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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으로 패가망신한 양반과
청부업자로 전락한 수령

노름의 끝은 파멸


조선 시대 말기, 전라도 장수현에 살던 양사헌(梁思憲, 1858~1888)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름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노름빚을 갚지 않는다며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가 노름하다 진 빚은 무려 170냥이나 되었다. 그중 50냥을 겨우 갚고 나머지 120냥을 변제하지 못하자 돈을 빌려준 이기찬이 그를 고발했던 것이다. 수령은 이기찬의 주장을 받아들여 양사헌에게 체벌을 가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서 갇혀 지내는 것은 어느 시기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혹한기(酷寒期)와 혹서기(酷暑期) 즉 매우 춥거나 더울 때는 아주 힘들었다. 간혹 추워서 얼어 죽거나 더워서 열사병으로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법으로 이런 때에는 감옥에 사람을 가두지 못하도록 했다. 양사헌이 갇혔을 때는 정월이어서 매우 추울 때였으므로 그의 가족들은 난리가 났다. 궁벽한 시골이지만 그래도 양반이기에 행실이 반듯해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무뢰배들하고 어울려 노름을 한 결과 재산을 모두 잃은 데다가 곱사등 같은 노름빚까지 남긴 채 고발당해 매까지 맞고 감옥에 갇혔으니 말 그대로 패가망신을 자초한 꼴이었다.


투전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래도 가족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한시라도 빨리 감옥에서 벗어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백방으로 돈을 구하여 간신히 관아에 납부했다. 노름빚을 갚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양사헌은 감옥에서 곧 풀려날 것을 기대하며 곰곰이 지난날을 되새겨 보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돈을 구하느라 온갖 수모를 겪었을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에게 미안했다. 급전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될만한 세간살이를 모두 내다 팔든지 저당 잡혔을 것이며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찾아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사헌은 양반의 체모를 생각하지 않고 무뢰배들과 어울려 노름을 해서 패가망신한 자신이 싫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노름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이기찬이 더 미웠다. 이기찬은 전문적인 도박꾼으로 노름을 아예 몰랐던 자신에게 다가와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오락 중의 하나라며 투전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양사헌이 투전에 흥미를 보이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을 속여 이기는 방법도 가끔 일러주었다. 양사헌이 점차 노름에 빠져들자 마을을 벗어나 다른 고을까지 함께 가서 벌이는 원전 투전판에 끼워주고 돈을 잃으면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돈을 빌려주고서 그 이자를 복리(複利)로 받았기 때문에 갚아야 할 빚은 항상 원전보다 몇 배나 많았다. 노름빚 170냥 중 원전은 50냥도 채 못되었다.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빚을 갚으면 이기찬은 원전을 그대로 둔 채 이자를 먼저 변제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빚을 갚아도 이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게다가 돈을 받고서도 안 받았다고 우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살아서는 도저히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름빚 소송을 제기하다


양사헌이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령의 행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양반으로서 투전꾼들과 노름을 한 자신의 행위는 백번 꾸짖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노름했다고 양반인 자신에게 매질까지 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계시는 조정에서 신하들은 걸핏하면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요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형벌은 대부(大夫)에게 적용하지 않고 예절은 서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장수와 같이 궁벽한 시골에서는 자신과 같이 대대로 세거(世居)하던 토박이 양반이 곧 대부였다. 따라서 설혹 매질을 당할만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얼굴을 대하고 꾸짖거나 혹은 서면으로 질책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엄동설한에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수령의 조처에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또 있었다. 수령이 노름빚 소송을 받아준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노름은 조선 후기에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따라서 국왕은 수시로 노름을 하지 않도록 훈계하고 노름하다 적발되면 엄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노름이 불법 행위였기 때문에 노름빚을 받아달라는 청원은 웬만큼 간이 큰 사람이나 정신 나간 사람이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장수 현감은 이 청원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노름빚을 관정에 납부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강제하기 위해 양사헌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따라서 당연히 수령과 이기찬이 혹시 결탁하지 않았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즉 수령이 이기찬의 부탁을 받고 노름빚 상환 청부업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이 이렇게 될 수 없다고 양사헌은 판단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령에게 이를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증이 하나도 없는데 불쑥 수령을 의심하는 듯한 내색이라도 보이면 자신은 영영 감옥에서 풀려날 가망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밤새 궁리 끝에 그는 새벽에 감옥의 간수에게 청탁하여 탄원할 수 있도록 지필묵(紙筆墨) 즉 종이와 붓 및 먹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어렵게 지필묵을 얻은 그는 이기찬에게 노름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을 관에서 증빙해달라고 요청했다. 노름빚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떼인 돈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기찬이 후에 어떠한 명목이라도 내세워 또다시 말썽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노름빚은 모두 다 갚았다는 증빙이라도 해 둘 요량이었다.


양사헌의 탄원서(출처: 필자 제공)


그런데 그의 예상했던 대로 얼마 뒤 이기찬은 노름빚 170냥에 대한 이자를 받지 않았다며 또다시 소송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양사헌은 이번에 요청했던 증빙서류를 증거로 첨부하여 자신이 노름빚을 다 갚았음을 주장했다. 다행히 그 사이 수령이 바뀌었는데 후임 수령은 노름을 금지하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고 이기찬의 불법 행위를 크게 나무랐다.




아비의 간절한 부탁


시간이 몇 년 더 흐른 후 양사헌의 아버지인 양경원(梁慶源, 1825~1897)은 막내아들 양사건(梁思健, 1870~1935)에게 남겨주고픈 말을 ‘유훈서(遺訓書)’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양경원은 조선 시대 어느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선비였다. 이런 그에게 연이어 불행이 닥쳤다. 부친상을 당한 후 가세가 점차 기울더니 아내마저 잃었다. 다행히 후처로 송씨를 맞이했는데 처가의 도움으로 가산이 점차 넉넉해진 데다 세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그런데 가운이 쇠하려고 했는지 큰아들 양사헌이 겨우 스무 살로 접어들자마자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노름쟁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가끔 돈을 몰래 가지고 나가 노름을 하고 들어오더니 나중에는 아예 노름방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돈을 가져오도록 했다. 처음에는 크게 꾸중했지만, 혼인도 했던 터라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매번 나무랄 수도 없었다. 큰아들은 노름방을 전전하더니 끝내 나이 서른을 넘기자마자 사망하고 말았다.

불행은 언제나 혼자 오지 않는다고 큰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도 노름에 빠져 남은 가산마저 탕진하고 말았다. 어느 날 둘째가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집을 나간 후로 소식이 없었다. 죽었거나 혹은 살아 있다면 분명히 노름방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되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양경원은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 감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집안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으나 이제는 몸도 마음도 다 쇠해버렸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쥐꼬리만한 재산이지만 훗날 말썽이 없어야겠기에 이를 미리 분배해놓아야 했다.

막내 아들은 제 형들과는 달리 투전이나 골패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글을 읽고 농사짓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그나마 믿을만 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다 놓고 당부의 말과 재산 분배 내력을 기록한 유훈서를 썼다.


양경원의 유훈서(출처: 필자 제공)


유훈서를 쓰는 그 순간에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큰손자 양순삼이 아직 어리다는 점이었다. 어린 손자를 두고 눈을 감으려 하니 무척 안쓰러웠다. 큰아들이 혼인한 후 손자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아들 녀석이 매번 노름방만 돌아다녔던 터라 며느리는 이른 나이부터 독수공방을 했다. 어쩌다가 집에 들어와도 돈만 손에 쥐면 쏜살같이 노름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조상의 은덕인지 어느 날 큰아들이 잠깐 집에 들렀다 간 후 큰며느리에게 태기가 있었다. 손자가 태어난 이후 양경원은 손자의 얼굴만 보면 온갖 시름을 잊었다. 그러나 손자가 혼인하는 것도 못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 막내아들에게 주는 유훈서의 말미에 손자를 잘 돌보아주도록 간곡하게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노름은 강한 중독성으로 개인을 파멸로 이끌고, 전염성 또한 대단해서 형제가 함께 노름에 몰두하게 만들어 온 집안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양경원의 유훈서는 노름으로 인해 개인과 가정이 어떻게 패가망신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사헌의 탄원서를 시작으로 조선 시대에 성행한 노름으로 인한 폐해를 조명해 보았다. 노름빚 상환을 증명해달라는 탄원서는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문서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 후기 부패한 수령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수령이 노름꾼과 유착해 노름빚을 받아주는 일종의 청부업자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문서 이면에 숨어 있는 사실은 문서 앞면에 드러나 있는 내용만을 꼼꼼하게 추적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읽다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을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유훈서를 통해 자식의 노름빚을 갚느라 평생 일군 재산을 모두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른 목소리와 노름의 마수에서 벗어난 막내아들과 손자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희망의 싹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어느 시대나 일탈은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고 품어서 사회에 포용하느냐는 당시 사회와 문화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집필자 소개

전경목
전경목
고문헌관리학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장, 한국고문서 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논저로는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수향편-사조 정승 정원용이 기록한 조선의 통치 시스템』(공역),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등이 있다.
“어느 땅에나 도박의 폐단이 존재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3-12-12 ~ 1803-12-13

1803년 12월 12일, 대릉하보(大凌河堡) 30리를 가서 말에 풀을 먹이고 쌍양점(雙陽店) 20리를 가서 묵었다.

대릉하(大陵河)는 퍽 넓고 크다. 바다에서 80리 떨어져 있고 삼면이 다 큰 들판이다. 곧 명말(明末)의 전쟁터이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군중을 거느리고 적군과 항거하는데, 하루는 큰바람이 급작스럽게 일어나 나는 모래가 하늘에 가득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병이 진지 앞에 닥쳐와 채 대오를 정비하기도 전에 단숨에 붕괴되었다. 그래서 유정은 마침내 그 일로 죽었고 그의 휘하 수십 만의 무리들이 뒤이어 죽었는데, 언제나 구름 끼고 흐린 때가 되면 답답하고 억울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대릉하보의 마을은 대릉하에서 5리가 떨어진 곳으로, 민가와 점포의 번성함이 신민참(新民站)과 맞먹을 정도다. 이곳에는 식품으로 어차과(魚鹺苽)가 있어 별미로 친다.

대릉하보(大凌河堡)에서 앞으로 10여 리를 가면 길 왼쪽 평원에 사동비(四同碑)가 있다. 명 나라의 도독 첨사(都督僉事) 왕평(王平)과 왕종성(王宗盛)의 묘비이다. 만력(萬曆) 연간에 왕씨의 부자 형제가 충절을 세워 마침내 비석을 건립하여 일문(一門)의 충렬을 포창하였는데, 무덤 네 모퉁이에 각각 비석 하나씩을 세웠기 때문에 사동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뒤쪽의 두 비석은 뽑아가 버리고 단지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앞쪽의 두 비석에는 각각 명도독 첨사 왕공휘모지묘(明都督僉事王公諱某之墓)라고 씌어져 있다.

비석에는 자획을 긁어 버린 흔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본래 공적을 기술한 글이 있었으나, 그 어구가 당시의 기휘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혹 뽑아 긁어 버린 것이리라.

서북쪽으로 금주위(錦州衛)까지 20리 사이에는 지나온 여관이나 관청에 ‘금지도박(禁止賭博)’ 네 글자가 많이 씌어져 있다. 도박의 폐단이 우리나라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송산보(松山堡)는 소릉하(小凌河)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적루(敵樓)를 두었던 곳이다. 《심양일기(瀋陽日記)》, ‘신사년(1641, 인조 19) 중추 보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무릇 6일 만에 가로놓여진 한 언덕에 이르러 금주성(錦州城)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호행인(護行人)이 말하기를 ‘한족(漢族)의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이 성을 굳게 지켜 성 밖에 화포(火砲)를 많이 묻었으며, 유림(柳琳)도 그 동쪽 모퉁이에 있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몽고병과 함께 전진(戰陣)을 치고 불을 놓았으며 성안에서도 그것에 맞서 포를 쏘아 포탄이 여러 차례 세자막에 떨어졌는데, 포탄이 거위알 크기만 하므로 흙담을 쌓아 가리우다가 후에는 또 송산(松山) 서쪽 10리 가량에다 막차(幕次)를 옮겼다.’고 하였다.

산마루부터 평지까지 다 참호를 판 것이 토성(土城)의 형상 같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포위 진지를 쌓았던 자리다. 조대락(祖大樂)이 총병(摠兵)으로 성을 지켜 2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임오년(1642, 인조 20) 2월, 총병 왕정신(王廷臣)의 내응으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성안의 사람들은 다 도륙되었는데 오직 친절한 장관(將官) 13인만이 죽지 않았다. 조대락과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는 다 잡혔는데 조대락은 곧 항복하였고 홍승주는 처음에는 굽히지 않다가 심양에 이르러서 역시 항복했다고 한다. 보루 위에는 봉화대가 있고 연기와 불을 피우던 곳이 아직도 뚜렷하게 보인다.

관마산(官馬山) 아래에 큰 무덤 둘이 있는데, 이것은 경관(京觀)이다. 옛날의 싸움터였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산 뒤에는 본래 몽고 부락이 있었는데, 몽고 족속들은 거처하는 가옥이 없고 좋은 물과 풀이 있는 데로 가서 머물러 살곤 한다. 명대 말기에 한번은 이들이 비바람같이 급작스레 닥쳐와 남의 부녀자를 약탈해 가 버려서 주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데로 이전해 버렸다.

행산보(杏山堡)는 역시 명대 말기에 백전을 거듭한 싸움터다. 관군(官軍)이 이곳에서 크게 패전하여 마을 집들이 아직도 쓸쓸하고 들판의 기색은 황량하다. 그래서 자연 보는 것마다 처참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高橋堡)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병신년(1776)에 사신 일행이 왕씨(王氏) 성을 가진 점사에 투숙했는데, 밤중에 뜻밖에 은 1000냥을 잃어버려 형부(刑部)에다 일러 왕씨 일가를 체포 심문했다.

왕씨의 처는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사실 은을 훔치지는 않았고, 다만 처녀[室女] 때에 한 사나이와 간통했으니, 죄를 감히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숨김이 없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왕씨의 식구를 전부 풀어 주고 그 처에게 옷 한 벌을 내리고 역(驛)의 수레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꽤 현저하게 영이(靈異)하여 밤중의 음산한 기가 내릴 때에는 번번이 병마의 치닫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한 자, 감옥에 갇히다”

투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07-06-05 (윤) ~ 1607-06-10 (윤)

1607년 윤6월 5일, 권경흥(權景興)의 사건을 듣고 섬뜩했다.

윤 6월 10일, 몹시 더웠다. 심부름꾼이 영천에서 돌아왔다. 그가 전해준 전 형의 편지를 보았다. 편지에 권경흥이 팔목(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하여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26 ~ 1794-03-12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둑과 장기에 이성을 잃은 사람”

장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8-05-09 ~ 1808-05-24

요즘 노상추가 묵고 있는 여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둑과 장기가 대유행이었다. 같은 여관에 묵는 사람 중에는 바둑에 넋을 잃고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빠진 사람도 있었다. 비단 이 집에서만 유행인 것은 아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바둑과 장기에 푹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여 앉으면 바둑판과 장기판을 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훈수를 두곤 했다.

이렇게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건만, 노상추는 바둑알과 장기말에 손도 대질 않았다. 잡기는 군자가 익힐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상추 집안이 3대가 무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니 노상추도 으레 바둑 등의 잡기를 즐길 것이라 여기지만 노상추는 바둑과 장기가 저포(杼浦)나 다름없는 못된 습속이라 여겼다. 오늘도 장동원(張東源) 령(令)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바둑을 온종일 두었다. 장동원 령이 노상추에게도 같이 바둑을 두자고 권했으나 노상추가 거절하자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재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바둑에서 재미를 찾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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