다. 높은 실업률과 통신시설의 미비는 사람들을 다방으로 몰려오게 만들었다. ‘고등룸펜’들은 하루 종일 다방에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고, 전화기가 드문 시절 지인과의 연락도 다방을 통해야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커피는 외화를 유출하고 ‘혁명 분위기’를 해치는 퇴폐문화의 주범으로 몰려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깊게 뿌리내린 커피 문화는 청년 문화의 구심점이 되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은 당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펄 시스터즈 특선집 음반(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 제너럴 푸드(General Foods)사와의 기술제휴로 1970년 한국에 인스턴트 커피 맥스웰 하우스 커피를 처음 내놓아 커피 대중화를 시도한 동서식품은 1974년 자체 기술로 ‘프리마(Frima)’라는 커피 크리머를 시판했다. 당시까지의 커피 크리머는 주로 우유로 만든 액상 크림이었다. 그런데 우유는 국내 가격이 외국보다 6배나 비싼데다가 그 향이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이에 야자유를 주원료로 한 분말의 순식물성이며 파우더 타입인 크리머를 개발했던 것이다. 이후 1976년 커피와 크리머, 설탕을 적절히 배합한 1회용 인스턴트 커피, ‘커피믹스’를 개발해 달콤한 것을 원하는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다방 커피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의 입맛에 부응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물만 있으면 빠르고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믹스는 한국 커피 문화의 대중화는 물론 세계화에도 기여했다. 커피믹스는 세계 커피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커피를 개발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동서식품 제조 맥스웰 하우스(출처: 부평역사)



그런데 1976년까지도 수입 커피는 고율의 관세 때문에 아직 고가품이었으므로 주로 부자들이 향유했다. 구한말과 일제 시대를 거치며 유입된 커피는 사실 고가품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끽다점(喫茶店)과 다방에서 판매하던 커피 한 잔의 가격은 약 10전으로 당시 일반 기업의 초임 월급이 69엔 49전이었으므로 커피는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었다. 일부 상류층과 당대의 문인들과 같은 이른바 엘리트들만 누릴 수 있었던 커피가 대중에게 다가온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덕분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가 파괴되면서 다방들이 사라지고, 대신 유엔군의 주축인 미군 배급 물자가 암시장에서 거래되면서 고가의 제품이었던 커피가 대중에게 유입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또한 국산 커피보다 관세가 붙지 않아 오히려 국산보다 크게 비싸지 않았던 밀수된 미국산 커피를 선호하기도 했는데 동서식품이 이러한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1973년 석유파동에 따른 경기침체 및 원두 가격 상승이란 악재로 커피 소비가 침체되며 커피 대중화는 위기를 맞았다. 더구나 1970년대 중반 물자 절약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는 국산 차(茶) 마시기 운동을 전개했다. 원두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외화를 낭비하는 커피 대신 인삼차 마시기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미제 밀수 커피를 음용하고 한쪽에서는 인삼차를 마시는 양극화된 분위기가 커피믹스(1976년), 커피자판기의 보급(1977년), 그리고 1978년 커피 수입 자유화 등으로 극복되었다. 이제 드디어 커피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민 음료로 등극할 수 있었다. 커피는 이방의 새롭고 낯선 존재가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으로 자리매김 했다.




비밀리에 전파되던 커피,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기호품이 되다


한국의 커피 음용 문화는 ‘커피=미제’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확산되어 미국 문화의 전파라는 시각에서 커피 문제를 보는 관점이 주류를 이룬다. 스타벅스 식의 미국식 커피 전문점의 확산으로 미국식 커피 문화가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유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화전파 논쟁이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최초 전파는 유럽 등지에서 들어온 것이다. 5·16 군사정변 직후 커피가 금지된 적도 있었고, 전통차(국산 차: 문헌상 신라 시대에 처음 차를 마신 것으로 나오는데 전근대에 우리가 즐겨 마시던 차도 토종이라기보다는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순수 국산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현재 국내산 차 잎으로 만든 국산 차가 있기는 하다)가 대체재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커피 문화 확산의 도도한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1860년대 위정척사의 분위기 속에서 비밀리에 전래된 커피는 박정희 정부의 커피 금지 등의 우여곡절 속에서 꿋꿋이 전파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 때 어떤 문화라도 그 확산을 인위적으로 막다가는 부작용만을 초래하고 결국은 자연스럽게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화확산론이 아닌가 한다.


커피 한잔으로 시작하는 현대인



커피가 전래되었다고 문헌상 확인된 1861년부터 160년이 흐른 오늘날, 커피는 한국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음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한국 사회를 읽는 하나의 지표이자 키워드가 되었다. 원두커피의 유행에 따른 글로벌 스탠다드와의 동조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각 개인들의 생활 여건과 취향에 따라 비교적 다양하다. 원두, 캡슐, 인스턴트, 알티디, 디카페인 등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고 휴식하며 울고 웃고 있다.




집필자 소개

이완범
이완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한국정치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한국현대정치사, 한국분단사, 한국과 국제정치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카터시대의 남북한』, 『한반도 분할의 역사』,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 등이 있다. 현대남북정치외교사 전공이며 최근에는 미국의 한국정치개입사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담배의 보급”

조선에 담배가 보급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담배가 처음 전래될 때는 약재로 인식되어 보급되었다. 술을 깨게 한다든지, 소화가 잘 된다는 말과 함게 담배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사람들이 밭에 담배를 많이 심는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초보다는 기호품으로 애용되었다. 손님을 대접할 때 담배를 권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담배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여 남녀노소와 양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소비하였다.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류하였던 하멜은 조선인들이 4, 5세 때부터 담배를 핀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점차 상품작물로 변해갔다. 한성(서울)에서는 담배만을 파는 엽초전이라는 시전이 생겼고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담배가 매매되었다. 그러나 담배 보급이 늘어나면서 폐단도 늘었다. 먼저 비옥한 토지에 담배를 많이 심어 다른 작물의 생산량이 떨어졌다. 다음으로는 담배 예절이었다.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긴 담뱃대를 물고 서로 담배를 피우게 되자, 예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은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담배를 피울 때 지키는 규율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연장자 앞에서는 피우지 말 것이라든지 양반 앞에서 평민은 피우면 안 된다든지, 평민이나 천민의 담뱃대는 양반의 것보다 길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유가야산록」에는 여행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담배는 여행의 준비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담배를 피울 때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담뱃대를 비롯하여 담배를 넣어 둘 담배 주머니, 재떨이 등이 필요했다. 물론 양반들이 여행을 할 때는 노비들에게 이를 대신 들고 오게 하였을 것이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담배와 미숫가루, 꿀과 돈 - 상소 준비 과정에 받은 다양한 부조품”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1792년 5월 11일, 부조를 받는 길이 한 번 열린 뒤에는 폐단을 막기가 어렵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다. 포천 현감 홍약호(洪若浩)가 편지로 문안을 하고 남초(南草: 담배) 2근, 미식(米食: 미싯가루) 2되, 꿀 1항아리를 보내주었다. 1792년 5월 20일, 좌의정이 돈 50냥을 보내오고, 채홍리(蔡弘履)가 남초(南草: 담배) 40근을 보내왔다. 5월 24일 안악(安岳)의 이익운(李益運)이 편지로 문안을 하고 돈 20냥과 향초(香草: 담배) 5근을 또 보내왔다.

“양반들은 산수유람 때 무엇을 준비했을까?”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6 ~

1587년 8월 6일, 산수유람 중이던 황여일(黃汝一)은 식후에 숙부[황응청(黃應淸)]와 잠시 낮잠을 잤다. 얼마 되지 않아 이 고을의 학자인 김득경(金得鏡)이 달려와 이르니, 이 곳 태수 조정간(趙廷幹)이 가서 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흰 밥에 푸른나물로 식사를 하였는데, 산에서 먹는 맛이라 더욱 좋았다. 술도 서너 잔 했다. 이윽고 노승(老僧)이 짚신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절의 서쪽 편으로 가면 구름 사이로 돌길이 나 있는데 매우 가파르고 끊어질 듯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니면 건너갈 방법이 없습니다.”

곧이어 함께 갈 일행을 선발했다. 이야기를 나눌 승려는 ‘학연(學衍)’이라 하고, 시문(詩文)을 챙기는 이는 ‘덕룡(德龍)’이라 하며, 벼루를 들고 갈 이는 ‘홍원(洪源)’이고, 술시중할 이는 ‘매운(梅雲)’이며,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이는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승려로 하여금 걸음을 예측해서 날이 저물면 어떤 암자에 이르러 잠잘 수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리고 함께 출발하여, 쉬엄쉬엄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합격과 낙방,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탁족과 술로 마음을 달래다”

김령, 계암일록,
1623-05-05 ~ 1624-01-20

1845년 7월 3일, 낙육재의 여러 벗들이 함께 바람이나 쐬고 오자 하여, 서찬규 일행은 십여 이 술을 가지고 남암(南菴)에 올랐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7월 10일에는 예닐곱 관동들과 함께 신천에서 목욕하고 거북굴에서 바람을 쐬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덕우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갔다.

1846년 5월 18일, 국오 족숙을 모시고 여러 친족들과 함께 앞산으로 회포를 풀러 갔다. 동네 어귀에 도착해 자리를 펴고 밥을 내오는 사이에, 서찬규와 태곤(자는 노첨)·재곤(자는 자후), 그리고 몇몇 서당 아이들은 탁족할 곳을 찾아 가파른 바위로 등나무 넝쿨을 잡고 올라가 굽이굽이 물길을 찾아갔다. 마침 한 승려가 갈포 적삼에 송납을 쓰고 인사를 하는데 은암의 중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물으니, 약초를 캐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물을 따라 걸어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떠서 마시고, 더우면 손으로 끼얹어 씻었다. 이렇게 몇 리를 가니 예계암에 이르렀다. 술기운이 막 깨니 배고프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는데, 우연히 나무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도시락으로 쾌히 빈 배를 채웠다.

산림에 회포를 붙여 일어났다 누웠다 하다 보니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어서, 어느덧 해가 한낮을 지났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왔다. 하루 종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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