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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출산 조절기제와 문화

인간은 태어나서 배우자를 만나고 자식을 낳으며, 늙고 병들어 죽는다. 사람들의 생로병사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의 출산, 혼인, 사망과 같은 인구지표들은 과거의 사회문화적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인구동태는 또한 사회에 대한 단절적이고 현재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전근대로부터 근대사회로 이르는 장기적 사회변동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연속적으로 선행하는 시대인 조선 시대의 제도문화적 맥락과 인구동태 사이의 연관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출산율 감소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인구변천 과정의 하나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상황에서 출산율을 늘리기 위해 조선 시대의 혼인과 출산의 행태로부터 출산 저하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산이 권장되는 사회 : 자기 먹을 것은 자신이 갖고 태어 난다


조선에서는 오복 중 하나가 자식이 많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능한 많은 자식을 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자식을 많이 두고 싶은 것은 아들이지 딸은 아니었다. 혼인 이전 사망률을 보완한 행장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조선 시대 양반 여성 1인이 평균 5.09명을 출산했다. 이 중 약 50%가 혼인 이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남성은 1.25명 수준에 불과했다.

1.25명이 평균이므로 아들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사망률이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아들이 언제든지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더 많은 아들이 필요했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내훈(內訓)』 혼례편 “사람이 혼례를 소중히 여김은 조상의 혈통을 이으며 제사를 위한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성리학적 가계 계승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다.


어제내훈(御製內訓), 필사본, 1736년 이후(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중국의 교화서인 『소학』, 『열녀전』, 『여교』, 『명심보감』 등의 4책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요긴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조선 시대 여성의 가장 큰 의무는 사내아이를 출산하여 가계를 계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종법 질서가 정착되면서 여성들이 제사에서 배제되고 이에 따라 재산 상속에서도 큰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여성의 지위는 급격하게 하락하였고 남자아이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 결과 여성이 혼인하여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병이라 하였고, 심지어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삼았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필사적으로 아들을 출산하기 위한 원을 담아 기도하거나 여러 미신적인 행위를 행하곤 하였다.




아들을 바라는 마음 : 돌부처의 코


아들이 없는 경우 여인들은 통상적으로 부처·산신·천지신명·일월성신(해·달·별) 등을 대상으로 정성껏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리고 기도하였다. 그 결과 많은 사찰에는 여성들이 아들을 낳기를 비는 칠성각이 있었고, 산에 있던 돌부처의 코는 납작코가 되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 남근과 여근 유적 및 설화가 없는 곳이 없다. 이것은 남녀의 성기를 믿는 종교적, 주술적 의례이자 아이 낳기를 기원하는 대상이 된다. 이 의례적인 행위들은 주로 유사 성행위를 흉내내는 행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이나 지역에 따라서는 바위를 쓰다듬거나 껴안기도 하고, 돌을 넣거나 타고 놀기, 동전이나 돌 붙이기, 구멍에 나뭇가지 등을 끼우기 등의 행위를 하기도 한다.

먼저 바위를 껴안고 쓰다듬는 행위는 남근석을 어루만지면서 바위의 생산적인 힘이 산모에게 옮겨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알바위에 돌 던지기는 주로 ‘공알바위’의 형태의 돌 속으로 돌을 던져 넣음으로써 여성의 가임이 잘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 충북 제천시 무도리 음지마실 입구에는 공알바위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부녀자들이 이곳을 찾아 돌멩이를 던지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 그 외 구멍에 나뭇가지를 넣거나 동전 등을 바위에 붙이는 것 등도 이와 같은 의미였으며, 조금 더 현실과 유사한 성행위를 모방한 바위에 올라타는 행위도 생명의 출산을 간절히 원했던 여성들의 바람이 담긴 행위들이었다.

산야에 있는 많은 돌부처의 코는 남자아이를 소망하는 여성들의 손에 의해 납작코가 되었다. 아들 낳은 집의 금줄을 일주일 동안 차고 다니거나, 고추가 달린 금줄을 훔쳤으며, 상갓집 상여 만장을 상주 몰래 찢어서 그것으로 속옷을 해 입기도 하였다. 경북 안동에서는 우물이나 냇물에 세로로 떠 있는 작은 나무토막이나 마디가 있는 짚토막을 물과 함께 마시거나 은빗장나무 열쇠, 은가락지를 달여 마시기도 하였으며, 이슬을 마시거나 개구리알을 달여 마시는 풍습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남 배내옷을 훔치는 행위 등과 같은 주술적인 행위들도 유행하였다. 심지어 "뒷간의 똥물이라도 마실 정성이 있어야 아들을 보는 것"이라는 말처럼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각종 민간 처방들이 존재하였다.


석조미륵불좌상(출처: 국립중앙박물관)코가 문드러진 것을 알 수 있다.


임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귀숙일(貴宿日: 씨내리기 날)을 정하는 풍습도 있었다. 지역마다 그 날짜는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춘하추동으로 나눠 씨내리는 날을 결정하였다. 예를 들어 봄에는 갑을, 여름에는 병정, 가을에는 경신, 겨울에는 임계 등과 같이 합방 날짜를 잡는 방식이다.

임신 중에 남녀의 성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도 등장한다. 전녀위남법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 1443년에 발간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처음 등장한 이래 여러 의서에서 이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특히 허준의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와 『동의보감』에 자세하게 그 원리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동의보감』 「부인문」 ‘전녀위남법’ 조에 따르면 임신한지 3개월 된 시기에는 성별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약을 먹거나 방술을 통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의 파급력에 의해 17세기 이후 전녀위남법은 일반 기층민중으로 확산되고 보편화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방중술에 대한 효력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아들을 절실히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들 낳는 비법’을 구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성의 재가금지 : 수절


다산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출산율은 17세기 이후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출산율이 하락하는 이유로 성에 대한 터부, 여성의 재가 금지, 남귀여가혼에서 시집살이 등을 들 수 있는데 여성의 재가 금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이후 진행된 성리학의 생활 침투에 따른 여성의 지위 하락과 관련이 있다.

출산력 억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여성의 재가 금지였다. 고려시대까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던 여성의 재혼이 공양왕때 실행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더니 조선 개국 이후 여성의 재혼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었다. 특히 1477년 7월 성종 때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조(京官職條)에 명시된 재가한 사족 여성의 자손은 관리로서 등용하지 않는다는 금고법이 시행됨으로써 사족 집안에서 과부의 재혼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족 여인들은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부인은 재혼하지 못하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으며, 이는 출산력의 감소로 연결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가임기간 중 과부가 되는 비율이 전체 가임기 여성의 21%에 달한다. 또한 가임기간 중 과부로 보내는 평균 기간은 11.89년으로 나타났다. 실제 재혼이 가능한 남성들과 재혼이 금지된 여성들 사이의 출생률을 살펴본 결과 10~13% 정도의 차이가 있다.


『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 「열녀도(烈女圖)」(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세종대 간행된 한문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저본으로 하여 수록 인원을 각 35명으로 줄이고, 난상(欄上)에 언해를 붙여 간행한 책으로 열녀도는 왕실, 사대부, 일반 여인들에게 충심, 정절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성상을 유포하고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제작된 책이다.


사족 여인들의 재혼 금지 풍속은 일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호적자료를 이용한 연구에 따르면 18세기까지는 평민인 경우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으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평민들의 재혼도 많은 제약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종법 질서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평민 여성들에게도 사회·문화적으로 수절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1894년의 갑오 농민봉기 당시 농민군이 내건 폐정개혁안에 ‘과부의 재가 금지 폐지’가 포함된 것을 볼 때 19세기 말경에는 이미 상당수의 평민 여성들까지 재가 금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남성의 성생활은 자유로운데 반하여 여성은 정절을 요구함으로써 종법 질서가 점점 더 강화되는 조선 후기 양반 여성의 재혼 금지는 조선 시대 양반의 순재생산 능력을 제한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하였다.




여성의 지위하락 :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둘째, 남아선호로 인한 여성의 지위 하락이 출산율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여성의 지위 하락은 시집살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인 풍습이었으나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점차 반친영 형태로 변화되면서 시집살이가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남귀여가혼의 유습인 혼인 후에도 친정에 머무르는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었으며, 시집살이로 인한 가사 부담과 스트레스는 출산율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계 계승에 대한 부담과 여성의 지위 하락에 따라 남아선호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남아와 여아 간의 차별과 같은 악습을 초래하였다. 성은 자식을 낳은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높게 평가하고, 쾌락으로서의 성을 터부시함에 따라 출산율에 영향을 주었고, 정숙한 여성의 이미지와 과부의 재가 금지 등 여성의 성은 더욱 제약되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남아를 낳기 위해 각종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방법을 통해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풍속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주이씨 무안대군파 족보에 따르면 남자를 100으로 했을 때 여자의 비율이 16세기 72%, 17세기 74% 등 70% 이상이던 것이 18세기 67%로 낮아지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52%로 급감하였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태어날 확률은 각각 50% 정도이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여성의 혼인 때까지 생존율이 남자에 비해 떨어지는 것과 여성의 족보기록에서 누락되는 비율이 증가한 것 때문이다. 첫째는 족보에 기재될 수 있는 조건인, 시집가서 자식을 생산하는 인구의 비율이 크게 하락하였을 가능성이다. 이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유아 및 청소년기의 사망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 여성은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양상태가 부족하고 의료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으므로 영유아기 여성들의 사망률이 높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중국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남아선호사상의 결과 많게는 20% 이상의 여아가 부모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결과가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흉년기에 여아들이 살해당한 기록들이 있다. 그 결과 여아의 부족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여성인구의 부족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출산력 억제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비록 조선의 경우 영아살해와 같은 행위는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여아를 차별하는 행위는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남아에 비해 여아 생존 조건은 상대적으로 불리하였다.




성에 대한 터부: 남녀칠세부동석


셋째는 성에 대한 터부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조선 시대의 성관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남녀 간의 유별을 강조한 말로 조선 시대 ‘내외사상’의 결과이다. 원래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남녀 간의 성의 역할에 관한 의미였다. 남녀 간의 예절을 지키고, 역할을 분담하며,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나 종법 질서가 강화됨에 따라 점차 간통이나 근친상간 등 풍속의 순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가옥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안채는 부인이 거주하고, 사랑채는 남편이 거주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만 안채로 출입하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가난하여 초가삼간이라도 가능하다면 내실과 사랑으로 구분하였다.

성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 남편은 부인방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한 방음에 취약한 한옥 구조 상 부부의 성행위는 상당히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왕실부터 사대부까지 남자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부합방의 날짜를 정하는 ‘씨내리는 날’을 정하는 것이 암묵적 관행으로 수행되어 왔다. 부부의 가장 큰 덕목은 가계 계승이었으므로 최대한 쾌락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부부관계가 설정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민간에 전해지는 일반 평민들의 성행위와 관련된 속담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 早婚은 요절의 저울이다. (충북, 함북)
․ 좋은 약 천첩은 하룻밤에 독방과 같다. (전북, 경남, 평북, 함남)
․ 혼자 자는 것은 藥과 같다. (충북, 함북)
․ 한 달에 色을 3번 한다. (황해)
․ 7일에 한 번 色을 한다. (충북)

위의 속담들은 대부분 색을 멀리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분과는 상관없이, 쾌락으로서의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의식이 실생활에서 투영되고 있다.


신윤복, 〈사시장춘(四時長春)〉(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 외에도 출산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시묘살이가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큰 덕목은 효이므로 부모의 사망 시 3년이나 1년간의 시묘살이를 해야 하는데, 얼마나 실천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부부관계를 피하여야 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유교·도교적 성윤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출산율의 중요한 조절 기제로 작용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시대의 출산율을 조절하는 기제는 현재 한국의 인구문제와도 연결된다. 한국 사회도 급격한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는 제2차 인구변천에 돌입한 상태이다. 제2차 인구변천의 핵심은 저출산 문제이다. 제2차 인구변천은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현재 한국에서 맞이할 인구절벽의 가능성은 단순히 인구구조의 변화를 넘어 사회의 재생산 자체를 위협하는 실정이다. 저출산 현상은 다양한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혼인율의 감소, 초혼 연령의 상승, 이혼율의 상승, 자녀에 대한 가치관 등 가족 형성과 관련된 변수들이 1차적인 요인으로 나타나는 한편, 그 1차적 요인들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낮은 출산율은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혼인 연령이 높아지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회변화에 따른 자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여성들이 직장 및 육아 및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 증가가 출신 기피 현상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있다.


조선 시대 출산 후 차려놓은 삼신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늘날 한국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존재하는 장기적 사회구조와 변동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구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사회변동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의 한 구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구가 관리되고 조절되는 메커니즘은 그 사회의 생존, 생활, 생산방식과 밀접히 연관된다. 최근의 출산력 저하를 불안정한 노동시장, 가족 형성의 지연과 약화, 양성평등 관념의 확산 등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필자 소개

박희진
영남대학교에서 「귀속 기업의 불하와 경제 발전」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의 결혼과 출산 문화』(2020), 공저로 『고문서로 읽는 영남의 미시 세계』(200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2013), 『한국 역사인구학 연구의 가능성』(2016)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조선 후기와 일제 시대의 인구 변동」, 「양반의 혼인 연령」, 「Influences of the Yangban's Age at Marriage and Ban on Remarriage on Childbirth in Choson society」, 「Marital fertility during the Korean demographic transition: child survival and birth spacing」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출산 풍속”


[출산 준비]

출산은 아내의 친정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내방(주부의 거실) 바닥에 짚을 깔고, 아이를 낳을 방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임산부는 검은 치마를 입고 출산을 준비하였으며 시중은 시어머니나 경험이 풍부한 아주머니에게 부탁한다. 산실에는 <삼신상(산신)>을 설치하고, 짚을 깔은 위에 상을 바쳐서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바치는데 임산부가 출산 후 처음으로 먹는 식사는 이를 내려서 만든다.
배내옷, 포대기, 기저귀, 솜 등을 마련한다. 배내옷은 바늘로 꿰매며 단추를 달지 않고, 긴 끈을 붙여 가슴에 한 바퀴 돌려 맨다. 단추 대신 긴 끈을 쓰는 것은 아기의 수명이 길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농촌의 남편은 아내의 산달이 가까워오면 삼으로 왼새끼를 꼬아둔다. 이것을 밧줄처럼 산실에 매어놓아 임산부가 아이를 낳을 때 이것을 잡고 힘을 쓴다.

[탯줄 자르기]

탯줄을 자를 때는 탯줄을 잡고 아기 쪽으로 훑은 다음 배꼽에서 한 뼘쯤 되는 부분을 자르고 그 끝 부분을 실로 잡아매어 깨끗한 솜에 싸서 아기 배 위에 올려놓는다. 태는 흔히 가위로 자르지만 여아가 태어났을 때는 동생이 남아이길 바라는 뜻으로 소독한 낫이나 식칼을 쓴다. 태는 짚이나 종이에 싸서 삼신상 아래에 두지만, 이를 귀하게 여기는 집에서는 일진에 맞추어 좋은 방위에 놓아둔다. 태는 보통 사흘이 지나기 전이나 사흘째 되는 날 태우거나 항아리에 담아 명당자리에 묻는다.

[금줄 치기]

아기가 태어나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1주일 또는 3주일 동안 집의 대문이나 산실, 부엌 입구 등에 금줄을 친다. 남아일 때는 금줄에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끼워두며, 여아일 때는 미역, 솔잎, 종이 따위를 달아준다. 금줄은 반드시 왼새끼로 꼬며 양 끝을 자르지 않는다. 왼새끼는 잡귀를 쫓기 위해서이며, 양 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아기와 산모의 수명이 끝없이 길기를 바라서다. 도 붉은 고추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붉은 기운도 잡귀를 물리친다고 여겼다. 한편 숯에는 독을 제거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여성을 나타내는 빛인 솔잎의 녹색에는 여아가 성장하여 바느질을 잘하라는 기대가 들어 있다.
금줄은 7일, 21일 또는 49일간 걸어 두는데, 이 사이 외부 사람의 출입은 금지되며, 또한 산실에서 물건을 내오는 것도 금지된다. 금줄을 떼고 산실이 개방된 후에 비로소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이 축하하러 온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6-01-26 ~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조선시대의 산후조리”


전근대에는 산후의 산모와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생과 의약 공급 환경이 낙후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모와 영아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방책은 외부와의 격리였다. 지역과 집안, 그리고 상황마다 달랐지만 대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삼칠일(3·7)간 금줄을 드리우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산모도 물론 바깥출입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최소 21일이 지나야 늘어났던 자궁이 제자리를 찾고 몸이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모는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하는데, 더운물을 수건에 묻혀 몸을 닦아내는 것으로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몸에 직접 물을 묻히는 일은 출산 후에 한 달이 지나야 했다.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는 조치에는 또한 문을 닫고 병풍을 쳐서 바깥바람이 몸에 닿지 않도록 하고, 여름철에도 방에 불을 때는 방법들이 있었다. 산모는 또한 여름에도 두껍고 긴 옷을 입고 버선을 신으며, 부채질하지 않아야 했다. 그 외에도 약쑥 삶은 물로 좌욕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지 않도록 하여 회복을 도왔다.

산모의 몸을 보하기 위해 특별히 탕약을 지어 먹이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향신료를 넣지 않은 뜨거운 국과 밥을 먹도록 했다. 그리고 성질이 차다고 여겨지는 메밀 등의 식재료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육류 역시 금해졌다. 또한, 산모의 치아를 위해 딱딱하고 차가운 음식도 피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민간 풍습에 따라 금하는 음식 재료들이 있었다.

산모가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가족들도 싸움, 살생 등의 부정한 행위를 피하고, 부정한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를 피하는 등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아들을 잃었던 달부, 다시 득남하다”

배냇저고리(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20-10-13 ~

1620년 10월 13일, 이실의 집에 한달부와 배원선이 찾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김령 또한 이실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이날의 만남은 한달부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는 올해 아들을 한 명 잃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득남하였다. 주인이 술을 따랐고, 김령은 밤이 되어 술에 취한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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